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619화 (376/2,000)

# 619

619화. 빙령과(氷靈菓)

수사들이 임 수사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바로 인사를 올렸다. 임벽은 대충 고갯짓을 하고 성큼성큼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들도 낯선 얼굴의 한립을 보았지만 사숙조가 모셔온 손님을 향해 의문을 품을 리 없었다. 그런데 한립이 막 성문을 지나려는데 눈원숭이들이 이상했다.

갑자기 끙끙거리며 혼비백산하듯 뒤로 물러난 것이다. 주위의 수사들이 놀라 훈육을 하려했지만 명령이 통하지 않고 다들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한립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를 굉장히 두려워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임 수사마저 신기한지 힐끗 한립을 쳐다보았다.

“수사께서는 혹시 원숭이 류의 영수를 지니고 계십니까?  눈원숭이들이 다른 신통은 별로 없는데 동류의 영수에는 예민합니다. 저들이 벌벌 떠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영수를 지니셨나 봅니다.”

“원숭이 류의 영수를 한 마리 데리고는 있습니다만, 제 영수도 별 다른 신통은 없습니다.”

임벽의 설명에 한립은 바로 영수대 속의 제혼을 떠올렸다. 대충 대답은 했지만 이 자리에서 제혼을 꺼내 보일 마음은 없었다.

임벽도 그저 웃고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이렇게 둘은 얼음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음성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곧고 넓었으며 역시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성 내부에는 지나는 수사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노란색과 흰색 의복을 입은 저계 수사들이었다. 길 양 옆으로 건물이 늘어서 있었는데 시장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고 오히려 작은 규모의 요새처럼 보였다.

한립이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곁에 선 임 수사가 다시 빛줄기로 변해 저공비행을 하며 거대한 산으로 날아갔다. 한립도 그를 따라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둘은 산허리의 얼음으로 만들어진 공터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걸어서 산을 올라가야 합니다. 이 위쪽으로는 내궁 범위에 속해 내궁장로인 저도 규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지요.”

임 수사가 미소를 머금고 설명하자 한립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둘은 반짝이는 얼음 계단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내궁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제자들은 많지 않은지 올라가는 길에는 제자들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몇몇이 임 수사를 보고 공손히 예를 취했는데, 성문 밖에서와는 달리 수행이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소극궁 장로가 미소로 응답해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립이 자세히 살피니 내궁 수사들은 수행이 높든 낮든 전부 자질이 뛰어났다. 그리고 길을 가는 동안 서너 곳에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었는데 소극궁에 최소한 종사(宗師) 급의 진법대사가 머무는 것 같았다.

이에 한립은 소극궁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고 시간이 나면 진법대사를 찾아 진법의 깨달음에 대해 교류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임 수사가 그를 데리고 이리저리 오솔길을 꺾어 들어가더니 그 끝에 수백 장에 이르는 얼음 장벽이 나타났다.

한립이 빙벽을 보며 의아한 듯 눈썹을 끌어 올렸다.

그때 임 수사가 은빛이 반짝이는 옥패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은색 기운이 흘러나오며 빙벽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후 빙벽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중간부분이 갈라져 폭이 두 장은 되는 통로가 나타났다.

임 수사가 들어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설명을 해주었다.

“산 정상에 보이는 건축물들이 소극궁이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사실은 저계 수사들의 거처에 불과합니다. 고계 수사들이나 내궁 제자들은 빙벽 안의 한려비경(寒驪秘境) 속에 거주하지요! 이곳이 바로 진정한 북야소극궁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 형께서 백 사매의 친우분이시니 이곳에 모시는 것이지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호감을 사려하는 임 수사의 어투에 한립은 그저 미소 지었다.

사실 한려비경이라는 곳은 북부 지역의 고계 수사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어 비밀이 아닌지 오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요이가 자신을 이곳에 불렀을 리 없었다.

오히려 오늘 처음 보는 사이에 일부러 친근한 척 다가오는 임 수사가 이상하게 느껴져 한립은 내심 경계할 뿐이었다.

통로는 그다지 길지 않아 백여 장 정도였다. 한립이 통로를 빠져나와 주위를 살피고는 매우 놀랐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는 아름다운 화초들과 진한 녹음이 가득 찼고 따사로운 볕이 드는 봄 날씨였던 것이다.

골짜기를 둘러싼 절벽을 따라 누각과 건축물들이 아름답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산골짜기 정중앙에 세 개의 거대한 전각이 있었는데 이곳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립은 세 전각을 보며 안색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허천전(虛天殿)!’

한립은 경악했다.

백옥 궁전 세 개는 크기가 다른 것을 제외하면 난성해에서 보았던 허천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옥으로 세공된 건물에서는 보물에서나 뿜어져 나올 법한 영기의 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허공에 떠다니던 진짜 허천전과 달리 세 궁전은 그 3분의 1 크기에 불과했다.

놀란 마음을 숨기며 한립은 차분히 살폈지만 아무리 보아도 허천전과 똑같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임 수사를 향해 물었다.

“이곳이 소극궁의 내궁이군요. 역시 영기가 남다릅니다. 그런데 저 세 궁전은 양식이 독특한데 어떤 곳입니까?”

“허령전(虛靈殿)이라면 본 궁이 창립될 때부터 존재하던 궁전이지요. 듣기로는 조사(祖師)께서 막대한 법력을 이용해 만들어 내셨다고 합니다.”

“허령전…….”

“한 형께서 저곳에 관심이 가시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모실 수는 없겠군요. 허령전은 평상시에는 폐쇄되어 있고 장로의 과반수가 동의해야 개방할 수 있거든요!”

한립이 흥미를 보이자 임벽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싱긋 웃었다. 상대의 말을 알아들은 한립도 미소를 보이며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다른 종문의 비밀에 대해 추궁하는 것은 수도계의 금기였다. 게다가 세 궁전이 허천전과 어떤 관계가 있든 그는 이미 허천전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허천정을 얻었으니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백응각은 저쪽입니다. 백 사매가 한 수사를 꽤나 중히 여기는 것 같군요. 저 곳은 사매의 절친한 친우들이 방문했을 때에나 모시는 곳이거든요. 건물 자체가 고즈넉하니 이야기 나누시기에 좋을 겁니다.”

임 수사는 백요이에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

“그렇습니까?  과분한 대우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답하자, 임 수사가 그를 데리고 절벽 어딘가로 향하자 누각 하나가 나왔다. 3층으로 이뤄진 누각은 열댓 장은 되었고 비취색 목재로 만들어져 절반은 절벽에 박혀 있었다.

한립이 노란 편액에 적힌 ‘백응각’이라는 글자를 보고 있는데 하얀 장삼을 걸친 부인이 걸어 나왔다.

부인은 한립이 임 수사와 같이 온 것을 보고 조금 당황하더니 공손히 물었다.

“임 사백님을 뵙습니다. 이 분이 한 선배님이시겠군요.”

“그렇네. 백 선자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스승님께서는 막 폐관 수관 수련을 마치시고 공법을 갈무리하시는 중이십니다. 대신 제자를 보내 한 선배님을 안으로 모시라 하셨는데 나무라시지는 않으시겠지요.”

부인이 옆으로 서서 길을 터주었지만 임 수사에게는 들어가자는 소리가 없었다.

“나도 네 스승을 봐야겠다. 할 이야기가 있어.”

“임 사백님…….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스승님께서 다시는 사백님을 뵙지 않겠다고 하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번에 공 사매가 사백님을 안으로 모셨다가 얼마나 호되게 혼났는지 아십니까?”

부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다르다. 내 한 형을 모시고 왔는데 설마 네 스승이 한 형까지 문전박대 하겠느냐?”

임 수사는 언뜻 얼굴이 붉어져서는 한립이라는 패를 꺼내 들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립은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안아, 임벽 사백님을 모시고 들어 오거라.”

그때 갑자기 여인의 목소리가 누각 안에서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백요이의 목소리였다.

“존명! 임 사백님, 안으로 드시지요.”

부인이 그제야 마음 편히 뒤로 물러났다. 임 수사는 백요이의 목소리를 듣더니 신이 나서는 무어라 전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누각 밖에서부터 백요이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려는 것 같았다.

“임벽 사형,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안으로 들어와 천천히 나누시지요. 한 수사님을 이리 밖에 세워두신다면 저희 소극궁이 예를 모른다고 나무라실 겁니다.”

그의 전음에 뜻밖에도 백요이는 다 들리게 대답하였다. 한립이 그 말에 턱을 쓸며 그저 미소 지었다.

“제 불찰입니다. 한 형, 안으로 드시지요.”

“아닙니다. 임 형의 열정에 탄복하였을 뿐입니다.”

한립이 다 안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가 백요이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임 수사가 더없이 살갑게 굴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서였다.

보아하니 저 여인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안내를 받으며 백응각으로 들어섰다.

누각의 1층은 그리 넓지 않았다. 스무 장 정도의 네모난 대청에는 간단히 대나무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한립도 모르는 노란 꽃이 핀 화분이 모서리마다 놓여있어 진한 향기와 영기를 뿜어냈다.

백요이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두 수사가 대나무 의자에 앉자마자 미안한 기색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형!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수련하는 공법이 특수하여 시간이 좀 걸리니, 운공이 끝나는 대로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저희 소극궁의 빙령과(氷靈菓)를 드셔보십시오.”

짝!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상한 부인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누각 밖에서 백의 여인 둘이 새빨간 나무 쟁반에 진주처럼 반짝이는 둥근 과실들을 담아 내왔다.

“빙령과는 저희 소극궁의 특산물로 장로들도 매년 몇 송이밖에는 얻지 못하는 과일입니다. 과육이 달콤하고 차가운 성질을 품고 있어 얼음 속성 공법을 수련하는 수사가 먹으면 도움이 되지요.”

임벽은 한립을 향해 설명을 하고는 먼저 한 알을 떼어 입에 넣고 씹어 먹었다. 상대가 먼저 시식을 하였으니 한립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과실을 한 알 떼어 입에 넣었는데 씹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입안을 감돌았다. 확실히 순도 높은 얼음 속성 영력이 가득했다.

비록 얼음 속성 공법을 수련하지는 않았지만 자라극화와 태음진화를 품고 있는 그에게 이 정도 한기는 끄떡없었다.

그는 과실과 영력을 꿀떡 삼키고는 기분 좋게 한 알을 더 베어 입에 넣었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임벽의 표정이 순간 묘하게 변했다.

빙령과는 명성이 자자한 만큼 수사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했다. 하지만 얼음 속성이나 불 속성의 공법을 수련하는 수사가 아니라면 한기를 처리하고 몸에 흡수시키는데 시간이 필요한 게 보통이었다.

그냥 마구 삼켰다가는 오히려 내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순한 나무 속성 영력이 느껴지는 한립이 연달아 두 알을 삼키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불 속성 공법을 수련해 한기에 강한 그조차 이렇게 빨리 빙령과 두 알을 삼킬 수는 없었다.

소극궁 장로가 내심 놀라고 있는데 누각 위에서 걸음소리가 들려오며 백의 여인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한립이 몸을 일으키며 활짝 웃었다.

“백 선자, 그간 별고 없으십니까?”

“백 사매! 드디어 나를 보러 와주었어!”

임벽이 동시에 희색이 만연해 벌떡 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 형께서 허튼 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시기에 몇 년 전부터 찾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십여 년이 지나서야 찾아오시다니 의외였지만요. ……임 사형께서는 한 형과 함께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만나 뵙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립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임벽을 보는 순간 정색을 하였다.

“내 이번에는 해결 방법을 찾았기에 온 것이야. 사매도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해결 방법을 찾으셨다고요?  그렇다고 해도 나중에 이야기 해주시지요. 한 수사께서 먼 곳에서 찾아 주셨으니 먼저 이야기를 나눠야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내 나중에 사매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주겠네. 이제 나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니까!”

임벽은 멈칫 했지만 바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백요이는 아무런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고 한립과 임벽도 따라 앉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