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625화. 허령전(虛靈殿)
한립은 입을 벌려 보라색 화염을 뿜어냈고 즉시 보라색 불새로 변한 화염이 불뱀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얀빛과 보랏빛이 충돌해 낮은 폭음이 들리고 빛이 번뜩였다.
찰나의 순간 보라색 화염이 더욱 커져 하얀 빙염을 조금씩 잡아먹으니 하얀 불뱀은 사라지고 빛이 밝아진 보라색 불새만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백몽형이 그것을 보고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때 한립이 차분하게 손짓해 보라색 화염을 소매 속으로 회수했다.
“수사의 자라극화가 과연 남다른 것을 보니 저도 안심입니다. 한 형, 저를 따라 가시지요. 극한의 화염을 지닌 다른 수사들도 이미 도착하여 대장로님과 함께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랬군요. 보아하니 백 선자께서 제 실력이 마음에 놓이지 않아 일부러 시험을 하신 듯합니다.”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실소했다.
여인은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하얀 빛줄기로 변해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한립은 코를 긁적였다. 처음에 그녀가 창문으로 침입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도 바로 그녀를 따라 빛줄기로 변해 창문을 빠져 나갔다.
한식경 후 한립과 백몽형이 한려 상인이 기거하는 만년현빙 대청에 나타났다. 대청 안에는 건람빙염이 타오르고 있는 거대 솥과 네 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려 상인은 푸른 장삼의 중년인과 같이 앉아 있었고 백발의 노부인은 회색 장포를 입은 승려와 마주보고 있었다.
한립과 백몽형이 들어가자 네 수사의 시선을 받았는데 노부인과 승려는 그녀보다는 그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한립도 똑같이 의식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노부인은 원영 중기, 승려는 원영 중기의 최고봉 수준이었다. 그가 앞으로 걸어가며 그들을 향해 포권을 하고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백몽형은 한려 상인 쪽으로 가서 앉았다.
“용 부인, 마구 대사! 이쪽은 한 수사라 합니다. 제가 모신 극한의 화염을 다루는 다섯 번째 수사이지요. 여러분의 협조로 수백 년간 연구해온 비술을 드디어 사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한려 상인이 먼저 상냥하게 서로를 소개 시키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노부인은 냉랭히 한립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없어 성정이 괴팍해 보였지만 회색 장포의 승려는 자비로운 얼굴로 한립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려 수사께 들으니, 한 형도 관련 공법은 수련하지 않으시고 극한의 화염만 지니고 있다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승려가 차분히 물었다.
“인연이 닿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사의 한염은 직접 만들어낸 거라는데 새로운 종류의 한염이 나타난 것은 수만 년 만이 아닙니까! 늙은이에게 한 번 보여주실 수 없겠습니까?”
노부인은 쌀쌀맞은 말투로 말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고와 부조화를 이루었다. 내심 놀란 한립이 힐끗 노부인을 쳐다보았다.
“용 부인께서는 류취파(柳翠派) 대장로이신데, 특수한 공법을 익혀 젊은 시절의 목소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계십니다.”
한려 상인이 때마침 그를 위해 설명해주었다.
젊은 용모를 유지하는 비술을 수련하는 여인들은 많았지만 목소리만 젊게 유지하는 수사는 처음 본 터라 한립은 의아했다. 그의 표정을 본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 류취파의 공법에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닙니다, 그저 신기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또한 제 한염은 아직 정련도 거치지 못했는데 어찌 다른 분들의 한염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그의 신통에 겨우 원영 중기 수사를 두려워할 일은 없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상대를 적으로 돌릴 이유도 없었기에 웃으며 넘어갔다. 이에 노부인도 더는 말이 없었다.
그때 백몽형이 입술을 달싹여 한려 상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한려 상인이 그 말을 듣고 의미심장하게 한립을 바라보고는 헛기침을 해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용 부인과 마구 대사는 노부의 오래된 지기이고, 한 수사는 본 궁 장로 한 명와 친분이 깊어 이렇게 노부를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예상대로라면 고비를 뚫고 경지가 높아질 가능성은 삼성에 불과하지만 노부의 상황에 더는 미룰 수 없어 시도해볼까 합니다.”
“사 수사의 수명이 다해가는 것은 알지만, 오는 길에 보니 고계 요수들이 북명도 인근에 모여 들고 있던데요. 지금 비술을 시행하는 것은 귀 궁에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승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구 수사께서는 안심하시지요.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니라 해도 본 궁은 이미 대비를 마쳤습니다. 제가 죽는다고 해도 본 궁 전체가 멸살당할 일은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사 수사께서 미리 대비를 해놓으셨다니 빈승도 마음을 놓겠습니다.”
“저도 좋습니다. 벌써부터 비술의 진정한 효과를 확인하고 싶었으니까요.”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만족스런 얼굴의 한려 상인이 한립을 쳐다보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시작하시든 좋을 대로 하시지요.”
“좋습니다. 세 분이 뜻을 모아주셨으니 저를 따라 가시지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한려 상인은 두 손을 모으고 경쾌하게 몸을 일으켰다.
한립 등 세 수사가 몸을 일으켜 한려 상인을 따라 걸어갔다.
한려 상인이 그들 앞에서 걸어가다 거대 솥 곁에 이르러 중얼중얼 주술을 읊고 손을 뻗었다. 푸른 법결을 맞은 거대 솥이 웅웅 울리더니 남색빛이 크게 번지고 크기가 주먹만 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원래 솥이 가리고 있던 땅에 검은 지하 동굴이 나타났고 아래로 향하는 얼음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한려 상인은 손짓을 해서 작은 솥을 소매 속에 넣고는 먼저 걸어갔다. 백몽형과 푸른 장삼의 중년인이 그 뒤를 바짝 쫓았고 노부인과 승려가 시선을 마주치고 뒤를 따랐다.
한립도 잠시 지하 동굴입구를 살피다가 묘한 얼굴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까만 통로가 밝아졌는데 통로의 벽이 전부 현빙을 이용해 만들어졌고 일정 거리마다 달걀만한 월광석이 막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여 장을 걸어 내려가서야 얼음 계단이 끝이 났는데 평평한 통로로 이어졌다. 처음 와보는 수사들도 경험이 풍부했기에 마치 자기 집 장원을 걷듯이 유유자적했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모두가 얼음 통로를 나와 지하 전당에 이를 수 있었다. 전당은 평범한 청옥을 깎아 만들어진 공간이었는데 양식이 독특한 것이 상당히 고풍스러웠다.
그러나 전당 끝에는 벽이 아니라 거대한 석문이 있었다. 우윳빛에 높이가 2, 30장은 되는 석문에는 주술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고 진법이 층층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열댓 명의 수사들이 몰려 있었는데 전부 원영기 수행을 지닌 자들이었다. 아무리 대부분이 원영 초기의 수행을 지녔다지만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중에는 백요이와 회백색 머리의 노인이 가장 앞서 있었다. 한립이 눈을 깜빡이며 슬쩍 승려와 백몽형 등을 살폈다.
소극궁 수사들은 담담했지만 승려와 노부인도 의외라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한려 수사, 이게 무슨…….”
회색 장포 승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전부 본 궁의 장로들인데 허령전 속의 현옥동(玄玉洞)에 들어가려면 저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불러 모은 것입니다. 현옥동 속의 극한의 기운이 있어야만 비술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요.”
“허령전!”
그의 말에 승려뿐만 아니라 노부인, 한립까지도 깜짝 놀랐다.
“한려비경에 들어오시며 허령전 건물 세 개를 보셨을 것입니다.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실질적으로는 각자 다른 기능이 있는데 현옥동은 중간 허령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허령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바깥의 세 궁전이 아니라 또 다른 밀실 지하 통로로 들어가야 찾을 수 있지요.”
푸른 장삼 중년인이 이어서 설명을 했다.
따로 소개를 받지 않았지만 한립은 푸른 장삼의 중년인이 극한의 한염을 지닌 수사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자는 평범해 보이는 용모를 지녔지만 은근히 눈빛이 음침했다.
이때 백요이 등 수사들이 먼저 다가왔다.
“대장로께서 허령전을 여신다고요? 규정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소극궁이 큰 위험에 처해 적을 막을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개방한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외부인들을 데리고 현옥동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고요.”
회백발 노인은 다른 수사들과 마찬가지로 한려 상인에게 예를 올리기는 했지만 강경한 말투였다.
한립은 의아했다. 원영 중기 수사에 불과한 그가 대장로이자 원영 후기 최고봉에 이른 한려 상인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다니!
노부인과 승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엽 장로, 그럴 리가 있겠나. 허령전이 위기의 순간에만 개방되어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평상시에 개방하면 절대 안 된다는 규정은 없네. 이미 궁 밖에 제자들이 요수들이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으니 미리 개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고. 게다가 대장로인 내가 이 정도 권한도 없단 말인가?”
한려 상인은 이미 회백발 노인이 반대할 줄 알았다는 듯 느긋했다.
“그렇다고 해도 허령전에 외부인이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감찰 장로로서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영보(靈寶) 감찰을 맡은 엽 사제는 대장로인 노부의 결정에 반대할 자격이 있지. 허나 소극궁 내에 머무는 장로 중 3분의 2 이상이 동의를 한다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네.”
한려 상인은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한립이 주목한 것은 영보 감찰이라는 말이었다.
‘설마 통천령보나 혹은 영보의 모조품을 이르는 것인가? ’
그렇다면 원영 중기 수사의 방자한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회백발 노인은 소극궁 내부의 다른 분파인데 한려 상인과는 잦은 충돌을 빚는 인물 같았다.
노인은 한려 상인의 말에 표정이 달라져 장로들을 살폈는데 몇몇이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했다.
“어째서 금 사제 등을 파견해 일을 시키시나 했더니 미리 준비하신 것이었군요. 그렇다면 저도 더는 악역을 자처하지 않겠습니다. 대장로께서 고비를 넘기시고 무사히 더 높은 경지에 이르시기를 기원하지요! 그럼 저는 먼저 순찰을 돌아야 해서 가보겠습니다.”
노인이 난색을 표하더니 즉시 성큼성큼 걸어 전당을 나갔다. 한려 상인도 만류하지 않고 그가 홀로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제들은 그럼 봉인 개방을 준비합시다.”
푸른 장삼 중년인이 바로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소극궁 장로들은 미리 소식을 듣고 왔기에 바로 각양각색의 옥패를 꺼내 발동했다. 다양한 빛을 내는 옥패들을 보며 한립은 순간 흠칫 놀랐지만 바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 옥패는 한려 상인이 그에게 회수해간 것과 똑같이 생겼던 것이다. 힐끗 한려 상인을 살폈지만 그는 옥패를 꺼내지 않았다.
그때 푸른 장삼 중년인의 주도로 장로들이 주술을 외웠고 옥패에서 크게 빛이 번지며 서로 뭉쳐 높이 떠올랐다. 커다란 빛덩이는 곧 오색찬란한 여인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은 모호했지만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 깊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소극궁 수사들은 깊이 허리를 숙여 숙연히 인사를 올렸다.
아마 빛덩이가 변해 만들어낸 여인은 십중팔구 북야소극궁을 창립한 조사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창립한 상고 수사가 여인이었다는 점은 한립의 예상을 벗어났다.
‘난성해의 허천전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한립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인의 그림자가 여러 수사들의 힘을 받아 천천히 석문으로 날아갔다.
팟.
빛이 석문에 닿자 스스로 폭발해 영기의 빛으로 흩어졌고 석문에 새겨진 주술들도 사라졌다.
투투툭!
이때 허공에 떠있던 옥패들이 영성을 상실한 것 마냥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소극궁 장로들은 분분히 손을 저어 자신의 옥패를 회수해갔다.
한려 상인은 미소를 지으며 나아가 석문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남색 기운이 그의 소매에서 뻗어 나가 석문을 미니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다들 안을 자세히 살피려 할 때 한려 상인이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일갈했다.
“다들 조심하시요!”
한립은 영문을 몰랐지만 돌연 석문 안에서 경천동지할 굉음이 들리고 하얀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수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수행이 약한 자들은 뒤쪽으로 달아나 피하고 높은 자들은 보호막을 펼치거나 법보로 몸을 보호했다.
하얀 한기를 품은 바람이 전당 전체에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