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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18화 (375/2,000)
  • # 618

    618화. 빙성(氷城)

    “모두 너의 일행들이더냐?”

    한립은 원반을 살피다가 회수하고는 중년인 뒤의 수사들을 훑으며 물었다. 곡천계로서는 의외의 질문이었다.

    “안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모두 소극궁에 입문하기를 원하는 지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흠칫 놀란 곡천계는 조금 불안해졌다.

    “큰 문제는 아니고, 네 일행 중에 한 명이 마땅치 않구나.”

    한립이 어린 여인을 쳐다보며 냉소했다.

    “예?”

    “요물이 섞여 들어 있으니 어찌 문제가 없을까.”

    “요물이요?”

    그 말에 곡천계의 안색이 달라졌고 다른 수사들도 화들짝 놀라 무의식중에 그녀와 몇 걸음 떨어졌다.

    “서, 선배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저는 상군 영 씨 가문의 제자인데 어찌 요물일 수 있겠습니까?”

    어린 여인은 많이 놀랐는지 말을 더듬으며 해명했다.

    “맞습니다. 선배님께서 무엇을 잘못 아신 것 아니십니까?  영 수사는 분명 영 가 출신으로 저와는 이전에도 여러 번 본적이 있는 사이입니다.”

    단약을 먹어대던 청년이 안색이 파리해진 여인을 보며 대신 해명했다. 다른 이들도 의심스러운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의 말을 못들은 척 그저 혀를 찼다.

    “겨우 분혼 주제에 내 앞에서 속임수를 쓰려는 것이더냐! 당장 나오거라!”

    그가 허공을 쥐자 어린 여인이 머리 위에서 푸른 거대 손이 나타나 그녀를 낚아채려했다.

    억울한 얼굴을 하던 여인은 거대 손을 보자 놀란 기색이 사라지고 표독스런 표정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빛줄기로 변해 순식간에 스무 장 밖으로 달아났다.

    한립이 냉소하더니 소매를 털어냈고 노란 빛이 날아가 사라지더니 여인의 머리 위에서 한 척 길이의 항마장으로 변했다. 그가 법결로 북돋자 보물이 흐릿해지며 순식간에 커져 거대한 환영을 만들어 여인을 내리쳤다.

    어린 여인이 기겁하더니 피할 겨를도 없이 입에서 검은 요기를 뿜어 잠시나마 막아내려 했다.

    쾅!

    하지만 노란빛이 번뜩이며 검은 기운이 흩어졌고 항마장의 환영은 지체 없이 여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어린 여인이 참혹한 비명을 내지르며 없어졌고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그 뒤로 빠져나와 땅 속으로 들어가려했다.

    그때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며 금빛 그물이 나타나 검은 그림자를 뒤덮었다. 폭음이 연달아 터지고 검은 요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멸살 당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중년인을 포함한 산수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립이 손짓하자 항마장이 부르르 몸을 떨며 원래대로 돌아와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일을 마친 그가 돌연 손바닥을 뒤집어 남색 병을 꺼내더니 곡천계를 향해 던져 주었다. 중년인이 놀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이 너희가 이곳을 순조롭게 통과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네 정원반과 교환하는 것으로 하자꾸나.”

    말을 마친 한립이 즉시 전신에서 푸른빛을 뿜어내며 순식간에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중년인은 그제야 작을 병을 꼭 쥐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항마장에 맞아 쓰러졌던 어린 여인이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한립은 원반이 알려주는 대로 바로 소극궁으로 향했다. 그는 속으로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어린 여인의 몸속에 고계 요수의 분혼이 잠복해 있었는데 기껏 해봐야 8급 요수의 의식이었다. 영리하게도 비술을 사용해 여인의 몸에 숨어 들었기에 그녀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이대로 시험을 통과했다면 소극궁 수사들도 모르는 틈에 여인의 육체 속 요수의 분혼을 소극궁에 들였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해결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기왕 자신을 마주쳤으니 한립은 요수의 분혼을 죽여 괜한 사단이 나는 것을 막았다.

    최소한 그가 북명도에 있는 기간만이라도 말썽이 없다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저렇게 공을 들여 소극궁에 들어가려하다니, 설마 한수(寒髓) 때문일까? ’

    이리저리 물어 보았지만 북야소극궁에서 한수가 사라졌다는 소문은 돌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극궁 내부에서 이 일을 덮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주먹만 한 우박이 쏟아져 내리는 지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박들은 눈보라에 섞여 아름답게 반짝였지만 보호막에 부딪치면 퍽! 퍽! 소리가 나서 돌덩이를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립의 수행에 겨우 이런 대형 우박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반 시진을 날아간 그는 눈앞이 밝아지며 우박과 눈보라가 전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눈앞이 밝아지자 드디어 산을 기대 만들어진 얼음성이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빛을 받아 반짝이는 데다 하얀 기운이 둘러싸고 있어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한립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얼음성이 아니라 그 뒤의 거대한 산 때문이었다. 그가 놀란 이유는 산이 거대한 기둥처럼 곧게 서 있고 전신이 얼음으로 덮여 수정처럼 반짝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드문드문 녹음이 어리지 않았다면 정말 산이 아니라 그냥 얼음 기둥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비록 명청령안을 지녔지만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그도 정확한 모습을 살피기 어려웠다. 그러나 희미하게 얼음산 정상에 보이는 건물들이 북야소극궁일 것이다.

    한립은 얼음성이 있는 곳으로 곧장 날아갔다.

    얼음성까지 가는 길은 평범한 빙하처럼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각종 금제가 펼쳐져 있었다. 진법에 능통한 한립이 느끼기에도 대단한 경지였으니 누군가 함부로 이곳을 침입한다면 큰 코를 다칠 것이 분명했다.

    돌연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정원반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정원반은 길을 안내하는 효과뿐 아니라 소극궁 수사들이 수사들의 위치를 파악하게 해주는 기능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빛줄기 몇 개가 다가왔다.

    하얀 의복을 입은 사내 하나와 여인 둘이었는데 사내는 결단기 수사였고 여인들은 축기기 수준이었다.

    준수한 외모의 사내는 의식으로 한립을 훑고는 바로 몸을 굽혀 예를 취했다.

    “저는 외궁집사인 석운이라 합니다.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될 지요. 저희 궁을 찾아 주신 용무가 있으십니까?”

    그는 멀리서 눈보라를 뚫고 날아오는 한립을 보고 이미 고계 수사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낯선 용모의 원영 중기 수사라는 것을 알고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귀 궁을 방문한 것은 맞네. 귀 궁의 장로 한 분과 친분이 있어서 말이지.”

    긴장한 석운과 달리 한립이 유유자적 했다.

    “본 궁 장로님과 친분이 있으시군요! 찾으시는 장로님을 알려주시면 제가 바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백요이 선자께서는 궁에 계시는가?”

    “백 사숙님을 찾아오셨습니까?  사숙께서는 현재 폐관 수련중이십니다. 일단 전음부를 보내 아뢸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석운은 한립이 정말 백요이를 찾자 더욱 안심하곤 바로 전음부를 꺼내들었다. 그 동안 한립은 유유히 떠서는 먼 전경을 살폈다.

    청년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입을 떼려는데 멀리서 눈부신 붉은 빛줄기가 눈보라를 뚫고 날아왔다.

    빛줄기가 당도하고 한립 앞의 소극궁 제자들이 바로 몸을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빛이 가시기도 전에 그 안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본 궁을 방문하신 수사십니까?  제가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뜻밖에도 희고 깨끗한 피부를 지닌 청년이 한립 앞에 나타났다. 젊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회백발의 머리와 눈빛에서는 세월의 풍파를 겪은 노인의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살폈는데 그 역시 원영 중기의 수사였다. 의외라 여긴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석운이 먼저 희색이 만연해 공손히 인사했다.

    “제자 임벽 사숙님을 뵙습니다.”

    “저는 한 가이고, 백 선자와 약속이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석운이 눈앞의 사내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을 보고 한립이 차분히 답했다.

    “아, 한 형이시군요. 백 선자라면 혹시 백요이 사매를 이르는 것인지요?”

    “맞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저도 백 사매를 만나러 돌아오는 길이니 제가 안내하지요!”

    한립의 말에 임 수사가 눈을 반짝이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한립으로서는 의아한 일이었다.

    그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 전에 멀리서 붉은 빛이 반짝이며 석운에게 날아들었다.

    “백 사숙님의 전음부입니다.”

    석운은 붉은 빛을 재빨리 잡아채고 의식을 주입해 즉시 한립에게 내용을 알려주었다.

    “한 선배님! 백 사숙님께서는 선배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기뻐하시며, 곧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오신다 합니다. 백응각(白凝閣)으로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백응각?  알겠다. 석운 너는 가서 네 일을 보거라. 한 수사께서는 저와 같이 가시죠!”

    슬쩍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딱히 거절할 일도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임 형께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저와 백 사매는 친남매 못지않은 사이입니다. 백 사매의 친우분이시면 제게도 같지요. 자, 가시죠!”

    임 수사는 예의바르게 대답을 하고는 먼저 붉은 빛줄기로 변해 나아갔다. 한립이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저희 소극궁에는 처음 방문해 주신 것 같습니다.”

    “예, 북명도에는 처음 와보았습니다. 북부 제일의 종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기운이 남다른 곳입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임 수사가 뿌듯한 기색을 드러냈다.

    “과찬이십니다. 저희 궁이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한 것만 제외하면 정마 십종과 비교해도 나무랄 곳이 없기는 하지요. 흠, 백 사매는 십여 년 전에 궁을 나서고 줄곧 폐관에 들어가 있었는데 한 형께서는 그때 사매를 만나 알게 되셨겠군요. 혹시 어느 종문 출신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본 궁이 북부에 치우쳐 있지만 저는 자주 대진 전역을 돌아다녀 웬만한 종문들은 알고 있습니다.”

    빙빙 돌려 물었지만 낯선 용모를 지닌 한립의 내력이 궁금한 것이었다. 한립이 가볍게 웃음 지었다.

    “저는 대진 출신이 아니라 수사께서 저를 모르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자세한 내력은 백 선자께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어쩐지 한 형과 같은 수행을 지닌 분이 어찌 알려지지 않았나 하였습니다.”

    임벽은 한립이 조금 불쾌해하자 헛웃음을 지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 어쨌든 상대가 대진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둘은 얼음성 입구에 이르러 둔술을 거두고 내려섰다.

    얼음성은 빛과 안개로 가려져 강력한 금제로 보호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한립도 입구에 이르러서야 얼음성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서른 장에 이르는 성벽은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빛으로 반짝였고 벽돌을 쌓듯 얼음 조각들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거대한 빙하를 조각해 만든 것처럼 보였기에 감탄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성문 앞에는 하얀 의복을 입은 열댓 명의 수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축기기 수사에 불과했지만 같이 번을 서고 있는 원숭이와 닮은 하얀 영수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하얀 털을 길게 늘어뜨린 요수들이 성문 앞에 주저앉아 녹색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원숭이 과의 영수는 추운 지방에서 서식하는 눈원숭이로 등급은 높지 않았지만 지능이 높고 길들이기 쉬워 북부 지방 수사들이 많이 키웠다.

    그런데 문 앞의 눈원숭이들은 보통의 눈원숭이들보다 훨씬 몸집이 컸고 요기로 보아 4, 5급은 되어 보였다. 보아하니 북야소극궁이 눈원숭이를 진화시키는 특별한 비법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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