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0
630화. 한염세수(寒焰洗髓)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장정이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이에 한염을 분출하던 한립과 나머지 수사들은 신호를 받은 것처럼 중얼거리던 법결을 바꾸고 빛구슬로 들어가던 한염들을 회수했다.
그리고 그들이 앉아 있던 연꽃이 흩어져 사라지고 각자의 방식대로 휴식에 들어갔다.
이런 일이 며칠 사이 열댓 번은 지나갔다. 매번 법력을 거의 소모해야 했지만 다들 지닌 영단과 영석이 풍족해 반나절이면 다시 회복하고는 했다.
다른 이들이 한염을 거둔 것을 본 빛구슬 속의 장정도 눈을 감고 안정을 취했다. 시간이 지나 빛구슬 속 장한을 본 노부인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 한려 수사에게 탄복하였습니다. 다섯 가지 한염으로 세수(洗髓)를 하는 극통을 참아내시다니요. 아무리 한염의 위력을 통제할 수 있다지만 죽느니만 못한 고통이 아닙니까! 보아하니 한려 형께서 육체를 단련하는 특수한 공법을 익혀 오신 듯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리 의식으로 버텨도 몸이 붕괴했을 텐데요.”
“용 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한려 사형은 젊은 시절 육체를 단련하는 비술을 익혀 몸이 단단하기가 다른 수사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한려 상인 대신 푸른 장삼의 중년인이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어쩐지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한염으로 한려 수사를 대신해서 몇 번이고 세수를 해드렸으니 이제 육체와 원영 모두 한계에 달했을 겁니다. 앞으로 이틀이면 결정이 나겠군요.”
“허나 진법 내부의 현옥한기가 많이 소모되었으니 운용을 멈추고 보충을 한 뒤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회색 장포 승려가 숙연히 입을 열자 한립이 차분히 말했다.
“허! 수사가 이 비술을 그렇게까지 이해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맞습니다. 다시 도처의 현옥한기를 모으고 시작할 겁니다.”
빛구슬 속의 한려 상인은 의아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한립이 속으로 뜨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한려 상인은 언제 몸을 일으켰는지 우윳빛 빛구슬 속에서 유유히 떠오르고 있었고 몸에 박혀 있던 은빛 칼날 다섯 개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상처마저 씻은 듯이 사라진 후였다.
“그저 추측에 불과했습니다.”
한립은 그저 미소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오, 그리 눈썰미가 좋으시니 노부가 이번에 경지를 넘어설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도 말씀해주시지요. 노부가 예측한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려 그럽니다.”
한려 상인은 저물대 속에서 남색 장포를 꺼내 걸치며 한립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이 비술은 수사께서 만들어낸 것인데 당연히 수사의 예측이 정확하겠지요.”
담담한 한립의 말에 그는 미소 지으며 더는 무어라 하지 않았다. 곧 한려 상인이 허공에서 열손가락을 튕겨 댔다.
우웅!
법결이 날아가 진법에 흡수되었고 운용을 멈춘 것이다. 다섯 빛기둥마저 사라지자 한립 등 다섯 수사가 허공에서 표표히 내려왔다.
도처를 맴돌던 돌풍이 우윳빛 한기의 빛을 머금고 들이닥쳤지만 미리 알고 있던 수사들이 각자의 한염으로 몸을 보호했다.
“하루가 지나면 다시 진법을 움직일 테니 여러분은 그동안 잘 쉬어 두십시오. 내일 경지를 넘어서는데 성공한다면 약속한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한려 상인이 건장해진 몸으로 모두에게 포권을 취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미 약조를 하였는데 당연히 최선을 다해 도와야지요! 게다가 비술이 화신기에 이르는데 도움이 된다면 저도 나중에 필요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빈승도 원영 후기에 이를 수 있다면 이번 일이 기연이 되겠지요.”
노부인과 승려가 차분히 상대의 인사치레에 대꾸했다. 그러나 한립만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려 상인은 그들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지 고마움을 전하고는 다시 진법을 운용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나머지 수사들은 휴식을 취하러 태양정석으로 만든 건물로 들어갔다.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립과 수사들은 다시 건물을 나와 한려 상인이 어제보다 배로 불어난 우윳빛 한기 속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립이 진법의 변화를 자세히 살피려는데 승려가 놀라 무언가를 쳐다보았다. 그도 시선을 돌려 허공을 올려보고는 표정이 묘해졌다.
멀리 보이던 입구가 사라지고 통로를 열 거대한 솥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려 수사, 왜 이러신 겁니까?”
노부인이 그것을 보고 당장 경계심을 드러냈다.
“다들 오해 마십시오. 중요한 순간에 혹시나 방해를 받지 않을까 우려해서 잠시 입구를 막아 둔 것입니다. 그리고 솥은 경지를 넘어가는 순간에 건람정(乾藍鼎)의 위력이 필요해 회수한 것이고요”
“그렇습니까……?”
승려와 노부인은 대답은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리고 한립은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동굴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런 노부가 수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그럼 솥은 사용하지 않아도 좋으니 입구는 봉해 놓고 건람정을 입구 쪽에 두지요. 어떠십니까?”
한려 상인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상냥히 대안을 제시했다. 이후 소매가 펄럭이며 남색 화염을 품은 솥이 수백 장 밖의 입구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직 의심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입구를 통제할 수 있는 솥이 한려 상인과 멀어지자 꽤 안심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노부인이 생각을 하다가 얼굴을 풀었다.
“불안은요. 저희가 수사를 의심하기라도 했겠습니까. 그저 이상해서 연유를 물은 것 뿐이지요. 시간이 없으니 시작하시지요!”
마른 웃음을 흘린 노부인이 먼저 진법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한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려 수사의 말이 일리는 있지만 빈승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안전을 위해 저희 둘이 힘을 합치시지요. 용 수사는 소극궁과 인연이 깊으니 조심하시고요.”
회색 장포 승려의 전음이었다. 한립은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그저 시선만 돌려 승려를 보았다. 그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쿠쿠쿵!
상대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전음을 보냈을지 생각하는데 돌연 현옥동 위쪽의 허령전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무언가에 강력한 일격을 당한 것 같았다.
모두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들이 소극궁이 있는 산 정상에 있었다면 전신이 수십 장에 이르고 새하얀 옥으로 이루어진 봉황이 산을 둘러싼 보호막을 돌며 날개를 펄럭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빙봉(氷鳳)은 놀랍게도 수백 장에 달하는 한기를 응결해 빙산을 만든 다음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 엄청난 충격에 경천동지할 굉음이 터진 것이다.
하얀빛이 폭발하며 두꺼운 보호막이 심하게 왜곡되었다. 깨져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충격에 산 전체가 흔들리며 몇몇 건물들이 무너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은색 장삼을 입은 여인이 변한 빙봉의 위력이었다. 빙해 저계 요족 태반이 화를 당하자 화가 치민 그녀가 금제대진의 공간을 찢고 얼음성 상공으로 날아든 것이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기습에 산 중의 수사들이 허둥지둥 몸을 숨기기는 했지만 소극궁 고계 수사들이라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요수 위에 뜬 하얀 고리가 다시 빙산을 응결하기 시작했을 때 보호막에서 은색 빛줄기와 하얀 빛덩이가 나타났다. 빛이 가시고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백요이와 회백발의 노인이었다.
멀리서 백요이는 은색 비검 두 자루를 날렸고 회백발의 노인은 소매 속에서 어떤 보물을 분출했다. 뜻밖에도 윤기가 나고 투명한 옥병이었다.
병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안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들리는 점이 특이했다. 빙봉이 초록색 눈을 굴려 그것을 보더니 날개를 펄럭여 열댓 개의 거대한 얼음 창이 순식간에 응결되어 날아갔다.
노인은 콧방귀를 뀌며 수결을 맺었다.
옥병이 몸을 떨며 열댓 개의 흑백 기운을 뽑아내 얼음 창들을 휘감자 거대한 얼음 창들이 젓가락처럼 얇아져 옥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빙봉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즉시 신형이 흐릿해지며 엄청난 눈보라로 변해 그 둘을 덮쳤다. 이에 백요이와 회백발 노인도 물러서지 않고 은색 빛줄기 두 개와 흑백 기운을 북돋았다.
쿠콰쾅!
산 정상에서 눈보라와 빛들이 엉켜들었다.
이상한 일은 미부인과 다른 소극궁 장로들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강력한 금제를 유지하고 있거나 이미 전방으로 가 다른 고계 요수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깥이 난리가 났다는 것은 현옥동 속의 수사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한려 상인은 동굴 입구를 보더니 일순 얼굴이 어두워졌다.
“요물들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나 봅니다. 이렇게 되면 더더욱 입구를 봉해야지요.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아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서는 안 되니까요. 요수 대군에 대항하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제가 어찌 세 분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소극궁 대장로가 결연히 외쳤다.
“한려 수사의 마음은 저희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수사의 수련의 고비를 넘기게 해주면 저희도 원기가 크게 상할 텐데 이곳을 봉쇄하기까지 하시니 솔직히 불안하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가 귀 궁과 친분은 있지만 그저 몇 마디 말만 믿고 목숨을 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승려가 미간을 좁히며 입장을 표현했다.
“다들 조심스러우신 것이 당연합니다. 저라도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마구 대사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한려 상인이 난처하다는 듯 물었다.
“이렇게 하시죠. 다른 마음이 없다면 건람정을 우리 셋이 보관하게 해주시지요. 비술을 마치는 대로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저희도 안심하고 수사를 돕지요.”
회색 장포 승려가 눈을 빛내더니 돌연 건람정을 요구했다. 그 말에 한립과 노부인은 멍해졌지만 곧 승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거 좋은 방법입니다.”
한립이 바로 동의했다. 노부인도 자세히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푸른 장삼의 중년인이 표정이 변해 끼어들었다.
“마구 대사, 이것은 아니지요. 건람정이 어떤 보물인지 대사도 아시지 않습니까. 건람빙염을 수련하기 위한 전문 법기를 어찌 다른 수사의 수중에 넘긴단 말입니까.”
승려를 설득하면서 중년인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잠시 보관했다가 이곳을 떠날 때 돌려드린다는 말이었습니다. 가져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구양 수사께서는 저희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중년인이 반박을 하려는데 한려 상인이 말을 끊었다.
“됐네, 구양 사제! 마구 대사의 말씀이 틀리지 않네. 좋습니다. 노부도 동의하지요. 하지만 건람정은 세 분 중 어느 분이 보관하시겠습니까?”
대장로가 너무 쉽게 동의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의 반문에 승려와 노부인은 일순 말이 없어졌다.
“기왕 마구 대사께서 제안한 일이니 솥도 대사가 보관하시지요. 저는 항상 대사의 인품을 신뢰해 왔습니다.”
노부인의 말에 한립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믿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빈승이 잠시 솥을 보관하지요!”
세 사람의 결정에 한려 상인도 지체 없이 허공의 솥을 가리켰고, 솥이 주변의 남색 화염을 회수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승려가 소매를 털어 초록색 기운으로 솥을 휘감았다. 잠시 속박해 두려는 것 같았다. 비록 건람빙염이 든 솥이기는 하나 그도 극한의 화염을 다루는 수사였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립이 먼저 보라색 빛기둥 위로 가서 앉았다. 솔직히 이전 며칠간 그는 비술에 거의 통달했다. 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과정이 남아 있으니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비술의 요체를 익힐 작정이었다.
그래서 동굴이 봉인된 것에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신통을 믿고 있었다. 대장로가 고비를 넘기고 원영기를 넘어 화신기 수사가 된다 해도 경지를 공고히 하기 전까지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화신기 수사가 인계에서 지니는 한계에 대해 령롱이 남기고간 옥간에 간단히 적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안전을 위해 태음진화를 조용히 진법 범위 안으로 불러들였다. 어차피 돌무지로 이뤄진 곳이라 다른 이들은 눈치 챌 수 없었다.
이제 승려도 다시 인자하게 웃으며 빛기둥 위로 앉았다. 한려 상인이 바로 열손가락을 튕겨 다시 진법을 발동했다. 다시 사방에서 기운이 일어 보호막이 펼쳐졌고 이전과 똑같이 바깥 상황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