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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14화 (371/2,000)

# 614

614화. 곤오산을 벗어나다

원반은 빛을 키우더니 직경이 몇 장에 이르는 바퀴 형태를 띠며 회전했다. 금빛이 찬란해 수많은 별들이 그 안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엄청난 진동이 일고 항아리만 한 금빛 빛기둥이 바퀴 안에서 분출되어 허공의 구름층으로 향했다. 금색 빛기둥이 투명하게 빛나며 공간 장벽이 깨져나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순식간에 공간균열이 빛을 중심으로 생겨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가 늘어 촘촘하게 변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오고 거대한 통로가 나타났다.

금색 빛기둥이 그 안으로 흡수되며 주먹 크기의 빛들이 표표히 떠서 아름답게 빛났다. 이때 한 척 크기의 원반의 빛기둥이 통로 속에서 날아와 입구에서 멈췄다.

령롱이 분출한 것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저게 진정한 역성반!’

지켜보던 한립이 통로에서 나타난 원반을 보며 내심 놀랐다. 그때 령롱이 뿜어대던 은빛이 차츰 사라지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뜻밖에도 조금 쓸쓸해 보였는데 은발 여인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빛의 바퀴 위에서 나타났다.

그녀와 발밑의 수레가 가까워지자 거대한 통로는 무언가를 감지한 듯 공명하며 울어댔다. 이에 역성반이 신난 듯 빙글빙글 돌며 엄청난 영성을 뿜어냈다.

역성반의 모습에 령롱이 미소를 짓다가 아래쪽에서 바라보고 있는 한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잠시 주저하다 돌연 손을 뻗어 노란빛, 핏빛, 하얀빛의 물건들을 쏘아 보냈다.

“……!”

한립은 의아했으나 상대가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소매를 털었다. 푸른빛이 빠져나가 세 물건들을 휘감아 돌아왔다.

빛이 가시고 보니 하얀 옥간과 핏빛 칼날 그리고 마지막 남은 파계부였다. 한립이 무어라 말할지 망설이는데 은발 여인의 탄식 같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역령통로와 인계가 만나는 공간에 관한 자료이다. 이전 두 녀석들 것보다 상세한 것이니 도움이 될 게다. 파계부와 칼날은 영계에서는 어차피 쓸데가 없으니 네게 넘겨주마. 그리고 이렇게 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어도 곤오산을 떠나기 어려울 테니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너를 도와주겠다.”

그녀의 말에 한립이 멍해 있자 령롱이 손을 뻗어 통로 속의 역성반을 가리켰다. 그러자 원반이 맑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돌아 돌연 한립을 겨냥했다.

빛이 번뜩이고 금빛 빛기둥이 날아들자 그와 인간형 꼭두각시는 보호막에 둘러 싸여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일을 마친 령롱은 이제 지체 없이 통로로 날아들었다. 통로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령롱과 수레 형태의 역성반을 머금은 동시에 콰르릉! 하는 거대한 소리가 들리며 은발 여인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통로입구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고 빛을 흩날리며 붕괴했다. 곧 진마탑 9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해졌다.

그 시각 항지례와 만년시웅 그리고 임은병은 겨우 진마탑이 위치한 깊은 구덩이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한립이 9층에서 사라진 순간 향지례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향 수사님?”

비록 만년시웅의 수행이 향지례에 못 미쳤지만 그래도 상고시대부터 살아온 요물이었다. 거기다 뒤에 엄청난 거물이 버티고 있었으니 향지례와 맞먹지는 못해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상한 느낌을 받았네. 곤오산 바깥의 봉인을 누군가 건드린 것 같았는데 의식으로 살펴보니 이상이 없었어.”

향지례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봉인이 약해지면서 순간적으로 나타난 이상이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강력한 봉인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지도. 그렇지, 엽 가에서 이 사단을 일으켰다고 들었는데. 엽 가 수사들은 전부 죽었는가?  엽 가 대장로라는 원영 후기의 수사는 어디 있지?”

“엽 가 수사들은 이미 마물에게 죽임을 당했고, 대장로는 9층에 들어간 이후에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죽었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만년시웅이 멈칫하더니 간사하게 웃었다.

“정말 죽었든 아니든 상관없네. 큰일을 저질렀으니 엽 가는 책임을 지고 사라져야겠지. 돌아가면 대진 제일 세가는 다른 가문이 될 게야. 만요곡에서 반대하지는 않겠지?”

향지례의 눈빛이 서늘해지며 평소의 약삭빠른 늙은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화신기 수사의 위엄이 느껴졌다.

만년시웅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답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엽 가와 본 곡이 약간의 친분을 쌓아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큰 실수를 덮어줄 수야 없지요. 깨끗하게 제거하고 새로운 가문으로 속세를 다스리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네. 흠, 임 수사도 산을 나선 후에는 바로 천란초원으로 돌아가시게. 수사가 대진에 머문 시간이 꽤 길다고 알고 있으니. 이곳은 천란초원도 아닌데 성전의 수사들이 함부로 드나 들어서야 되겠는가?”

향지례는 고개를 돌려 임은병을 향해서도 냉랭히 당부했다.

“잘 알겠습니다. 이번에 곤오산을 빠져나가는 대로 초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상대의 당부가 없더라도 그녀는 천란성전으로 돌아가 다른 원영기 수사들의 도움을 받아 한립이 건 금제를 제거할 수 있을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임은병이 공손히 대답하자 향지례도 얼굴을 풀었고 그녀를 향해 무어라 말을 하려다 허공에 나타난 하얀 빛 줄기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도착한 하얀 빛 줄기는 세 수사에게 다가왔다.

만년시웅이 놀라 즉시 공격을 받아치려 했지만 갑자기 주변 기운이 응결돼 꼼짝할 수 없었다. 곧 곁에선 향지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할 것 없네! 천마종 호 수사가 이 노인네에게 보내온 비검전신이니까.”

향지례가 한 손을 뻗어 하얀빛을 불러들였다. 빛이 허공을 선회해 그의 손에 떨어졌는데 뜻밖에도 희미한 빛을 내는 작은 검이었다.

향지례가 작은 검을 사이에 두고 두 손을 맞대었다가 다시 그것을 허공에 던졌다. 하얀빛 줄기가 번뜩하며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가지! 호 수사가 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합류하면 되겠군. 그 후 바로 남강의 크고 장은 종문들을 소집해 이곳을 완전히 봉쇄하면 되겠어.”

향지례가 하얀빛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의 말에 만년시웅과 임은병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치 령롱과 한립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 했다.

* * *

남강 모처의 경치 좋은 산봉우리.

연기기 수사 몇몇이 작은 정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남강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거대 봉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얀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봉인 속에 무엇이 있을지 추측하고 있는데 돌로 만든 정자 위에서 갑자기 금빛이 번뜩였다.

쾅!

빛기둥이 허공을 뚫고 나와 정자를 빗겨나갔다.

앉아 있던 수사들이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금빛 속에서 푸른 장포의 수사와 사람의 모습을 한 은빛이 나타났다.

푸른 장포의 수사는 잠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 했는데 그가 손을 젓자 곁의 은색 인영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에 저계 수사들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이곳이 어디지?”

푸른 빛 속의 인영이 몸을 가누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는 바로 역성반으로 전송되어진 한립이었다.

저계 수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립을 의식으로 훑었지만 상대의 수행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이곳은 금도산(金圖山)입니다. 선배님께서는 누구신지 여쭈어도…….”

하얀 장포의 수사가 그들 중 수행이 가장 높은지 불안해하면서 입을 열었다.

“금도산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보네. 이곳이 남강이기는 한 것인가?”

그들에게 신분을 밝힐 생각이 없는 한립은 무표정하게 다시 되물었다.

“이곳은 남강의 중루부(中婁府)입니다.”

체격이 준수한 수사 하나가 눈치 빠르게 나서서 대답했다.

“이곳이 중루부였군.”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루부는 봉인 결계가 있던 보운부(普云府) 인근의 부지였다.

눈앞의 저계 수사들은 작은 가문 출신이거나 아니면 산수라 수행의 깊이를 파악할 수 없어 한립 앞에서 찍 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수행을 파악할 수 없는 정도라면 십중팔구 결단기 이상의 수사라는 소리였다. 이런 고계 수사들은 멀리서 한번 보기도 어려웠으니 대화를 나눌 기회 또한 있을 리 없었다.

한립은 이곳이 어딘지 듣고는 안색이 풀어졌으나 돌연 손을 저었고 푸른빛이 튀어나가 수사들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연기기 수사들이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중 하나가 빨려 들어왔고 한립은 다섯 손가락으로 상대의 머리를 잡은 채 푸른빛을 번뜩였다.

잠시 후 손바닥의 빛이 사라지고 그 자가 의식을 잃은 채 미끄러져 내려가자 다음 수사를 빨아들여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드디어 마지막 저계 수사가 쓰러졌을 때 한립이 그들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독한 자를 만났다면 너희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것만으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거라.”

말을 마친 한립이 고개를 들고 방향을 살피더니 신형이 흐릿해졌다. 푸른 빛줄기로 변해 그곳을 벗어난 것이다.

한 시진 후, 쓰러져 있던 수사들은 거의 동시에 깨어났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길한 느낌에 더 이상 모임을 이어가지 않고 분분히 산을 내려갔다.

그 시각 한립은 벌써 수 만 리 밖에서 령롱이 던져 주고 간 하얀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이 한숨을 쉬며 옥간을 회수했다. 옥간 속 자료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역령통로에 대한 소개이자 신묘한 거대 진법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진법은 영계 수사들이 영력통로를 여는데 쓰는 것으로 난해한 것은 둘째 치고 필요한 최상급 영석의 수가 살이 떨릴 정도였다.

어차피 인계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진법은 아니었으나 열심히 연구를 해보면 조금 더 간단한 진법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당연히 인계와 역령통로가 만나는 공간 접점에 대한 정보였다. 공간의 특징과 출몰 예상 지역과 환경이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던 인계의 접점 열댓 군데가 일일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녀는 향지례 등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 중 몇 군데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립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드디어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옥간 속 내용은 아무리 진귀해도 원영 후기 이상은 되어야 필요한 것이었다.

옥간에 따르면 공간 접점을 통과하려면 적어도 화신 초기 이상의 수행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그때가 돼야 수사의 원영이 충분히 굳어 공간 접점의 무서운 압력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지금 배영단과 봉혼주를 풀 방법을 찾아내어 당장 천남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하필 봉혼주를 풀 보조단약이 현빙단(玄氷丹)이라는 혹한의 성질을 지닌 단약이었다.

그것은 현빙화라 불리는 재료로 제련할 수 있는데 그리 찾기 힘든 영초는 아니었다. 문제는 현빙화가 오직 만년현빙에서만 자라고 일단 꺾거나 그곳에서 분리해내면 곧 물처럼 녹아 약효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한의 성질을 지닌 영약 중 효과가 가장 좋으면서도 빙설 지역의 몇몇 종문 말고는 거의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이것이 대진 경매회에서도 현빙화는 볼 수 없는 이유였다. 현빙단은 봉혼주를 푸는 데에만 효과가 있어 건 노마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물론 음라종은 몇 병을 지니고 있겠지만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다 해도 함부로 대진 마도를 칠 마음은 없었다.

현빙단의 약방에 혹한의 성질을 지닌 다른 영초를 배합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러면 약성이 크게 떨어졌다. 그래서 완벽을 기하기 위해 한립은 극한 지대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바로 곤오산에서 백요이를 향해 북야소극궁에 들리겠다고 언질을 주었던 이유다. 북야소극궁 역시 빙설 기후로 이름난 북명도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그쪽 수사라면 쉽게 현빙화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한수(寒髓)를 떠올리며 북야소극궁에서 태양정화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한수를 보존해온 곳이라면 태양정화를 지니고 있지는 못해도 관련된 실마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한립은 바로 북명도로 달려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 곤오산에서 벌어진 소란이 잠잠해 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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