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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27화 (384/2,000)
  • # 627

    627화. 현옥동(玄玉洞)

    붉은 화염은 우윳빛 화염과 접촉하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한기의 빛을 흡수해버렸다. 한립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태음진화는 은월이 이야기 해준 대로 삼대 진령지화 중에 하나가 분명했다. 아직은 한 줄기 뿐이라 위력은 자라극화에 비할 수 없으나 무언가를 흡수하는 것은 훨씬 뛰어난 것 같았다.

    태음진화가 현옥동 한기의 빛에 상극인 것을 확인하자 그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가 몰래 두 손을 등 뒤로 보내 손가락을 튕겼다. 새빨간 화염 몇 줄기가 한기의 빛 속으로 스며들어 종적을 감추었다.

    푸른 중년인이 무언가를 느꼈는지 한립을 돌아보았다. 한립은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푸른 장삼의 중년인은 한립과 그 주변의 동굴 벽을 자세히 살폈지만 아무런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그저 한 형께서 안전히 따라 오고 계시는지 확인하려 돌아보았습니다. 의식이 제한되니 참 불편합니다.”

    구양이라는 성을 지닌 중년인은 한립의 신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함부로 의심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저야 잘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저 주변의 한기가 이상해서 살펴보느라 조금 지체가 되었지요.”

    “현옥동은 상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보통의 한기와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푸른 중년인이 검은 화염으로 한기를 공격해보니 타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표정이 달라졌다.

    지하 동굴의 아래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돌덩이들이 혼잡하게 싸여 있는 수백 장 너비의 광장이었다. 돌무지 한쪽에 새빨간 석조건물이 있었는데 네 벽이 어딘가로 통해져 있었다.

    이곳의 현옥한기(玄玉寒氣)는 이전보다 몇 배는 강했고 돌무지 중심의 천연의 돌기둥 위에 하얀 한기가 응결해 만든 거대한 빛구슬이 요동쳤다.

    한립은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야 돌기둥에 박힌 현옥들이 입구에서 보았던 광석들 보다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립은 다른 이들을 따라 걸어갔다.

    “너무 잘 된 일입니다. 동굴 내부의 한기를 어떻게 결집할까 고민이었는데 자연적으로 한기가 똘똘 뭉쳐 있다니 고생을 덜었습니다.”

    한려 상인이 돌기둥 위를 보며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고 소매를 털어 남색 얼음송곳을 우윳빛 빛의 구슬로 투척했다.

    파칙!

    금속성의 충돌음이 들리고 얼음송곳이 산산조각 나 사라졌다.

    “역시!”

    그 모습에 한려 상인은 오히려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렇지, 다들 저 석조 건물이 보이십니까?  태양정석(太陽精石)을 깎아 만든 곳이라 유일하게 현옥한기가 침투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며 노부가 현옥동에서 지켜야할 금기 사항을 알려드리지요. 만일 실수를 했다가는 화를 당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화를 당하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노부인이 얼굴이 굳어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물었다.

    “현옥동에는 만년현옥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 외에도 주의해야 할 것들이 더 있습니다. 일단 만년현옥은 조각내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상고 수사들이 알 수 없는 신통으로 하나로 응결해 놓은 데다 오랜 세월 이곳의 한기로 거의 일체화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본 궁이 먼저 채굴을 했지 이렇게 쌓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곳의 현옥을 전부 채굴해 보물에 섞어 제련하면 제자들의 수행이 일취월장해 태일문과 천마종에 버금가는 세력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푸른 장삼 중년인이 아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까?”

    “의심스러우시면 용 부인께서 직접 시도해 보시지요. 그럼 구양 사제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노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자 한려 상인이 미소를 지었다.

    “오, 그래요?  이 늙은이도 결과가 궁금하니 한번 해보지요.”

    노부인은 돌연 지팡이를 들어 돌무지 속의 콩알만 한 현옥을 조준했다. 그러자 노란 빛이 지팡이 끝에서 방출되어 현옥을 공격했다.

    퍽!

    현옥은 빛이 번뜩였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했다. 노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표정도 험악해졌다. 그녀가 이번에는 소매 속에서 고풍스러운 푸른 망치를 꺼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망치가 번개처럼 현옥을 내리쳤다.

    쿵!

    이번에는 푸른빛과 현옥이 부딪쳐 폭음이 들렸지만 또다시 현옥에서 빛이 번뜩이고는 끝이었다. 노부인도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용 수사,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아무리 강력한 보물을 사용해 취하려 해도 현옥은 부서질 뿐 채굴할 수 없습니다.”

    한려 상인의 웃는 낯을 보며 곁의 승려가 물었다.

    “그렇다면 귀 궁이 사용할 수 있는 현옥도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저희에게 한 덩이씩 내주신다는 약조는 너무 과한 것이 아닙니까?”

    “마구 대사의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본 궁이 대량으로 현옥을 채굴하지는 못해도 소량을 얻는 것은 가능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 사매 얼른 보여드리게.”

    한려 상인은 승려의 말에 백몽형을 향해 분부했다. 백의 여인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저물대에서 하얀 병을 꺼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돌무지로 걸어간 백몽형이 하얀 병의 뚜껑을 열고 법력으로 액체 한 방울을 꺼냈다. 희미한 회색 기운을 발산하며 새까만 액체가 돌무지에 박힌 현옥 알갱이로 날아갔다.

    무덤덤하게 서 있던 한립이 액체를 보고 눈빛이 흔들렸지만 다른 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시선을 빼앗겨 눈치 채지 못했다.

    액체는 현옥에 닿자마자 스며들어 사라졌고 현옥이 회색 기운에 둘러싸여 스스로 돌덩이를 벗어나 날아올랐다.

    노부인과 승려는 물론 한립도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백몽형이 현옥을 챙기자 한려 상인이 설명했다.

    “본 궁을 창립하신 조사께서 남기신 보물이 있습니다. 스스로 천지의 음기를 모아 십년에 한 번씩 이런 액체를 만들어내는데 신비한 일이지요. 이 액체로만 동굴의 현옥을 채굴할 수 있습니다. 본 궁도 천년에 한 번 현옥동을 개방하니 지닌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요.”

    “그랬군요.”

    회색 장포 승려가 이해가 간다는 듯 수긍했다. 노부인은 동굴에 널린 만년현옥을 보며 아깝다는 표정을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한립은 액체가 현옥을 떼어내는 것을 보고 심하게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는 태양정석으로 만든 건물 안에 들어가 천천히 나누시지요!”

    한려 상인이 붉은 석조 건물을 가리키며 걸어갔고 다른 이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건물 전체가 반투명한 붉은 재질로 이뤄져 있었고 왕성한 열기가 물씬 느껴졌다. 마치 불 속성 영석을 죄다 모아 놓은 느낌이었다.

    ‘태양정석!’

    한립은 듣자마자 태양정화라는 글자를 떠올렸다. 분명 양자 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건물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바깥에서 기승을 부리는 현옥한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안심하고 한염을 거둬들인 다음 적당한 자리를 골라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자 승려가 이리저리 둘러보며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 궁에 만년현옥 외에도 태양정석과 같은 기이한 보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빈승은 태양정석이 지화(地火) 깊은 곳에서 태양정화가 응결되어야 만들어 진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많은 태양정석을 어디서 구하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태양정석에 대해 알고 계시다니 놀랐습니다. 허나 역대 선조께서 모은 재료들의 출처를 후인들이 알 길이 없지요. 이제 현옥동 금기에 대해 상세히 알려드려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한려 상인이 헛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고 승려도 그저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같은 시각 소극궁의 누각에서는 하얀 장삼을 입은 우아한 미부인이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사내와 여인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은 백요이와 감찰 장로인 회백발 노인이었다.

    “그 말은 한려 대장로가 벌써 허령전을 개방해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말이구나.”

    미부인의 목소리는 탁했지만 한 번 들으면 쉽게 잊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궁주께 고합니다. 대장로께서 이미 일을 벌였습니다만 위급한 상황에 대한 대비는 미리 해놓은 것 같습니다.”

    백요이가 공손히 답했다.

    “대비는 무슨! 항상 해오던 방책을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하겠지요. 적의 세력이 너무 강해 진법으로도 막을 수 없으면 핵심 제자들을 허령전에 들여보내 공간 속에 숨게 하는 것일 텐데 그마저도 가장 중요한 허령전을 차지하고 있어 제자들이 피할 곳이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회백발 노인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만일 한려 사형이 화신기에 이른다면 요수 대군이 아무리 많아도 문제될 것이 없을 테니.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엽 사제는 대장로의 안배에 따르게. 듣자하니 이미 8급 이상의 요수들이 북명도 인근에 출몰해 순찰을 돌던 제자들을 죽였다던데…….”

    미부인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예, 화형기 요수들이 출몰했습니다. 본 궁 바깥을 깨끗이 정리하고 포위한 뒤에 진격하려는 것일 테죠. 이전에 그랬듯 늘 해오던 방식이지만 이번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엽 사제는 할 말이 있으면 해보게.”

    “제가 얻은 소식에 따르면 빙해의 빙봉이 선두에 나섰고 만요곡 부곡주 청배창랑이 나타난 것 외에도 차 노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머뭇거리던 노인이 확실하지는 않다는 듯 말했다.

    “차 노괴! 그럴 리가.”

    “류 사저의 말씀대로 저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요곡 내부 첩자에 따르면 늙은 요물이 이번엔 정말 나설 것 같다고 하니 문제입니다.”

    “차 노괴라면 상고시대부터 인계에서 살고 잇는 요물이 아닙니까?  언제 화신기에 들었는지도 모르는 자인데 그가 나섰다면 벌써 본 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백요이가 고개를 저으며 믿지 못했다.

    “백 사매, 그렇기는 하지만 지난번 곤오산 봉인이 풀렸을 때 고마 성조며 심지어 영계의 요비까지 출현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일과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르지.”

    “고마 성조와 영계 요비에 관한 소문이 큰 종문들 사이에 떠돌기는 했지만 진짜인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저도 곤오산에 있기는 했지만 중상을 입어 중간에 돌아오는 바람에 내막을 모르고요. ……아, 한 수사는 마지막까지 곤오산에 있었으니 아는 것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요이가 짙은 눈썹을 좁히고 고심하다 한립을 떠올렸다.

    “네가 청해 이곳에 머물고 있는 사내 말이더냐?”

    “예, 바로 그 수사입니다.”

    “됐다, 곤오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이번에 요수 대군이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야. 차 노괴는 절대 만요곡을 떠날 리가 없으니 화신을 보내는 정도일 테고.”

    미부인이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백요이와 회백발 노인도 화신기 수사들의 비밀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기에 사저의 말에 크게 안심했다.

    “늙은 요물이 화신을 보낸다면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북명도를 둘러싼 금제의 한기를 전부 방출하면 빙해 요수들을 제외한 요수들은 대부분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빙해 요수들은…….”

    회백발 노인도 의견을 냈다.

    “빙해 요수들은 창립 조사께서 남기신 보물들로 상대하면 된다. 오랜 세월 오직 이날을 위해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 아니더냐. 그럼 8급 이상의 요수들만 주의하면 되겠지.”

    미부인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궁주께서 언질을 해주시지 않았다면 까먹고 있을 뻔했습니다. 확실히 그것들이 있으면 빙해 요수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요. 저계 요수들에만 효과가 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요수 대군의 기세에 우리가 방어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저계 제자들은 되는 대로 떠나게 하고 필요한 인원만 남기고 불필요한 사망자가 나오지 않게 하거라.”

    “예, 궁주!”

    이번에는 백요이와 노인이 동시에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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