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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15화 (372/2,000)

# 615

615화. 화단(化丹)

한립은 반나절을 곰곰이 생각해 북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열댓 개의 지방들을 지나 그는 상군(霜郡)이라는 고을에 도착했다.

비록 대진 북부에서 가장 큰 주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규모가 상당한 곳이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새하얀 땅을 지나며 한립은 열흘 중 이레 이상을 함박눈을 보았다.

영산이나 영맥의 수나 질도 떨어지는 곳이라 대진의 큰 세력이 거의 없었으나 작은 세가와 산수들은 꽤나 모이는 곳이었다. 상군의 환경은 열악했으나 면적이 대진의 36개 군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고 꽤 유명한 혹한의 성질을 지닌 영초와 재료들의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의 수사들은 대부분 얼음 속성 혹은 혹한의 속성을 지닌 공법을 수련했고 음한(陰寒)의 공법을 수련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수련 속도를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속성의 수사와 이곳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훨씬 유리했다. 천남은 물론이고 난성해까지 대부분 사계절이 봄처럼 따스했기에 이런 빙설지대는 아주 드물었다.

한립도 처음에는 흥미롭게 살폈으나 며칠이 지나자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가는 도중 다른 수사들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한립이 미리 발견하고 멀리 돌아가 아무에게도 발각당하지 않았다.

상군에 들어선 지 다섯째 날, 한립은 드디어 눈에 띠지 않는 산맥 위에서 멈췄다. 그다지 큰 산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쓸 만한 영맥이 흐르고 있었다.

한립은 허공에 떠서 영기의 밀도를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한립이 냉소하며 산맥에 강대한 기운을 내뿜었다.

거대한 영기의 압력에 산 전역의 초목이 몸을 떨었고 작은 짐승들은 그대로 고꾸라져 정신을 잃었다. 그러니 그곳에 머물던 산수들은 난리법석을 떨 수밖에 없었다.

수행이 낮은 자들은 몸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릎이 꺾였고 수행이 높은 이들은 금제에 걸린 것처럼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산에서 세 개의 빛줄기가 튀어 올라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립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푸른빛을 뿜자 얼굴이 모호해지더니 곧 염소수염을 기른 흉악한 인상의 노인으로 변했다.

빛줄기에서 빛이 가시고 검은 장포를 입은 노인 둘과 회색 장포의 거한이 한립 앞에 나타났다. 가장 어려보이는 거한이 앞서고 노인 둘은 그 뒤를 따라온 모양새였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지만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거한은 결단 중기의 수사였고 나머지는 축기 후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셋은 비슷한 공법을 익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종문의 출신인 듯 했다.

한립이 입을 열기도 전에 회색 장포 거한이 의식으로 그를 훑어보고 표정이 급변했다. 노한 기색이 연기처럼 사라지며 즉시 만면에 미소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저는 설련봉(雪連峰)에서 이 씨 가문의 가주를 맞고 있는 이충첨이라 하옵니다. 선배님께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거한은 극히 공손하게 말했지만 한립의 변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노부가 네가 어디 출신인지 묻더냐?  내가 이 산이 마음에 드니 반나절을 줄 테니 당장 떠나거라. 이 후로 이 산은 내 구역이다.”

한립은 탁한 목소리로 사납게 일갈했다.

거한은 그 말에 속이 답답해 졌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선배님, 저희 가문이 설련봉에 기거하는 것은 융 선배님의 허락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선배님의 말씀에 따르겠지만 그 전에 알려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융 선배?  지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그게 누구든 불만이 있다면 직접 나를 찾아오라 이르거라. 그러나 반나절 후에 이 산에 누군가 남아 있다면 내가 어찌 나오든 원망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야!”

한립이 눈을 부릅뜨더니 소매를 털어 푸른 바람을 일으켰다. 거한은 안색이 달라져 보호막을 치고 변명하려는데 강력한 영기의 압력에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야 했다.

법기를 밟고 겨우 떠오른 두 노인은 보호막을 펼칠 틈도 없이 바람에 맞아 허공에 구르고 말았다. 두 노인은 술법을 펼치려 했으나 법력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마치 금제에 걸린 것 같았다.

이렇게 되자 두 노인은 정말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핏기 없는 얼굴로 주위를 살폈지만 한립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어르신, 방금 그 분은 언제…….”

“가문 수사들에게 알리거라. 당장 짐을 싸서 두 시진 내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

거한은 표정이 좋지 못했지만 심호흡을 하며 결정을 내렸다. 그도 한립이 언제 사라졌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  이렇게 설련봉을 떠난단 말입니까. 저희 가문은 설련칠우(雪連七友)를 쫓아내고 힘들게 이곳을 차지하였습니다. 게다가 아직 백 년이 채 되지 않았고요. 게다가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자를 융 선배님께서도 좌시하시지만은 않으실 겁니다.”

흑의 노인 하나가 흥분해 소리를 높였다. 다른 노인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렵게 차지한 가문의 보금자리를 잃는다는 것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너희가 정신이 나갔구나! 저 자의 수행은 그 깊이를 파악할 수 없고, 대놓고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은 필시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지. 저 자가 내뿜은 영기의 압력은 융 선배님께 느꼈던 것보다 더 강대했으니 아마 원영 중기 수사일지도 모른다. 저런 실력자가 나타났으니 융 선배님도 우리 가문과 인연이 있으시다 한들 아무 것도 모른 척 수수방관하실 가능성이 크다.

겨우 우리 같은 작은 가문을 위해 저 자와 맞서겠느냐?  게다가 정말 상대가 막무가내로 나왔다면 떠날 시간을 주었을 리 없다. 그냥 다짜고짜 우리 전부를 죽였겠지. 수도계는 양육강식의 세계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당시 우리가 이 산을 점거할 때도 똑같이 설련칠우를 강제로 몰아내지 않았더냐.

가문의 핵심 제자들만 보존할 할 수 있다면 다른 영산을 찾아 떠나면 그만이다. 어쨌든 원영기 수사에게 전부 몰살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회색 장포의 거한이 안색이 어두워져서 두 노인들을 호되게 혼냈다. 두 노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세 수사가 다시 아래쪽을 향해 날아가 산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산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수사들은 바삐 산 속을 날아다니며 작은 누각들을 오갔는데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시진 후, 수사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산을 떠나기 시작했다. 거의 2, 3백에 달했지만 대부분이 연기기 수사들이었고 비행을 할 수 있는 자들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이렇게 많은 수사들의 행보가 인근 세력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었고 다들 이상한 마음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물어왔다.

이 씨 가문 수사들은 그들에게 주저 없이 사실대로 일러 주었다.

설련산이 원영기 수사 차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수사들은 전부 크게 놀라 서둘러 자신의 세력으로 돌아가 대책을 상의하려 했다. 수행이 높은 수사가 갑자기 나타나 강제로 설련봉을 빼앗았으니 앞으로의 길흉화복을 점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주변의 몇 안 되는 세력들이 걱정스러워하고 있을 때 한립은 약속한 것보다 먼저 설련산 정상에 나타나 의식으로 남아 있는 수사들이 없는지 확인했다.

눈을 뜬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시간 끌 것 없이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진법 깃발 한 벌을 꺼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푸른 빛줄기가 산을 빠르게 돌아 순식간에 다시 바위 위로 돌아왔다.

도처에서 하얀 기운이 뭉실뭉실 자라나 산을 감싸 안았다. 진법으로 만들어낸 금제를 살피며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건 노마의 저물대에서 얻은 것이었는데 비교적 고계 진법에 속해 원영기 수사들에게는 쓸모가 없었지만 결단기 수사들조차 침입하면 빠져나가기 곤란한 수준이었다.

한립은 연이어 한 손으로 영수대를 던지며 수결을 맺어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영수대가 열리며 그 안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새하얀 몸을 반짝이는 날개 달린 지네 열댓 마리가 빠져나온 것이다.

육익상공들은 영수대에서 날아올라 한립의 머리 위를 선회하더니 낮게 울어대며 기뻐 날뛰었다. 한립이 그 모습을 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빙설 기후가 영충들의 마음에 쏙 든 것이다.

그가 의식을 움직이자 열두 마리의 육익상공들이 즉시 사방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모습을 감추었다.

한립은 이제 지체 없이 명청령안의 신통을 발휘해 산허리쯤에서 영기가 가장 농밀한 지점을 찾아 토둔술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천기부를 방출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일단 영충과 영수들이 쉴 수 있게 안배하고 자신은 바로 폐관 수련용 밀실로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갔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의식이 평온하고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가 저물대를 스쳐 주홍색 호리병을 꺼내더니 손바닥에 기울였다.

그러자 코를 찌르는 향을 가진 비취색 환약이 굴러 나왔다. 바로 한립이 이번 원정을 떠나게 한 배영단이었다. 구유곡 부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을 연화시키는데 적어도 반년은 걸릴 것이라 했으니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배영단을 연화시켜야 앞으로의 수련과 전투에서도 크게 유리할 것이다. 비취색 단약을 삼킨 한립은 단약 표면에서 뜨거운 열기가 발산되어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한립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호리병을 회수한 다음 두 눈을 감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누군가 그의 몸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면 이 촌 가량의 원영이 두 눈을 번쩍 뜨고 입에서 푸른 기운을 뿜어 비취색 단약을 연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밀실 안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부지불식간에 반년이 흘러갔다. 밀실 속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설련산 밖에서는 여러 무리의 수사들이 명성을 흠모한다는 이유로 앞 다퉈 다녀갔다.

그 속에는 심지어 원영 초기의 은발 노인도 있었다.

그러나 하얀 안개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보고 소리를 질러 보아도 소용이 없자 모두 그냥 돌아갔다. 은발 노인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안개 속에 침입하기도 했는데 안에서 날카로운 곤충의 울음소리와 마주쳐 쫓기듯 빠져나왔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 빠져나온 그의 팔 한쪽이 투명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은발 노인은 다시 금제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저 한숨을 내쉬며 물러나야 했다.

진법 속에 강력한 영충을 풀어 놓았다는 것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고, 또 영수가 강할수록 그 주인의 신통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련산을 중심으로 방원 십만 리의 크고 작은 세력들은 설련봉에 신통이 대단한 고인이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곳에서 수 백 년 간 군림하던 융 선배마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돌자 다들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렇게 설련봉 천여리가 자동으로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이곳을 지나는 수사들도 멀리 돌아가 고인의 수행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나마 반년이 다 되어 가도록 설련산은 고요했고 고인도 다른 세력의 일에 끼어들지 않아 그들도 안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날, 밀실 속의 한립이 결국 배영단을 연화 시키고 두 눈을 떴다.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이 분명 수행이 크게 늘어난 모양새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푸른빛을 응결했다. 달걀 크기의 빛덩이가 반짝거리며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원영이 자라니 법력도 적잖이 늘었구나.”

한립이 수중의 정순한 영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손을 털어 내자 빛덩이가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렸다.

이어 자신의 두개골을 내려치자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와 허공을 선회한 후 그와 똑같이 생긴 아기가 나타났다.

다만 이전에는 두 촌 밖에 안 되던 원영이 지금은 반 년 전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고 몸도 더 튼튼하고 선명해져 있었다.

원영은 두 팔로 푸른 솥을 꼭 안고 있었고 머리 위로 비취색 부적이 날아 다녔으며 수십 개의 자수바늘만 한 비검들이 금색과 푸른색으로 나뉘어 떠다니니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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