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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21화 (378/2,000)

# 621

621화. 한려 상인(上人)

거대 솥은 허천정과 비슷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신통도 남달라 보였다. 건람빙염이 솥에 구속되어 전혀 달아나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 위력을 능히 알 수 있었다.

이에 그의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아직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는데도 수사께서 제가 오랜 세월 찾던 분이라는 직감이 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 지요?”

“걱정 하실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저 수사께서 빙령과를 연달아 두 알이나 삼키셨다는 이야기에 모시게 된 것이니까요. 조금 전 극한의 화염을 지닌 것을 확인하였으니 되었습니다. 수사께서는 제가 줄곧 찾던 분이십니다.”

“어떤 수사를 찾고 계셨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한려 상인은 미소가 짙어졌지만 한립은 이유를 몰랐으니 미간을 좁힐 따름이었다.

“그 전에 한 형이 지닌 보라색 화염을 무어라 부르는지 묻고 싶습니다. 한기를 품고 보라색을 띠는 화염은 들어 본 적이 없어서요. 제 견문을 넓혀 주신다 여기시고 알려주실 수 있을 지요?”

“제가 대충 제련해 낸 것이라 정식 명칭은 없습니다. 그저 구분하게 편하게 자라극화라 칭하고는 있지만 위력이야 건람빙염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한립이 자신의 몸을 흐르는 보라색 화염을 보며 설명했다. 상대의 의도도 모르는데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려 상인은 간단한 설명에도 흡족한지 싱글벙글이었다.

“말씀대로 자라극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한기가 복잡하게 섞여 있군요. 게다가 관련 속성의 공법으로 정련을 거치지도 않았고요. 정련만 거쳤다면 위력이 더욱 세졌을 텐데 말입니다.”

“위력이 세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미 연화를 시킨 화염을 또 정련을 거쳐야 한다고요.”

한립은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한 형께서 극한의 화염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하긴 이런 화염은 세상 천지에 몇 개 되지 않으니까요! 일단 화염 자체를 연화시켜 부릴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수한 비술을 이용해 정련을 하면 위력을 한 층 높일 수 있습니다. 물론 위력이 얼마나 높아질지는 정련 정도와 화염 자체의 위력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다른 것은 몰라도 건람빙염의 경우 정련을 거치면 그 위력이 몇 배는 높아질 수 있습니다.”

난쟁이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거대한 솥을 바라보았다.

“위력이 몇 배나 세질 수 있다니……. 이것도 정제를 거친 것인데 비슷한 것인지요?”

한립이 관심을 보이며 검지를 들어 보라색 화염 한 줄기를 불러냈다.

“그것도 정제를 거친 것으로는 보이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법력을 이용해 강제로 압축하는 방식을 쓰셨나보군요. 그렇게 무모하게 정제를 하면 법력 소모도 엄청나고 정련해 나온 결과물도 무척 소량일 것입니다.”

한려 상인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지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저를 찾은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요.”

“그 전에 한 가지 더 묻을 것이 있습니다. 한 눈에 건람빙염을 알아보는 수사가 많지는 않은데 어디서 본 적이 있으십니까?”

한려 상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립의 안색을 살폈다.

“그저 경전에서 언뜻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자라극화를 다루는지라 눈여겨 보아두었지요.”

북야소극궁과 허천전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가 허천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되었다.

한립이 딱 잡아떼자 한려 상인도 그저 미소 지었다.

“제가 괜한 생각을 했나 봅니다. 건람빙염은 저희 소극궁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서요. 그럼 이제 본론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간단히 말해 노부가 극한의 화염을 지닌 한 형의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한려 상인은 진중한 얼굴로 답했다.

한립은 그가 재촉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슨 도움을 원하는 지 알았기에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역시 한려 상인이 잠시 말을 끊고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형이 보시기에 제 수행이 어떠합니까?  다른 원영 후기 수사들과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요?  수사는 원영 후기 수사이지만 이전에 제가 보았던 어떤 대수사 보다 의식이 강력하고 수행이 높으십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원영 후기 수사와는 확실히 다르시지요.”

상대가 먼저 물었으니 한립도 주저 하지 않고 의식으로 한려 상인을 훑어보고 답해주었다.

“예, 노부는 이미 원영 후기의 최고봉에 이르렀습니다. 화신기까지 겨우 한 걸음을 앞두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이런 상태로 머문 것이 벌써 300년째입니다. 그간 갖은 영약을 복용하고 다양한 비술을 시도해 보았지만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지요. 그저 화신기 문 앞을 배회할 뿐입니다. 이런 꼴이 된 것도 영단묘약을 함부로 집어 삼킨 탓이고요.”

한려 상인이 적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셨군요. 이미 화신기의 신통도 어느 정도 깨달음이 있으시겠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함부로 외부인을 만나기 어려워 그저 수련의 고비를 넘기고 화신기에 이르기 위해 수련에만 매진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 벽을 넘을 수가 없더군요. 그나마 오랜 시간의 연구가 헛일은 아니었는지 몇몇 상고 경전에서 고비를 넘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었습니다. 이 방법에 따르면 최소한 3성의 확률로 고비를 뚫고 화신기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극한의 화염을 이용한 방법입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귀 궁에 관련 공법을 익힌 수사들이 있을 텐데 어째서 저를 찾으신 겁니까.”

“그 이유는, 반드시 각기 다른 극한의 화염을 지닌 원영기 수사 다섯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극한의 자극이 있어야 제게 화신기에 이를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지요.

소극궁 안에서 두 명의 수사를 찾았고 친분이 있는 종문과 산수들 중에서 두 분에게 청을 넣어 놓았습니다. 마지막 한 분을 찾아 수십 년을 허비했는데 드디어 한 형이 나타나 주신 겁니다.”

“각기 다른 극한의 화염을 지닌 원영기 수사 다섯이라니, 확실히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 소극궁이니 가능했지 태일문이나 천마종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비슷한 속성의 공법을 익힌 수사가 필요하신 것 아닙니까?”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맞습니다. 이런 방법은 얼음 속성의 공법을 수련한 동급 수사가 필요하지요. 하지만 나머지 수사들은 극한의 화염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상인께서는 어떤 것을 대가로 제게 도움을 구할 생각이십니까?  비록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는 모르지만 분명 원기가 크게 상하는 일일 텐데요. 혹시 다른 위험은 없습니까?”

“노부는 한 형처럼 솔직한 사람을 높이 평가합니다.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시지요. 한 형이 도와만 주시겠다면 무엇이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수사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상세한 구결을 보고 위험한 것은 아닌지 확인을 해보고 결정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하셔도 위험 부담이 크다면 응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물론 구결 자체도 제가 받게 될 보수가 되겠지요.”

“문제없습니다. 물론 원기는 어느 정도 상하겠지만 절대 위험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장하지요.”

“그리고 이미 아시겠지만 제가 이곳에 온 것은 현빙화로 단약을 제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백 선자께 부탁드려놓았지만 사 수사께서도 나서주신다면 일이 더욱 쉽게 해결되겠지요.”

자신 있는 한려 상인의 대답에 한립이 웃으며 두 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그런 사소한 일이야, 바로 궁 전체의 인력을 동원해 필요하신 만큼의 현빙화를 찾아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수사께서 말씀하신 빙염을 정련하는 비술 역시 구결을 복제해 주십시오. 자라극화의 위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니까요.”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상고시대부터 이어져온 소극궁 같은 종문이라면 상고 경전의 양이 상당하겠지요. 장서를 보관해둔 곳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알겠습니다. 그 조건도 받아들이지요.”

조건을 제시하는 족족 바로 수락하던 한려 상인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호쾌하게 모든 조건에 응해주시니, 때가 되면 제가 도와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립이 흡족하게 말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한염을 정련하는 비술부터 우선 복사해 드리겠습니다.”

한려 상인은 저물대에서 하얀 옥간을 꺼내 복제하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다.

잠시 후 복제를 마친 한려 상인이 저물대에서 또 다른 옥간과 옥패를 함께 던져 주었다. 한립이 세 가지 물건을 허공에서 빨아들였다.

“그 옥간은 노부가 연구해낸 자극을 통해 경지를 높이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원영 후기는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있으니 염두에 두십시오. 옥패를 지니시면 저희 소극궁의 장경각(藏經閣)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본궁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상고경전들은 특수한 금제가 걸려 있어 함부로 복제를 할 수 없습니다. 필요한 내용이 있다면 스스로 외워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요. 또한 수사에게 주어진 시일은 열흘뿐이니 그 기간 동안 보고 싶은 만큼 보시면 됩니다. 그 후에 영패를 회수하는 데 이의가 없으시겠지요?”

한려 상인이 정색하며 한립을 응시했다. 그 말에 한립은 멈칫했으나 다시 영패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열흘이라고 하시니 따라야지요. 이미 물건도 받았으니 무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협상에 능하십니다.”

“피차일반 아니겠습니까.”

한려 상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이미 약조를 하였으니 되돌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장서각을 둘러 보러가겠습니다. 현빙화에 관한 소식이 있다면 장서각으로 기별해 주십시오.”

할 말을 마친 한립은 뜻밖에도 바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수사들에게 연락을 취해 모이려면 시일이 걸릴 것이니 그 동안 저희 궁에서 머물러 주셔야겠습니다. 수련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백 사매에게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한려 상인이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한립이 바로 포권을 하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입구로 되돌아 나갔다.

푸른 빛줄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한려 상인의 온화한 미소가 점점 사라져갔고 대청 모서리에 위치한 두 개의 기둥이 번뜩이더니 사내와 여인이 나타났다.

푸른 의복의 사내는 평범한 외모를 지닌 사십 대의 문사였고, 하얀 장삼의 여인은 이십 대로 수려한 외모가 백요이와 조금 닮아 있었지만 너무 하얀 얼굴이 조금 괴이했다.

“한려 사형, 저 자의 화염을 검증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러다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위력이 부족하면 어쩐단 말입니까.”

푸른 장삼의 문사가 나타나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비록 저 자의 빙염이 혼잡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 건람빙염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위력이 부족할 턱이 있겠더냐?  게다가 이제 와 더 기다릴 수도 없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기회는 지금 뿐이야.”

한려 상인은 탄식했다.

“사형의 수명을 더 늘릴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만요곡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있고 북명도 외곽에서 적잖은 제자들이 저계 요수의 종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제자들 무리에 고계 요물의 분혼이 끼어 있었던 일도 있지 않습니까! 사형이 말씀하신대로 바로 처리하지 않고 감시만 하고 있지만요.”

푸른 장삼의 중년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난번 요물들의 침입이 벌써 천 년전 일이다. 만요곡이 다시 움직인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런데 하필 지금 수련의 고비를 넘으려 하시니 걱정이 됩니다. 요물들을 격퇴한 후에는 안 되겠습니까?”

푸른 장삼 중년인이 주저하다 물었다.

“격퇴한 후에?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더냐! 만요곡 요수들의 범람에 포위가 되어 십여 년을 버틴 일도 있었다. 내 수명이 겨우 몇 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찌 기다릴 수 있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 마 수사와 이 수사가 본 궁으로 오는 중이고 한 수사까지 머물고 있는데 때가 되면 요물들의 공격을 막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더 나쁠 일은 없을 것이다.”

난쟁이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차분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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