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1
631화. 요혼(妖魂)
한립은 남색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주변 금제는 이전과 비슷했지만 영기 파동이 달라져 있었다. 진법종사에 근접한 그의 실력으로 바로 오묘한 이치를 파악했다.
“시작하십니다. 노부가 성공만 한다면 모두의 노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우윳빛 빛구슬 속에서 한려 상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그가 수결을 맺으니 주변의 남색 화염이 더욱 진한 색을 내기 시작했는데 짙푸른 망망대해를 보는 것처럼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한려 수사께서 건람빙염을 이 정도로 정련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인계에서 이렇게 정순한 한염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노부인이 그 모습이 부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게 완전히 정련된 건람빙염의 모습이라고? ’
한립이 바로 관심을 보이며 한려 상인을 바라보았다. 다들 가부좌를 하고 앉자 아래쪽에서 빛의 연꽃이 피어나려는 참이었다.
한립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수결을 맺자 보라색 화염이 전신에 일었다. 다섯 한염을 지닌 수사들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고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연꽃이 그 소리와 함께 커지며 원래보다 배는 거대해졌고 이에 따라 수사들의 한염도 눈부시게 불타올랐다.
한립은 극한의 화염 속에서 순간 태양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온 몸이 뜨거워졌다. 체내의 자라극화가 완전히 격발한 것이다.
한려 상인이 한염 속에서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치자 남색 빛에 쌓인 원영이 그의 몸에서 서서히 솟아올랐다.
“흡!”
원영은 가부좌를 하고 수결을 맺은 채 목에 은빛의 옥패를 메고 있었는데 어떤 보물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원영이 한 장 정도 떠오르더니 입을 벌려 남색화염을 뿜어냈다. 그것은 한려 상인이 수백 년 간 정련해 낸 건람빙염의 진정한 영수였다.
화염이 빙글빙글 돌며 빛나는 남색 수레바퀴처럼 변했을 때 원영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남색 수레바퀴와 함께 원영이 우윳빛 한기의 덩어리에서 빠져 나와 버린 것이다.
한려 상인의 원영이 떠나는 것을 본 다른 수사들은 지체 없이 빛의 구슬을 향해 한염을 더욱 쏟아 부었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수사들의 한염이 원영에 닿기도 전에 남색 수레바퀴가 속도가 빨라지더니 강력한 힘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한염들이 몸을 떨며 빨려 들어갔다. 남색으로 반짝이던 수레바퀴가 오색찬란하게 변하더니 현란한 색을 뿜어댔다.
원영이 낮게 소리치며 법결을 분출해 몸 아래에 있는 수레바퀴에 던져 넣자 각양각색의 화염들이 몸을 떨며 터져나갔다. 그러자 원영의 손길은 더 바빠졌고 전신의 법력을 소모할 것처럼 쉼 없이 법결을 던져댔다.
법결들이 한염을 북돋아 폭발한 이후 다시 융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별안간 한염의 빛들이 뭉친 연꽃이 피어났다.
연꽃은 검은색, 하얀색,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남색의 빛을 머금고 경계가 분명했지만 하나로 융합되어 있어 신묘하기 그지없었다.
연꽃이 점점 더 커지자 그 안의 원영은 더 작아 보였다. 원영이 알아들을 수 없는 구결들을 중얼거리자 연꽃이 수축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크기가 줄어들 때마다 빛은 더욱 짙어졌다.
잠시 후, 연꽃이 한 척 길이로 줄어들자 연꽃잎들은 더욱 선명해졌고 여러 가지 색깔의 한염들이 그 위에서 활활 타올랐다.
한립이 그것을 본 순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다른 수사들과 마찬가지로 더욱 많은 양의 한염을 분출했다. 한염은 곧 빛으로 만들어진 연꽃에 흡수되어 소리 없어 사라져갔다.
이때 원영이 돌연 두 눈을 뜨더니 눈에서 기이한 금빛을 반짝였다. 원영이 연꽃을 향해 손을 뻗자 수많은 가느다란 남색 실들이 날아들어 연꽃잎에 녹아들었다.
원영은 계속 주술을 외우면서도 표정은 매우 신중했다. 그가 드디어 손을 거두자 손끝과 연꽃잎을 연결하는 남색 실들이 일렁였다.
연꽃잎들이 남색 실들에 의해 천천히 모여 들더니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것처럼 활짝 피었던 꽃이 꽃망울로 돌아가 원영이 그 안에 머금게 되었다. 그 위로 여섯 가지 한염이 끊임없이 흘러 다녔다.
한립을 포함한 다른 수사들은 법결을 이용해 극한의 화염을 통제했다.
여섯 빛깔의 연꽃 꽃망울이 천천히 아래로 하강했다. 그것으로 인해 한참동안 빛이 번뜩였고 꽃망울은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윳빛 빛구슬을 투과해 한려 상인의 머릿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제 다섯 수사들은 다시 한염을 빛구슬로 쏘아댔고 우윳빛 빛구슬이 바로 한려 상인의 몸을 꿰뚫어 그가 경지를 뚫고 올라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츠츠츳.
이제 진법이 운용되며 나는 기괴한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 *
현옥동 바깥, 빙성의 어느 골목을 하얀 의복을 입은 소극궁 사내 둘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좌우를 살피는 모습이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다.
이제 빙성 상공에는 거대 빙봉이 보이지 않았는데 백요이와 노인에게 잠시 격퇴를 당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빙성에서 가장 외진 곳이었지만 그래도 얼음벽으로 굳게 둘러싸여 있었다. 두 제자는 이미 이곳에 머물던 저계 제자들이 며칠 전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이곳입니다.”
사내 하나가 앞을 보며 눈을 빛내자 또 다른 사내가 골목을 꺾어 얼음으로 만든 건물 뒤쪽에 나타났다. 눈앞이 밝아지며 서른 장 너비의 공터가 나왔는데 그곳에 남녀 수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오다니. 더 늦었으면 우리끼리 먼저 움직여야 하나 했습니다.”
여인이 두 사내를 보며 불만스레 말했다. 그 옆에 선 사내는 새까만 피부에 짙은 눈썹을 지닌 거한으로 그들처럼 소극궁 제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남녀의 신분이 나중에 이곳으로 온 제자들보다 낮아보였는데 거침없는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상했다.
“바깥에서 이미 진법의 마지막 몇 층만 남겨두고 깨는 중이라 인간 수사들이 엄청 긴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적당한 구실을 찾아 빠져 나오느라 애를 먹었고요. 괜히 의심을 사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테니까요.”
나중에 온 사내들 중 하나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여인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무어라 하려는데 곁에선 새까만 거한이 조급하게 나섰다.
“됐으니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빨리 움직입시다. 아무리 분혼이라도 아무렇게나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여인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새까만 얼굴의 거한을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재빨리 저물대 속에서 진법 원반 등과 영석을 꺼내 공터에 진법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소형 진법이 모습을 갖춰 갔는데 놀랍게도 단방향 임시 전송진이었다. 한식경이 지나 전송진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인근의 얼음 건물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 보호 법기를 방출했다.
“겨우 요수의 분혼 몇 마리가 소극궁에서 별 짓을 다하는구나.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이 말이겠지?”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며 두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한 명은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등에 장검을 멘 붉은 얼굴을 지닌 중년이었다.
“소극궁 집법장로들입니다. 빨리 달아나야 해요!”
여인이 인영의 얼굴을 보고 식겁해 소리치고는 먼저 붉은 빛줄기로 변해 튀어나갔다. 이에 거한과 다른 두 사내도 바로 빛줄기로 변해 달아나려 했다.
“우리에게서 달아날 생각을 하다니 우습구나!”
장검을 멘 중년인이 냉소하며 고갯짓을 하자 눈부신 검기 네 줄기가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여인과 나머지 두 사내가 검기에 뚫려 추락했는데 유일하게 새까만 얼굴의 거한만이 공격을 피하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재미있구나.”
붉은 얼굴의 중년인은 곧바로 입을 벌려 하얀 빛줄기를 분출했다. 거한의 푸른빛을 하얀 빛줄기가 순식간에 따라잡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때 곁에 있던 수염 난 노인이 소매를 털어 버들잎 모양의 비취색 법기 네 개를 쏘아 보냈다.
잠시 후, 시체에서 다급히 빠져나온 무언가가 비취색 이파리의 공격에 절규하며 연기로 사라져 버렸다. 붉은 얼굴의 중년인이 거의 완성된 전송진을 보며 얼굴을 굳히고는 손을 저어 굵은 검기를 방출했다.
쾅!
폭발음이 들리며 전송진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덩이만 남았다.
“갑시다. 분혼을 멸했다고 큰 타격은 줄 수 없겠지만 기분은 꽤나 나쁠 겁니다.”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하더니 먼저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고, 그 뒤로 붉은 얼굴의 중년인이 따랐다.
이런 일들이 동시에 다른 두 곳에서도 벌어졌고 고계 요수들의 분혼이 몸에 깃든 제자들은 일망타진 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소극궁이라고 볼 수 있는 한려 비경 속에서는 소극궁 궁주를 포함한 원영기 수사 대여섯이 진지하게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그 중 미부인과 다른 두 수사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한 것이 원기를 크게 상한 듯했다.
“만요곡이 만요번까지 가지고 왔을 줄이야……. 방 장로와 황 장로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혼자의 힘으로 차 노괴의 분신을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네. 그나마 강력한 진법의 힘을 빌려 겨우 해낼 수 있었지만 늙은 요괴의 부상이 심하지 않아 이틀 후면 다시 몰려올 것이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퇴각해야겠어.”
류 씨 성의 미부인이 짙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지금 철수하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요물들이 성 앞에 이른 후에 퇴각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덥수룩하게 수염 난 거한이 반대했다.
“아마 그때는 늦을 수도 있네.”
“왕 사형께서는 요족들과 겨우 한 번 겨루시고 겁이라도 먹은 겁니까!”
“황 사제, 자네가 무엇을 알겠는가? 나는 만요번의 위력을 직접 확인했네. 아무리 통천령보의 모조품이라지만 이미 상고 시대 천요번(天妖幡)과 비슷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였단 말이네. 다행히 차 요괴의 화신일 뿐이라 궁주님과 협공해 상대를 겨우 물러나게 한 것이고!”
하얀 얼굴의 노인은 화내는 기색 없이 담담히 말했다.
“그렇게 강하단 말입니까? 그래도 그렇지, 아직 강력한 금제가 몇 개나 남아 있는데 아무 것도 해보지 않고 물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거한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미부인이 미간을 좁히며 수사들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적들이 이미 성 밖에 이르렀다는 것을 모두 잊은 것은 아니겠지? 백 사매와 엽 사제가 빙봉을 환광현천진(幻光玄天陣) 속으로 유인해 잠시 가둬놓지 않았다면 이럴 시간도 없었을 것이네! 게다가 빙봉은 천지영수의 직계 후손이라 10급 요수지만 거의 화신기 수사와 맞먹는 위력을 발휘하지.
지금 두 장로가 직접 진법을 통제하고 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네. 이런 상황에서는 철수를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겠지. 허나, 동 장로의 의견도 일리가 있으니 이렇게 하도록 하세.
수행이 낮은 제자들부터 먼저 허령전으로 피하고, 그 다음 우리가 고계 제자들과 남아 상대에게 타격을 준 후 철수하는 것으로 말이야.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본 궁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지 상대를 척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들 명심하게.”
미부인의 말에 다들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녀의 뜻에 따라 제자들을 소집해 먼저 철수할 자들과 최후의 일격을 준비할 자들로 나뉘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