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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29화 (386/2,000)

# 629

629화. 진해종(鎭海鐘)

다른 무리의 은색 장삼을 입은 여인은 단아한 자태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지닌 절세미인이었다. 흉악한 고계 요수들은 연약해 보이는 절색의 여인을 두고 쩔쩔매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풍 선자, 이번에 소극궁 인류 수사들도 아낌없이 힘을 쓰고 있나 봅니다. 천년 이상 모아온 한기를 한 번에 방출하다니, 이후 강적이 나타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늙은이가 혀를 찼다.

“청 수사도 알지 않습니까. 저들은 우리가 한수를 노리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니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이지요. 함락당하면 한기를 남겨 놓는다고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은색 장삼을 입은 여인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이번에 풍 수사께서 친히 나서신다 하여 노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천 년 전부터 폐관에 들어가 빙연도(氷淵島)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들었는데요.”

아이가 말을 하는데 목소리는 노인의 것이라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다른 일이었다면 나서지 않겠지만 영계로 승천하는 일에 관한 것이니 본 도주가 직접 나서지 않고는 안심이 되지 않아서요. 수사도 그래서 직접 출정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선자께서 이리 흔쾌히 수락하실 줄은 몰랐지요! 보아하니 벌써부터 소극궁이 눈에 거슬리셨나 보군요. 이참에 빙백 선자가 인계에 남겨놓은 종문의 맥을 끊어버리려 생각하시는 걸 보니. 그렇게 보자면 봉 수사께서 우리 만요곡의 힘을 빌린다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아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었다.

“빙백 선자가 승천하기 전에 막대한 신통을 발휘해 빙연도를 몇 백년간 얼려버렸기에 우리 일족도 소극궁 수사들을 꺼리게 되었지요. 하지만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고 영계로 올라갈 기회가 왔는데 어찌 망설이겠습니까?  차 형이야 말로 화신을 만들어 내는데 적잖은 공을 들이셨을 텐데 득보다 실이 더 많을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여인이 냉랭히 물었다.

“봉 수사의 말대로 사안이 중대하니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손해가 커도 감당해야지요. 그런데 상상도 못 했습니다. 역령통로와 인계가 만나는 공간접점이 허령전의 공간 균열 속에 있을 수 있다니 말입니다. 미리 본 좌의 아이들을 파견해 확인해보려다 수차례 실패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직접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소극궁 세력도 만만치 않으니 전부 멸살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이가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허령전처럼 거대한 공간 균열을 품고 있는 경우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차 형의 말을 들으니 이미 몇 번이나 공간이 만나는 곳을 찾으려 하신 것 같은데 이번에도 실패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간단합니다. 계속 다른 공간접점을 찾아 다녀야지요! 상고 수사들이 찾았다면 노부라고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시간이 더 걸릴 뿐이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듣자니 수사는 영계 요수의 후예로 신통이 대단하고 수명도 일반 요수들보다 길다던데, 그래도 이렇게 세월이 흘렀으니 저와 비슷한 상황이겠지요. 수명을 늘리기 위해 본체는 벌써부터 봉인을 해두었을 테고요.”

“알면서 굳이 물으시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아이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정곡을 찔린 듯 했다.

“그래봐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며칠 전 오룡해(五龍海) 쪽 소식을 들으니 그 백록 노괴가 벌써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도 천지영수의 후예로 상고 시대부터 수련에 대성을 했고 평소에 생명이 경각에 이르지 않으면 절대 본체를 움직이지 않았다고 들었는데요.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윤회에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인은 탄식하며 멀리 보이는 금제대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정확한 위치를 찾아야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위험해도 노부는 도전해 볼 것입니다. 봉 수사께서 원하시면 힘을 합쳐 시도해 보아도 좋겠고요.”

“그건 공간접점을 찾은 뒤에나 이야기 하시지요. 눈앞의 소극궁도 쉽게 당해줄 것 같지 않으니까요.”

아이의 제안에 은색 장삼의 여인은 가타부타 명확히 하지 않았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만요곡의 힘만으로도 수차례 빙성을 깨부수고 그들이 허령전 안에 숨어 지내게 만들었습니다. 그저 상대가 허령전 공간을 찢고 달아나면 그때는 선자가 나서주셔야 합니다.”

“우리 빙봉 일족은 태생적으로 공간을 찢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실망시켜 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여인이 싱긋 웃었다.

세 요수가 하는 대화를 모두 듣고 있으면서도 나머지 요수들은 절대 끼어들지 않았다. 마치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아이가 미소 지으며 무어라 하려다가 돌연 안색이 변해 먼 곳을 응시했다. 노인과 여인도 동시에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눈보라 틈에서 강력한 영기의 압력이 순식간에 밀려들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용의 울음소리인지 호랑이의 포효소리인지 모를 종의 울림이 하늘을 뒤덮고 바다를 뒤엎을 기세로 몰아쳤는데 빙봉 쪽 8, 9급 요수들 마저 안색이 달라지고 비틀거렸다.

만요곡 화형기 요수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빙해 요수들의 이변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10급 요수인 여인은 종소리 따위는 상관없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아채자 분노해 소리를 쳤다.

“진해종! 우리 빙해 일족의 보물이 빙백 선자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이로구나!”

노인과 아이가 그 말에 시선을 마주쳤다.

종소리는 계속 울려댔지만 8, 9급 요수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간은 순간에 불과했다. 다들 잠시 고생을 했지만 요기를 방출해 몸을 보호했던 것이다.

그제야 여인의 얼굴이 한결 나아졌지만 돌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신형을 번뜩이며 솟아올랐다. 반짝이던 빛이 허공에서 폭발하며 무수히 많은 가느다란 실로 변해 허공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빛을 모아 다시 빙산으로 내려온 은색 장삼 여인의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무슨 일이기에, 선자께서 막대한 법력을 소모해가며 추적술을 펼치신 겁니까?”

“소극궁 수사들이 감히 진해종을 발동함과 동시에 대량의 수사들을 파견해 빙해 일족을 살육하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만을 살핀 것이지만 이미 많은 동족들이 당했고요.”

노인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여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얼음이나 극한의 속성을 지닌 요수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보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진해종이었군요. 그런데 어쩌다가 그것이 인류 수사들의 손에 들어간 것입니까?”

아이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저것은 통천령보의 모조품에 불과해 진짜의 위력을 따라 갈 수는 없으니까요. 8급 이상은 미미한 영향을 받을 뿐이에요. 빙백 선자가 빙연도를 얼려버렸을 때 실종되었다 했더니…….”

“아마 빙백 선자가 후대를 위해 빙해 일족을 상대하라 남겨 놓은 수단인가 보군요. 봉 수사는 이제 어쩌시렵니까?  인원을 보내 도움을 드릴까요?”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진해종의 영향력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가 잡으러 가기도 전에 인류 수사들은 철수할 테지요. 게다가 저들은 우리 빙해 일족에 허다합니다. 다만 이 원수는 갚아줘야지요. 빙궁에 들어가는 대로 저계 수사들을 잡아 죽여야겠습니다.”

은색 장삼 여인이 살기를 드러냈다.

“그러시지요. 이제 결계를 깨볼까요?  선자의 부하들은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을 듯하지만 만요곡 저계 동족들은 아직 건재하니 한기만 흩어지면 큰 힘이 될 겁니다.”

아이가 웃음을 흘리며 입에서 검은 기운을 분출했고 그 안에서 회색의 깃발이 펄럭였다.

여인은 깃발을 보더니 화를 가라앉히고 자세히 살폈다.

대여섯 촌 길이의 회색 기운에 감싸인 깃발 표면에는 요귀 문양이 가득했는데 마치 무수히 많은 귀신과 요괴들을 죄다 모아 놓은 것처럼 같았다.

“이게 혹시 귀 곡의 만요번인지요?”

“봉 수사의 안목이 정확하십니다. 이게 바로 만요번이지요. 수만 년간 요기를 머금고 위력을 키워온 깃발의 위력은 상상 이상일 겁니다. 그저 화신의 몸으로 이곳에 온 탓에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수사들의 도움이 더해지면 며칠 지나지 않아 금제들을 전부 무력화 시킬 수 있을 겁니다.”

아이가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이어 그가 두 손을 마주쳐 회색 법결을 깃발로 날렸다. 잿빛을 발산하며 깃발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각종 요수의 환영이 촘촘하게 나타나 번뜩였다.

은색 장삼의 여인도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고 곁의 요수들에게 무어라 분부하니 요기를 뿜어내서 각종 법보를 발동했다. 노인도 무표정하게 비슷한 명을 내렸다.

만요곡 요물이 각종 둔술을 펼쳐 하늘 위로 날아올라 다양한 법보와 보물들을 꺼낸 것이다. 요기가 흩날리고 화려한 빛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아이가 광소를 터트리고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주술을 외기 시작했다. 만요번이 그의 주술 소리에 서서히 커지더니 높이가 백 장이 되어 빙산 위에 우뚝 솟아올랐다.

깃발 표면의 요수의 환영들은 이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가라!”

아이가 고함을 치며 속으로 법결을 발동했다. 그러자 깃발에서 무수히 많은 요물들이 울부짖으며 각종 요기의 기운에 휩싸여 전면의 하얀 한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한기 속에서 돌연 열댓 명의 인영들이 나타나 금제 속에서 공격을 가하니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소극궁 밖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현옥동 돌무지 위에서는 돌풍이 불고 있었다.

반 장 크기의 보라색 연꽃 위에 한립이 수결을 맺으며 입에서 가느다란 보라색 화염을 전방의 초대형 빛구슬로 주입했다. 빛구슬은 한립의 자라극화 외에도 검은색, 흰색, 노란색, 초록색의 한염들을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한립을 포함한 다섯 수사들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고 안색이 창백했다.

진법 중앙 빛구슬 가운데 누군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키가 훌쩍 커진 것이 결코 이전의 한려 상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난쟁이 노인이었던 그가 삼십 대의 건강한 장정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웃통을 벗은 사내의 어깨와 가슴, 목 뒤 그리고 배에는 각각 은색 단도가 깊이 박혀 있었는데 피는 흘리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몇 촌 크기의 벌레들이 사내의 몸을 제집 드나들 듯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었다. 벌레들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한려 상인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떨어 무슨 고행을 견디는 사람 같았다.

자세히 살피면 벌레들은 극한의 한기가 응결해 만들어진 다섯 가지 색깔의 기운이었다. 그것들은 장정의 몸을 파고 들 때마다 크기가 줄었는데 계속 작아지다가 펑 하고 결국 사라졌다.

그러면 바깥에서 같은 색깔의 화염 한줄기가 날아들어 또 벌레의 형상을 하고 장정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이런 과정이 끝없이 이어졌다.

한려 상인의 내단이 있는 곳에 장정과 비슷하게 생긴 원영이 수결을 맺고 전신을 남색 빙염으로 두르고 있었다. 한염 벌레들은 사내의 몸으로 들어와 원영의 코로 들어왔다가 다시 입을 빠져나와 사내의 피부 밖으로 나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원영은 무표정했지만 그 주위를 두른 남색 빛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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