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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32화 (389/2,000)

# 632

632화. 고난

미부인이 홀로 대청에 남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스스로 세운 계획이 마음이 들지 않나봐?  불안하기라도 한 건가?”

그녀의 의식 속에서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천귀모(黃泉鬼母), 혼백을 찌르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있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만요번이 걱정이라면 이 늙은이가 나서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나를 구속에서 풀어 준다고 말하면 그까짓 만요번쯤이야 뭐…….”

“당신의 구속을 풀어준다고요?  꿈도 꾸지 마십시오!”

“내 다 너를 생각해서 그런 것인데 싫으면 말거라! 이번에 요수들이 모여든 것은 이전과는 양상이 달라 보이니 허령전에 숨는 것이 상책이 아니란 말이다. 내 보기엔 이번에 너희 소극궁이 큰 화를 피하기 힘들 것이야.”

미부인의 의식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아도 당신의 구속을 풀어 줄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 같은 귀수를 풀어주는 것이 더 큰 화를 불러 오는 것입니다. 그냥 현귀령(玄鬼令) 속에 얌전히 계시죠.”

상대의 회유와 협박에도 미부인은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네가 겨우 5, 60년 만에 원영 후기에 이를 수 있었겠느냐. 게다가 몇 번이나 너를 위험에서 구해주지 않았다면 죽었어도 벌써 죽었지 소극궁 궁주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여인이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그 말도 사실이지만 당신도 잊지 마십시오. 제가 만년현빙 속에서 현귀령을 꺼내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을 거란 것을요. 저를 도와 원영기에 이르게 해준 것도 동생주(同生呪)를 풀 능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저를 구한 건 자신을 구한 것에 불과하지요.”

“그래도 나를 풀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약속했지요. 하지만 제게 비술을 찾아 당신이 현음귀기(玄陰鬼氣)를 수련할 수 있게 도우라고도 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도와 화신기에 이르게만 해준다면 당신의 동생주의 저주도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너를 화신기로 이끌어 달라고?  내가 무슨 하늘에서 떨어진 진짜 신선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당시 내가 화신기에 이를 능력이 되었다면 어찌 귀수(鬼修)가 되었을까!”

여인의 목소리가 대노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제가 죽기 전에 당신을 다시 봉인해 버릴 것입니다.”

“흥! 눈앞의 관문도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주제에 말이 많구나. 모아두었던 혼석(魂石)도 다 써버렸겠지?  혼석 없이 나를 부리겠다는 생각은 버리거라.”

“혼석은 없지만 저 요물들이 허령전을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소극궁의 일에 당신이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미부인이 어두운 얼굴로 말하고는 수결을 맺어 법결을 발동했다. 곧 황천귀모라는 여인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뚝 끊겼다.

* * *

이틀 후,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아 있던 대부분의 저계 제자들이 철수했고 외부의 요수 대군은 빙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소극궁 수사들은 강력한 마지막 금제 몇 개를 두고 요수들과의 마지막 일전을 준비해야 했다. 차 요괴의 화신인 아이는 며칠 만에 몸을 회복하고 부곡주인 노인과 화형기 요수들을 데리고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떠 있었다.

격렬한 전쟁 끝에 쌍방은 사상자가 난무했지만 그래도 요수의 세력이 더 강했다. 아이가 만요번을 이용해 소극궁 장로 둘을 통째로 집어 삼켰고 어쩔 수 없이 미부인이 직접 출정해 마지막 금제를 이용해 요수 대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차 요괴는 그것을 보고 만요번의 신통을 펼쳐 엄청난 수의 요수 화신들을 만들어내 마지막 금제를 공격했다. 이에 소극궁 수사들은 전부 퇴각해 한려비경 속의 허령전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미부인의 명령에 따라 즉시 한려비경 내의 금제가 발동되었다.

쿠릉!

동시에 세 개의 허령전을 중심으로 땅이 진동하더니 한려비경 내부의 땅이 갈라지며 숨겨져 있던 초대형 진법이 솟아올랐다.

진법은 한 눈에 보기에도 수없이 많은 영석들이 박혀 있었다. 수천 개 이상의 영석들 중 태반이 중계 이상의 영석이었고 가장 핵심이 되는 진법에 영력을 불어넣는 10개는 희귀한 고계 영석이었다.

진법에서 주술이 떠다니며 반짝이는데 무척 신비로웠다. 잠시 후 빛들이 응결해 은빛 찬란한 기운으로 한려비경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때 세 대전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며 빛기둥이 각 건물의 지붕에서 솟구쳤다.

쿠르릉 콰쾅!

하늘에서 굉음이 들리며 빛기둥이 모여든 공간의 파동이 기이해졌다. 빛들이 부글부글 끓듯 요동치다가 수백 장에 이르는 하얀 호선을 그린 것이다.

허공에 나타난 빛의 호선으로 한려비경에 거대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에 수많은 누각들이 붕괴되었고 점점 황폐해져갔다.

그리고 세 개의 궁전은 공간균열과 호응하듯 빛이 더욱 밝아 졌고 허공의 은백색 호선은 넓어졌다. 공간균열이 한려비경 상공 절반을 차지할 무렵 그 안에서 은색 기운이 쏟아져 나와 세 궁전을 감싸 안았다.

쿠쿵!

그 중 하나가 먼저 몸을 떨며 땅에서 서서히 상승하더니 공간균열 틈으로 올라갔다. 은빛이 반짝이고 거대한 궁전이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자 두 번째 궁전이 떠올랐다.

그러나 세 번째 궁전이 땅에서 상승할 무렵 한려비경 모처에서 흰빛이 번뜩이며 한 장 크기의 새하얀 빙봉이 나타났다.

요수가 한려비경의 기이한 모습에 청록색 눈을 번뜩이더니 마지막 허령전을 향해 입을 벌려 하얀 빛을 쏘아냈다.

그녀는 공간균열이 궁전들을 삼키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세 궁전이 차례로 사라진 후에 허공의 공간균열이 서서히 입을 다물며 마지막에는 은빛으로 번뜩이며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한려비경 내의 기이한 일들도 동시에 사라졌다.

그제야 빙봉이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폈고 다시 하얀 빛을 번뜩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콰콰콰쾅!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천동지할 소리에 산 전체가 한동안 몸을 떨었다. 요수 대군이 결국 빙성의 마지막 금제를 뚫은 것이다.

청배창랑이 변한 노인과 차 요괴의 화신인 아이가 제일 먼저 산으로 날아들었다. 이때 현옥동 하부의 한려상인은 경지를 뛰어 넘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진법 속에서 한립은 어느새 자라극화의 주입을 멈추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노부인과 백몽형 등도 진법 중앙의 거대한 암석 위를 보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암석 위에는 이미 하얀 빛구슬이 사라진지 오래였고 그 대신 우윳빛의 연꽃이 피어 있었다.

한려 상인이 그 위에 단정히 앉아 연잎이 뿜어내는 한기에 휩싸여 모습이 흐릿해졌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미간 사이에 여섯 가지 색깔의 연꽃 표식이 피어났는데 보일 듯 말 듯 불안하게 번뜩였다.

기이한 것은 한려 상인의 몸에서 은은하게 단향목의 향이 난다는 것이었다. 맑은 나무 냄새 같기도 했고, 또 진한 약향 같기도 한 것이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안에는 희미하게 비린내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수도계에서 화신기에 이르는 모습을 목격한 이는 극히 드물었지만 몇 가지 전해지는 이야기는 있었다.

“몸이 단향목처럼 변한다는 말이 그저 떠도는 소문이 아니었군요. 기이한 향으로 보아 한려 수사께서 경지를 넘어서는데 성공한 것이 아닐까요?”

눈을 부릅뜨고 살피던 노부인이 부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글쎄요. 한려 형의 기운이 아무래도 불안정한 것이 육체는 화신기의 경지에 이렀지만 원영의 변화가 순조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희의 한염으로 응결된 연꽃 표식이 저렇게 흔들릴 수는 없지요.”

노승이 미간을 좁히며 지적했다.

“어쩔 수 없지요. 사 수사께서 여러 한염의 힘을 빌려 원영을 강제로 키웠지만 스스로 수련으로 이룬 결과가 아니니 불안정할 수밖에요. 그래도 이 정도까지 이른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저희가 대장로를 도와 원영의 안정화에 힘을 실어 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한립의 탄식에 푸른 장삼의 중년인이 조급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절대 안 될 말입니다. 화신기 경지에 이르는 일이 그리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불안정한 상태도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괜히 저희가 나섰다가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백몽형이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반대했다. 한립은 그 말에 미소 지으며 반대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침묵했다. 지금은 확실히 다른 이들이 간섭할 단계가 아니었다.

이미 이틀간 밤낮 없이 한염을 조종하느라 다른 수사들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의식이며 법력의 소모가 극심한 상태였다. 수사들은 그저 한려 상인이 스스로 경지를 뚫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한립은 남색 빛을 일렁이며 한려 상인 체내의 법력의 흐름이나 원영의 변화를 자세히 살피는 중이었다. 미리 살펴두면 나중에 자신의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이것만으로도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남은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다른 수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기에 의식을 최대한 끌어 올려 보고 있었지만 명청령안의 신통을 사용하는 한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시간이 점차 흘러가고 우윳빛 연꽃 위에 앉아 있던 한려 상인이 몸을 떨자 돌연 기이한 향기가 몇 배는 농염해 지고 미간의 표식도 커졌다.

“헛!”

동시에 지켜보던 수사들도 정신이 번쩍 들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신경을 집중했다.

그때 가부좌를 하고 앉은 한려 상인이 두 눈을 떴는데 눈동자가 놀랍게도 적금색으로 번뜩였고 몸이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한려 상인도 주위를 살피며 놀라더니 수결을 맺어 알 수 없는 법결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한립은 자신의 체내에 남아 있던 영력들이 갑자기 동요하며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크게 놀란 한립이 공법을 운용해 겨우 체내의 영력을 통제했는데 다른 수사들도 안색이 급변한 것이 비슷한 일을 겪는 듯했다.

그리고 돌연 주변 진법들이 동시에 공명하며 보호막이 두꺼워졌고 위쪽에서 빛을 모아 진법 중앙으로 쏘아 보내자 빛들이 한려 상인의 몸에 이르러 소리 없이 사라졌다.

“천지원기(天地元氣)를 끌어 들이다니!”

누군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 속에 부러움과 경외감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느껴졌다. 한립도 그 말에 흠칫 놀랐다.

그때 한려 상인은 구멍 뚫린 물 항아리처럼 한기를 끊임없이 빨아들여 눈의 금빛이 밝아졌고 미간의 표식은 더욱 진해졌다.

이런 기이한 현상이 장장 일다경 동안 이어졌는데 한려 상인의 몸에서 뼈와 살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며 신형이 몇 촌 가량 불어나고 있었다.

그의 미간에서 표식의 빛이 커져 머리를 절반 정도 뒤덮었다가 다시 급속히 수축해 작은 수정처럼 미간에 박혔다. 도처를 소용돌이치던 빛의 기운들도 일순 멈추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한립과 다른 수사들이 느끼던 영력의 난동도 사라지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한려 상인은 신중한 얼굴로 수결을 맺으며 다시 천천히 눈을 떴는데 미간의 여섯 색깔 연꽃에서 빛이 사라졌다.

‘이미 화신기에 이른 것인가? ’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푸른 장삼의 중년인과 백몽형 등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큭!”

그러나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돌연 한려 상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누가 보아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어서 다들 눈을 부릅떴다.

“한려 사형! 무슨 일입니까?”

푸른 장삼의 중년인이 다급하게 안부를 물었지만 무턱대고 다가가지는 못했다. 한려 상인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안 그래도 불안정하던 미간의 연꽃 표식이 빛을 내며 떨어져 내려 폭발해 여섯 가지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크흡.”

대장로는 비명과 함께 허공에서 떨어져 내려 연꽃 속에서 몸을 비틀었다.

“대장로님!”

이제 백몽형도 도저히 기다릴 수 없는지 중년인과 함께 연꽃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한립과 다른 세 수사는 서로 눈을 마주칠 뿐 다가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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