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3
623화. 빙녕수(氷獰獸)
한립은 육익상공들이 위험할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12마리가 협공을 하면 8 급 요수를 만나도 목숨을 부지할 만한 영수였기 때문이었다.
쿠쿵!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 틈 사이에서 전투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한립이 조용히 소매를 털어 열댓 개의 금빛을 방출하더니 열 댓 자루의 금빛 장검들이 얼음 협곡 위에서 대기했다.
백요이는 그저 미소 지으며 나설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녀는 한립이 나섰으니 요수를 잡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라 여긴 것이다.
잠시 후, 괴이한 요수의 고함 소리가 아래쪽에서 울려 퍼지더니 하얀 눈보라가 위로 치솟았다. 사자의 머리를 닮은 예닐곱 마리의 새하얀 요수들이 깜짝 놀라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한립은 바로 사자와 엇비슷한 요수를 알아보았다. 이곳에 서식한다던 설후수였다. 그는 주저 없이 법결로 검들을 북돋아 금빛 검들이 빛줄기로 변해 아래쪽으로 날아가게 했다.
길게 늘어진 금빛 빛줄기의 요란한 빛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비검은 굉장히 빨라서 번개처럼 눈보라를 뚫고 요수들에게 다가갔다. 설후수들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금빛들이 괴이한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괴성이 울리고 요수들이 두 동강이 나서 다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빙하 협곡 아래서 경천동지할 괴성이 터져 나왔다.
쿠쿵!
굉음이 이어지며 굵직한 바람기둥 몇 개가 치솟았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니 바람기둥 꼭대기에 요수가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엎드려 있었다. 요수는 설후수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털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점이 달랐다.
“설후수가 아니라 빙녕수(氷獰獸)입니다. 저런 고계 요수들이 어찌 이곳에…….”
백요이가 이상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한립은 그저 눈을 빛내며 바람기둥 아래에서 열두 개의 하얀 기운이 뒤따르는 것을 살폈다. 육익상공들이 은색 요수들을 향해 한기를 분출하는 중이었다.
빙녕수는 7급 정도로 보였지만 새하얀 지네들의 한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열두 마리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견디고 있었다.
한립이 코웃음을 치며 비검들을 움직여 요수를 참살하려 했다. 그때 백요이가 갑자기 외쳤다.
“잠시 만요, 수사. 빙녕수는 희귀하게 얼음과 바람 속성을 띠는 요수이니 제게 남겨 주시지요!”
한립이 잠시 멈칫 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그럼 대신 잡아다 드리겠습니다. 수고롭게 백 선자까지 나설 필요는 없으니까요.”
말을 마친 그가 입에서 보라색 화염을 내뿜었다.
보라색 화염은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한 척 크기의 불새로 변했는데 마치 살아 있는 새처럼 모습이 뚜렷했다. 보라색 불새는 날갯짓 한 번에 바람기둥 꼭대기로 쇄도했다.
새하얀 지네들이 보라색 불새를 보더니 즉시 겁을 먹고 흩어졌고 그곳에는 은색 빙녕수들만이 남아있었다.
빙녕수들은 비록 지능이 뛰어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보라색 불새의 위험을 느끼고 달아나려 했다. 그때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한립이 눈을 빛냈다.
그러자 빙녕수들은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극통을 느끼며 고꾸라졌다. 한립이 강력한 의식으로 날린 실신자(失神刺) 때문이었다.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원영 후기 수사의 강력한 의식 공격에 7급 요수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 틈에 보라색 불새들이 요수들을 중간에 두고 선회했다.
촤륵!
보라색 빛이 어리며 요수들 주변으로 보라색 기운이 만들어졌다. 일을 마친 불새들이 다시 날개를 펄럭여 한립의 체내로 사라졌다.
잠시 후 보라색 기운이 가시고 열 장 크기의 보라색 얼음덩이가 나타났는데 그 안에 진귀한 빙녕수들이 전부 갇혀 있었다.
요수들이 구속당하자 바람기둥들은 차차 힘을 잃고 사라졌고 얼음 덩어리는 아래로 추락하려 했다.
옆에서 자라극화의 놀라운 위력을 지켜보던 백요이가 재빨리 허공을 쥐었다. 동시에 하얀 거대 손이 나타나 얼음덩이를 그녀에게로 끌어당겼다.
“감사합니다, 한 형.”
백요이가 밝게 웃고는 검은 빛의 영수대를 꺼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영수대 속으로 거대한 얼음덩이가 은색 요수들을 품고 사라졌다.
만족스러운 백요이의 표정을 확인한 한립이 아직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지네들을 가리켰다. 날개 달린 지네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제 몸을 한기로 감싸 주변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그것을 본 백요이가 놀라자 한립이 설명해 주었다.
“현빙화를 제련하는 동안 저계 요수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안배한 겁니다.”
백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제 푸른 빛줄기와 은색 빛줄기가 되어 얼음 협곡 속으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틈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몇 년 전 보았던 음양굴과 퍽 비슷했다.
바닥에 이를 때쯤 얼음 틈 양쪽이 수정처럼 잔잔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얼음 속성 법기를 제련할 수 있는 재료인 현빙(玄氷)이었는데 보통의 현빙은 그다지 귀하지 않았다. 오직 만년현빙만이 최적의 재료였다.
한립과 백요이는 현빙을 안중에 두지 않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두 수사의 발이 얼음 땅에 닿았을 무렵에야 우윳빛 광채를 내는 수정 광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립은 수정 벽에 피어난 하얀색 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꽃은 마치 길에 널린 야생화처럼 생겼지만 뿌리를 만년현빙에 박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이한 영초였다.
“세 송이면 충분하겠어!”
한립이 길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만년현빙의 양이 상당합니다. 이곳을 발견한 제자의 공이 크니 돌아가면 큰 상을 내려야겠어요.”
백요이가 만년현빙 광맥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현빙화는 채취하는 즉시 제련에 들어가야 해서 다른 재료들을 모두 준비해 왔습니다. 백 선자께서는 먼저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저는 일단 주변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북명도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 7급 요수인 빙녕수들이 나타난 것이 이상해서요.”
백요이가 잠시 생각을 하다 온화하게 답했다.
“그것도 좋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안심하세요, 한 형! 별 일은 아니겠지만 저도 혹시 몰라 주변을 한번 순찰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당부에 그녀가 미소 짓자 얼굴에 생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먼저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한립은 빛줄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고개를 숙여 현빙화 세 송이를 보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의 손이 저물대를 스치자 각양각색의 빛이 도처의 얼음 벽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 푸른 기운이 생겨나 인근을 감쌌다.
웽!
이어 금색 곤충 떼가 날아올라 푸른 기운 속으로 사라졌다. 이 정도면 강력한 요수가 나타나도 현빙단을 제련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안심한 한립이 주먹만 한 은색 솥을 꺼내 띄우고는 목함에 든 재료들과 작은 병들을 줄줄이 꺼내 늘어놓았다.
이제 그의 시선이 수정처럼 반짝이는 만년현빙 벽에 닿았다. 소매가 펄럭이고 금빛 세 개가 현빙화를 맴돌자 만년현빙이 꽃들을 품고 떨어져 내렸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한립이 손짓하자 옥함 세 개가 날아가 하얀 꽃을 무사히 받아냈다. 그리고 한립은 수결을 맺어 주변의 푸른 기운에 법결들을 던져 넣었다. 곧 기운이 요동치며 짙은 안개 속으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빙하 협곡에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지만 이제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3일이 지나갔다.
돌연 멀리 하늘 끝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빛줄기 세 개가 엄청난 속도로 빙하 틈으로 다가왔다. 다급하게 앞서가는 은색 빛줄기가 암담해진 것이 그 안의 수사가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 뒤로 붉은빛과 초록빛이 기세등등하게 날아갔다. 한 눈에 보기에도 쫓고 쫓기는 중이었다.
빛이 가시고 하얀 장삼을 걸친 단아한 얼굴의 여인이 나타났는데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녹색 기운이 도는 것이 독에 당한 것 같았다.
그녀는 사흘 전에 이곳을 떠난 백요이였고 기이한 독에 당해 원영 중기의 수행으로도 일순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백요이가 서둘러 빙하 협곡 아래를 보더니 그 아래쪽에서 반짝이는 남색 금제를 보고는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뒤를 쫓던 붉은 빛줄기와 초록 빛줄기가 백여 장 거리로 다가와 있었다.
“독이 퍼져 더는 도망가시기 어렵나 봅니다. 얌전히 잡힌다면 본 천군이 목숨만은 살려주겠습니다만.”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거만하게 외쳤다. 그러나 백요이는 콧방귀를 뀌며 상대조차 하지 않고 빙하 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사라진 후 빙하 협곡 입구에 도착한 남녀가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남색 금제에 멈칫했다.
요족 수사들이 자세히 안을 살피는데 돌연 도처에서 하얀 기운이 넘실거리더니 열두 마리의 새하얀 지네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나타났다.
“육익상공!”
붉은 빛 속의 여인이 희색이 만연해 소리쳤다.
“저것들이 육익상공라고요?”
초록빛 속의 사내도 놀란 듯 했다.
“이런 기연이! 저것들을 잡아먹으면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수행이 크게 늘 수 있을 겁니다.”
여인은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내며 전신에서 불길을 일으켰다. 그 안에서 열댓 마리의 날개 달린 불뱀들이 나왔는데 각각이 불꽃을 뿜어대며 지네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화염과 한기가 섞여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붉은 빛이 가시며 여인의 모습이 또렷이 드러났다.
길고 가느다란 몸에 청록색 눈을 가진 여인은 외모가 고운 편이었지만 뺨에 붉은 비늘이 돋아 있었고 입 안에는 뱀의 혀가 날름 거렸다.
화형기에 이른 9급 뱀 요수가 눈을 빛내며 육익상공들을 향해 탐욕을 드러낸 것이다. 요물은 지네들을 한 마리씩 사냥할 마음에 전신의 붉은빛이 짙어졌다.
그때 돌연 대량의 금빛들이 몰려나와 두 요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초록빛 속의 사내는 흠칫 놀라 소매를 털어 교룡처럼 생긴 녹색 기운을 뿜어내 금빛 무리를 감싸려했다.
그는 금빛으로 웽웽 거리는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독 기운 속에서 끈적하게 녹아내릴 것을 의심치 않았는데 뜻밖에도 녹색 기운을 뚫고 금색 영충들이 빠져나왔다.
그 순간 사내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가 빙그르르 돌자 그의 주위로 초록빛이 번지며 불기둥이 나타났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불 속에서 웽웽 거리는 소리가 일순 멎으며 무수히 많은 금빛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남은 영충들은 몇 마리 되지 않았는데 그 마저도 녹색 화염을 빠져나가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이에 사내가 안심하고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 중 한 마리를 보고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
“서, 서금충! 이것들은 서금충이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많이…….”
초록빛으로 가려진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내는 녹색 머리에 작은 두 눈을 지녔고 뺨까지 찢어진 커다란 입안에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놀라 소리치자마자 추락하던 금빛 딱정벌레들이 다시 날개를 펄럭이며 솟구쳐 녹색 화염을 포위했다. 그리고 서금충들이 갉아먹기 시작하자 눈에 보일 정도로 녹색 화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내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때 서금충들 옆에 붉은 빛이 번뜩이더니 뱀 요수 여인이 나타났고 입에서 푸른빛에 휩싸인 목재 사발을 분출했다.
목재 사발은 금세 거대해져 푸른 보호막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서금충들을 감쌌다. 금빛 딱정벌레들이 필사적으로 보호막을 벗어나려 했으나 단시간 내로는 어쩌지 못하는 듯 했다.
“뭘 그리 무서워합니까! 저것들이 상고시대의 서금충 성충도 아닌데요. 완전히 자라지 못한 서금충들은 어찌 되었든 멸살할 방법이 있습니다.”
붉은빛의 여인이 냉랭히 다그쳤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을 휘둘렀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고 손톱만한 붉은 빛이 날아가 보호막 속의 서금충 한 마리를 갈랐다.
단단한 서금충의 몸이 소리 없이 둘로 갈라지며 떨어져 내리자 붉은 빛의 정체도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새빨간 비늘 조각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사내가 한 시름 놓자 여인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수결을 맺었다.
푸푸푸푸푹!
그녀 앞에 백 개가 넘은 비늘들이 떠올랐다.
불뱀과 교전 중인 육익상공들을 잠시 놔두고 서금충들을 일망타진할 작정인 듯 했다.
그 순간 푸른 기운에 덮인 빙하 협곡 아래에서 서늘한 웃음소리와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뱀 요수 근처에서 은빛이 번뜩였다.
그 순간 뱀 요수도 수결을 맺으며 허공에 뜬 비늘들의 공격 방향을 틀어 은빛 속에 나타난 인영을 향해 날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