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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20화 (377/2,000)
  • # 620

    620화. 금풍리(金風狸)

    “십여 년 전에 비해 수행이 크게 느셨습니다.”

    백요이를 살핀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한 형 앞에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신통으로 보면 저 같은 이는 두 명이 덤벼도 수사를 당해내지 못할 테니까요.”

    백요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음양굴과 곤오산에서 보여준 한립의 신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한립을 대함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백요이가 한립을 떠받들자 임벽은 의아한 눈빛으로 한립을 살폈다.

    “당시 제게 본 궁에 들리신다고 했을 때는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먼저 물어봐주시니 저도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 백 선자에게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한립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대답했다.

    “한 형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 하세요.”

    백요이는 뜸 들이지 않고 답했다.

    얼음덩이 속에 봉인되어 있던 것을 구해준 것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도 원영 후기에 비견할 만한 신통을 지닌 수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듣기로 북명도에서 현빙화(玄氷花)라는 영약이 자란다고 하더군요. 제가 제련하려는 영단에 꼭 필요한 재료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현빙화라면 확실히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운 재료지요. 게다가 이 주변에서도 오래된 것들은 거의 다 채집이 되었고요. 제가 문하의 제자들에게 먼 곳의 만년현빙을 찾아보라 이르겠습니다. 만년현빙이 있는 곳이라면 현빙화가 자라고 있을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요.”

    백요이가 한립의 부탁이 크게 어렵지 않다 여겼는지 흔쾌히 대답했다.

    “백 선자께서 도와주시겠다니 다행입니다. 제가 직접 찾아 다녀야 했다면 어려움이 따랐을 겁니다.”

    “별 일도 아닌 것을요! 하지만 하루 이틀 내로는 구하기 어려울 테니 저희 소극궁에서 며칠 머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한 형의 신통에 감탄하던 차인데 교류하며 배울 기회가 될 것 같군요.”

    “저도 귀 궁의 공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차가운 속성의 공법으로는 대진 제일이라는 명성을 지닌 곳이 아닙니까. 저는 관련 공법을 수련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공법은 통하는 바가 있으니 익혀두면 크게 도움이 될 거라 여기고 있습니다.”

    한립도 웃으며 답하자 서로 이런저런 질문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임벽 역시 원영 중기의 수행이라 가끔 대화에 끼어들었는데 나름 특유의 깨달음이 있어 배울 점이 있었다.

    이렇게 세 수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한립이 백요이가 방금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온 것을 고려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다고 말했다.

    백요이도 그를 말리지 않고 고상한 부인으로 하여금 그를 거처로 모시라 일렀다. 임벽은 그곳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 동문 간에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결단기 수사인 고상한 여인의 안내를 받아 한립은 절벽에 위치한 또 다른 건물로 향했다. 열댓 개의 누각들이 다 비슷비슷했는데 아마 손님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공간인 듯 보였다.

    부인은 백요이가 한립을 중시하는 것을 보았기에 더욱 예를 다했고 그가 물어 보는 말마다 정성을 다해 답해 그를 흡족하게 했다.

    그들이 누각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시녀 복장을 한 앳된 얼굴의 여자 아이가 급히 달려 나왔다. 체격이 작고 여려 보이는 어린 시녀였다.

    “안 사숙님을 뵙습니다.”

    시녀는 고상한 부인을 잘 아는 듯 서둘러 예를 취했다.

    “화 사질, 한 선배님은 사조님의 귀빈이니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네가 잘 모셔야 한다.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었다가는 사조님의 불호령이 있을 것이고 나도 함께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란 사실을 명심하거라!”

    부인은 엄한 얼굴로 분부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인이 잘 하겠다 다짐을 하고는 슬쩍 고개를 들어 한립을 살피려다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한 선배님, 화 사질이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아이를 불러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아니다. 이 아이면 되겠구나.”

    고상한 여인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누각으로 들어갔다. 두 여인이 그의 뒤를 따랐다.

    누각 내부도 나름 잘 꾸며져 있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2층에 따로 간단한 금제가 쳐져 있어 누군가에게 몰래 염탐당할 걱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한립은 고상한 여인에게 몇 마디하고는 돌려보냈다. 사실 설련산에서 출발해 한 번도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쉴 때도 되었다.

    그 후, 이틀 동한 한립은 2층에 앉아 휴식을 취했고 누각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서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자신을 이곳에 머물게 하는 것 같았지만 얼마나 많은 고계 수사들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을지 불 보듯 뻔했다.

    어느 종문이든 원영기급의 외부인이 갑자기 찾아와 머문다면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또 태양진화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현빙화를 찾아 현빙단을 제련해내기 전에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그 어떤 일보다 남궁완의 봉혼주를 푸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다만 전문으로 그를 담당하게 된 시녀는 처음에 몇 마디를 물은 것 외에는 시킬 일이 없었다.

    그가 거처에 앉아 꼼짝을 안 한지 3일 째 되는 날 아침, 돌연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며 무언가가 터져나갔다.

    이어 그가 어두운 얼굴로 눈을 떴다. 의식 한 줄기가 아무 거림낌 없이 누각의 금제를 뚫고 그를 살피다 술법에 튕겨나갔던 것이다.

    문제는 상대의 강대한 의식이 그에 못지않다는 점이었다. 원영 후기 수사의 의식일 가능성이 컸다. 어찌 할까 생각 중인데 귓가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한 수사겠군요. 노부는 한려 상인이라 하는데 만나볼 생각이 있으십니까?”

    ‘한려 상인!’

    한립은 내심 놀랐다. 한려 상인이라면 북야소극궁의 대장로였다.

    그는 신비한 인물로 대단한 실력자라는 것은 다들 알았지만 직접 싸우는 것을 보았다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대장로 직도 소리 소문 없이 하루아침에 맡게 되었다는 말도 나돌았다.

    자신을 왜 찾는지 의아하기는 했지만 원영 후기 수사라 해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만나보기로 결정하고 인근을 배회하는 의식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한려 수사께서 청하시는데 어찌 거절을 하겠습니까. 찾아뵙겠습니다.”

    “좋습니다. 제 영수를 보내드릴 테니 따라 오시면 됩니다. 노부는 그럼 수사가 와주시기만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한려 상인은 만족스러운 지 말투가 한층 사근사근해졌다. 곧 빛이 번뜩이며 의식이 사라졌다.

    한립은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누각을 내려갔다. 1층 의자에 앉아 옥간을 들고 있던 시녀가 깜짝 놀라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바로 문을 나섰다. 한립은 밖으로 나서자마자 찾고 있던 영수를 발견했다.

    커다란 살쾡이가 나무 아래 엎드려 노란 눈을 빛내고 있었던 것이다. 금빛이 찬란한 털은 마치 금으로 제련해 만든 것처럼 화려했다.

    작은 짐승을 살피던 한립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스쳤다.

    ‘금풍리(金風狸)!’

    금풍리는 반드시 수컷과 암컷이 쌍둥이로 태어나는데 은닉술이 더없이 신묘하다고 했다. 한립은 바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나무 근처를 살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금풍수가 그를 알아보았는지 낮게 울자, 놀랍게도 나무 근처에서 금빛이 반짝이며 또 다른 살쾡이나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금리수는 겨우 반 척 밖에 안 되어 이전 것보다 훨씬 몸집이 작았다.

    한립은 이에 깜짝 놀랐다. 그의 강대한 의식으로도 나무줄기에 숨어 있던 영수를 찾아내지 못하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두 마리 금풍리들이 한데 모여 서로 머리를 부비더니 어딘가로 뛰어갔다. 한립도 고민하지 않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두 영수를 바짝 쫓았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그 중 한 마리가 신형이 모호해 지더니 한립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놀란 한립이 서둘러 보호막을 치고는 영수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간담이 서늘해 지는 일이었다.

    즉시 전신의 영력을 두 눈에 주입하자 눈동자가 남색빛으로 일렁였다. 그가 주변을 빠짐없이 훑다가 길 안내를 하고 있는 금풍리 곁에서 희미하게 나머지 한 마리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자신의 신통으로 금풍리를 찾아내고 서야 한립은 한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숨으면 의식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영수가 주변을 떠돈다면 어떻게 안심하고 머물 수 있겠는가!

    두 금풍리는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아서 한립은 어렵지 않게 열댓 장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

    몇몇 내궁 수사들이 낯선 한립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가 그 앞에서 달려가는 금풍리를 보고는 깜짝 놀라 길을 터주었다. 다들 영수의 정체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영수들을 따라 이리저리 길을 돌아 몇몇 장원을 지나니 뜻밖에도 절벽에 뚫려 있는 돌문 앞에 도착했다.

    대여섯 장 높이의 돌문이 노란빛으로 희미하게 반짝였는데 그 위로 주술들이 줄줄 흘러 다니니 한 눈에 보기에도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는 곳이었다.

    한립이 둔술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한 쌍의 금풍리는 신형을 빛내며 돌문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쿠르릉!

    한립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돌문이 번뜩이며 열렸고 그 안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통로가 나타났다.

    찬 서리가 응결되어 만들어진 얼음 동굴 같았다.

    금풍리가 통로 입구에 서서 눈을 굴리며 한립을 쳐다보는 것이 지능이 상당해 보였다. 원래 몸을 숨기고 있던 한 마리도 지금은 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한 수사, 들어오시지요. 노부가 멀리 나가 마중할 수 없는 것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말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금풍리 두 마리가 다시 통로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한립이 차분히 그것들을 따라가니 들어가면 갈수록 냉기가 짙어졌고 점점 지하로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일다경이 지나고 숨을 내뱉으면 입김이 어리는 정도에 이르자 겨우 통로의 끝에 이를 수 있었고, 금풍리들은 곧장 하얀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청은 옥석처럼 투명하게 빛이 났는데 표면에서 풍기는 한기로 보아 놀랍게도 만년현빙을 조각해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한립은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몸이 떨릴 것 같았지만 바로 보라색 화염이 몸을 흐르자 괜찮아졌다.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정말 극한(劇寒)의 화염을 지니고 있었어요!”

    누군가 기뻐하는 하는 소리에 한립이 시선을 돌리다가 놀라 중얼거렸다.

    “건람빙염?”

    대청의 네 모서리마다 두꺼운 수정 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중간에 직경이 다섯 장은 될 법한 거대한 남색 솥이 있었다.

    솥에서 피어나는 남색 화염은 기이한 한기와 영기의 압력을 내뿜었는데 한립으로서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건람빙염이었다.

    “흠?  한 수사께서 건람빙염을 알아보시다니 놀랍습니다.”

    솥 뒤에서 키가 삼 척 밖에 되지 않는 난쟁이가 나타났다. 얼굴 가득한 주름과 새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수사께서 한려 상인이신지요?”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은 한립이 포권을 하며 예를 취했다.

    “그렇습니다. 노부가 바로 한려이지요. 하지만 한려 상인이라는 칭호는 대대로 소극궁 대장로를 부르는 존칭에 불과합니다. 노부의 본명이 사상이라는 것을 아는 수사는 극히 드물지요.”

    난쟁이는 한립을 향해 눈을 빛내더니 차분히 손을 뻗어 기둥 중 하나에 법결을 던졌다. 그러자 하얀 빛이 번지며 대청 허공에 하얀 방석이 나타났다.

    “찾는 분이 많지 않아 탁자나 의자를 준비해 놓지 못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수도를 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것에 구애 받을 것 없지요.”

    노인의 온화한 어투에 한립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차분히 방석 중 하나로 가 자리를 잡은 뒤에 다시 거대한 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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