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613화 (370/2,000)

# 613

613화. 영혼탄서

천정비를 품은 거대 비석은 절반이 땅 속으로 사라져서는 웅웅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때 허공의 검은 구멍 쪽에서 돌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놀란 한립이 곧바로 원강순을 가리켰고 보호막이 몇 배로 커졌다. 그러자 돌무더기 틈으로 검은 빛기둥이 날아들었다.

쾅!

굉음이 들리고 빛기둥이 폭발하며 인근 수십 장이 검은 기운에 잠식당했다. 은색빛이 검은 기운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한립의 안색이 달라지며 수결을 맺어 연달아 법결을 던져 넣었다.

보호막이 기이하게 매끄러워지더니 대부분의 검은 기운이 미끄러져 내리고 흔들리던 빛도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멀리서 공격을 날린 원살 성조의 분신은 은월의 맹공에 틈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달아 날아온 빛기둥에 보호막이 박살났을 것이다.

갑작스런 변고에 머리 둘 달린 검은 늑대는 크게 분노했다. 마물은 더는 은월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입에서 검은 빛기둥을 쏘아 주변의 마기를 움직여 은월에게 쇄도하게 했다.

원기를 크게 상하더라도 얼른 은월을 떼어 놓으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쿠르르릉!

돌연 땅이 엄청나게 흔들리며 공간의 각 모서리에서 수십 개의 빛기둥이 솟아오른 것이다. 빛기둥들은 수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돌기둥으로 변했다.

돌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의 빛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표면에 각양각색의 굵은 영기의 고리가 생겨나 빠르게 회전하더니 곧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공간 중심에서 만연하던 마기가 고리가 회전하자 불나방처럼 날아든 것이다. 허공의 검은 구멍 위에도 무수히 많은 가는 빛의 실들이 촘촘하게 생겨나 거미줄처럼 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빛의 실에 감겨 산만한 빛덩이로 변화했다. 한립은 예비용 진법이 발동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더욱 영력을 불어넣는데 집중했다.

돌기둥의 영기의 고리가 굵어짐에 따라 마기가 끌려오는 속도도 빨라지면서 순식간에 공간 전체의 마기가 돌기둥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충만한 마기에 의지해 은월과 싸우던 검은 늑대의 상황이 불리해졌다. 검은빛 속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연달아 들렸으나 핏빛에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립은 한시름 놓으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돌비석을 향해 법결을 넣었고 돌비석이 낮게 진동하며 검은 구멍 위의 빛덩이에서 우윳빛 기운이 흘러내렸다.

이에 은월과 싸우고 있던 늑대는 기겁하며 은월도 팽개쳐 두고 즉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은월이 코웃음을 치며 그 뒤를 쫓아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우윳빛 기운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려 검은 기운의 입구를 막아버렸다. 순식간에 수정벽이 생겨나며 마기를 봉인했다. 검은 늑대가 그것을 보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즉시 봉인된 비석 쪽으로 향했다. 화룡새를 이용해 본적이 있으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단번에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늑대가 울부짖더니 검은 빛으로 변했다가 세 마리의 똑같은 늑대로 갈라져 한립과 비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 한립 곁에서 핏빛이 폭발하며 대량의 핏빛 기운이 진득하게 피바다를 이루었다.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세 늑대는 순식간에 피바다에 휩쓸려 갇히고 말았다.

곧 은빛이 피바다 위에 나타났다.

꽈광!

천둥소리가 들리고 빽빽한 불화살이 은빛 속에서 날아들어 세 늑대를 동시에 공격했다. 세 늑대는 놀라 위쪽으로 검은 기운을 방출했다.

한립이 서늘하게 지켜보다가 한 손에 삼염선을 들고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맑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한 척 크기의 삼색 불새 세 마리가 각각 세 마리의 늑대를 향해 날아갔다.

엄청난 고온에 주변의 불바다가 증기처럼 타올랐다.

이에 늑대들 중 한 마리만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고 나머지는 그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은월이 희색을 드러내며 수결을 맺었다.

은발 여인이 허공에서 빛으로 변해 거대한 은색 늑대의 모습을 취하고는 검은 늑대를 향해 돌진했다. 이에 원살 성조의 분신이 은월이 거대 늑대의 모습을 한 것을 보고 무엇을 떠올렸는지 고함을 내질렀다.

“영혼탄서(靈魂呑噬)를 하려고?  절대 안 된다.”

늑대가 깊게 숨을 들이 마시더니 신속히 피를 토해냈다. 핏줄기가 바람을 타고 붉은 화염을 일으키더니 주변의 피바다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자유를 되찾은 검은 늑대가 검은빛을 번뜩이며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 채 열댓 장을 벗어나기 전에 머리 위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은색 뇌전이 번뜩였고 검은 늑대가 방향을 틀기도 전에 무수히 많은 푸른 실들이 그를 감싸 꽁꽁 묶었다.

대경실색한 검은 늑대가 피로 만들어낸 붉은 화염을 북돋아 푸른 실을 태우려했다. 하지만 은색 뇌전에서 누군가 콧방귀를 뀌더니 푸른 실의 기운이 또렷해졌고 전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상도 못한 일에 검은 늑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가 달아나지 못하자 그 틈에 은색 늑대가 달려들었고 검은 늑대의 육체 속으로 사라졌다.

검은 늑대의 두 머리가 동시에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대며 참지 못하고 온 몸을 떨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늑대 머리 중 하나가 갑자기 두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돌려 다른 머리의 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크앙!

그 순간 늑대 머리 중 하나가 은백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검은 머리도 당하고만 있지 않고 입을 벌려 은백색 머리를 공격했다.

그러는 사이 은빛 뇌전 사이로 허천정을 든 한립이 나타났다.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는 늑대를 지켜보며 걱정스러워 했다.

비록 은백색 머리가 선공을 했지만 검은 머리가 정신을 차리자 검은빛이 번뜩이며 맹공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보다 얼굴을 굳힌 한립이 한 손으로 허천정을 건드렸다.

그러자 맑은 소리가 퍼져나갔고 거대한 늑대를 구속한 푸른 실이 더욱 조여들었다. 이후 한립이 입을 벌려 검은 머리를 향해 금빛 뇌전을 분출했다.

금빛이 폭발하며 가느다란 뇌전이 사방으로 튀는 동시에 검은 늑대 머리가 힘들게 끌어올린 마기를 잃고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타 은백색 머리가 검은 늑대 머리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검은 머리는 뜯겨나가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거무튀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검은 그림자는 형태가 불분명했지만 진흙 덩이처럼 뭉쳐져 악랄하게 은백색 환영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은백색 환영에서 은월의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부신 은빛이 번지고 은백색 그림자의 몸집이 불어나 검은 그림자를 삼키고 다시 은백색 머리로 들어갔다.

그러자 미친 듯이 물어대던 검은 늑대 머리가 공격을 멈추고는 눈에 초점을 잃었다. 은백색 머리도 더는 검은 머리를 신경 쓰지 않고 괴롭다는 듯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오히려 안심하며 작은 솥을 거대 늑대의 몸에 던졌고 대량의 기운이 흘러나와 거대 늑대를 빛구슬 형태로 둘러쌌다.

일을 마친 한립이 주변을 살피며 다시 봉인 근처로 날아갔다. 그리고 제단 잔해 위로 날아가 손에서 몇 개의 새빨간 불덩이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폭음이 들리며 구덩이가 파였는데 그 안에서 검은 빛을 내며 무언가가 반짝였다.

인간형 꼭두각시가 허공을 쥐어 그것을 끌어들였는데 놀랍게도 절반만 남은 흑풍기의 잔해였다. 이미 거의 망가졌지만 아직도 엄청난 영기를 함유하고 있었다.

잠시 흑풍기를 살피던 한립이 거침없이 자신의 저물대 속으로 넣었다. 복구가 가능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재료만 해도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인데 이대로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한립은 별안간 위로 날아올라 구름으로 뛰어들었다. 푸른 빛줄기가 가시고 한립이 진지한 얼굴로 허공에 멈추었다. 머지않은 곳에서 무언가가 녹색 빛을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비취색의 통천령보 팔령척이었다.

팔령척은 상한 데 없이 멀쩡했는데 불문보물이라 마공과는 상극 중에 상극이었기에 바로 마화시키지 못한 것이다. 물론 원살 성조가 완전히 원기를 회복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팔령척을 응시하면서도 함부로 다가가지 않았다. 허천정을 얻으려다 건람빙염에 거의 죽을 뻔 했기에 팔령척도 비슷한 위험을 품고 있을지 의심한 것이다.

그는 먼저 의식을 이용해 인간형 꼭두각시를 날려 보냈고 팔령척을 잡아채게 했다. 뜻밖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에 안심하고 한립은 기쁜 마음으로 팔령척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보물은 녹색으로 반짝였지만 영력을 불어넣어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흠.”

이때 빛덩이에 감싸여 있던 거대 늑대가 낮게 울부짖더니 요란한 빛을 내며 그것을 깨고 나왔다. 한립이 흠칫 놀라 서둘러 팔령척을 챙기고는 허천정을 향해 손짓했다.

허천정은 긴장한 기색의 그를 향해 날아오더니 푸른빛으로 변해 그의 손에 떨어졌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의 늑대를 바라보았다.

빛이 가시고 우아하게 몸을 일으킨 거대 늑대는 이제 머리가 하나뿐이었고 전신의 털이 은백색으로 빛이 났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은백색 늑대를 보며 한립이 반갑게 날아가다가 중간쯤에서 우뚝 멈추었다.

서늘한 눈빛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것이다. 늑대의 몸이 흐릿해 지더니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은발 여인은 무표정하게 한립을 바라보았는데 분명히 입 꼬리를 끌어올리고 조소하고 있었다.

“당신은 롱몽이군요.”

한립이 숨을 고르며 신중히 물었다.

“롱몽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일단 지금은 롱몽의 혼백이 주의식이니까.”

그녀는 손을 들어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평온해 보였지만 역시 육체를 찾은 것이 기쁜 듯 했다.

“은월은 어찌 된 것입니까?”

“아무 일도 없다. 영혼탄서를 하며 의식의 힘을 적잖이 소모해 잠들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 빨리 나타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령롱은 자신의 손에서 시선을 거두며 의아하다는 듯 답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한립은 은월이 무사하다는 말에 일단 안심했다.

“어떻게?  당연히 영계로 돌아가야겠지! 어찌 설령을 보내기 아쉬워 네 곁에 붙잡아두기라도 하려는 것이냐.”

령롱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서늘하게 물었다. 그녀의 노골적인 물음에 한립의 얼굴이 일순 붉어졌지만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아시다시피 은월도 영계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막을 생각도 없지만 그럴 능력도 되지 않습니다.”

“현명한 생각이다. 본래 네가 지닌 통천령보를 회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혼탄서를 할 때 네가 힘을 보탠 것이 가상하기도 하고 또 설령이 네게 약속한 것이 있으니, 은월랑족의 공주로서 은혜를 모른 척 하면 안 되겠지. 솥과 팔령척 모두 남겨두마. 다만 오늘 이후 너와 설령간의 인연도 끝이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만일 네가 영계로 찾아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친히 너를 죽일 것이야.”

령롱의 말에 한립은 안색이 조금 달라졌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겠다고 대답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절의 뜻을 밝히지도 않은 것이다.

은발 여인은 그저 경고한 것이지 한립에게 약조를 받아내려던 것이 아니라서 바로 손짓을 해 검은 빛을 날려 보냈다. 이에 한립이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 허공에 손을 쥐어 그것을 불러들였다.

원살 성조의 분신에게 빼앗겼던 마수찬 비도를 돌려준 것이다. 한립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 인간형 꼭두각시에게 던져주었다.

이제 령롱은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공간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녀가 봉인 진법을 확인하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연 서늘한 눈빛으로 한립을 돌아보고는 다시 돌아왔다.

“만년영액을 몇 방울 주거라. 역령통로를 열려면 필요하니까.”

령롱의 말에 한립은 입 꼬리를 꿈틀했지만 바로 저물대에서 작은 병을 몇 깨 꺼내 던져주었다. 옥병을 받아 든 령롱은 그 후, 근처의 평지를 찾아 가부좌를 하고 수결을 맺었다.

주술을 읊자 점점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주변으로 은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눈부신 빛 속으로 여인의 모습이 점차 잠겨 들어가더니 멀리서 보면 그윽한 달빛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때 령롱이 돌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입에서 역성반 표식이 새겨진 원반을 분출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봐도 원반은 무언가 이상했다. 엄청난 위력을 지닌 표식이 응결해 만들어진 것 치고는 함유한 영기가 최상급 보물보다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원반이 은발 여인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령롱은 열손가락을 튕기며 다양한 빛깔의 법결을 원반으로 날려 보내는 중이었다.

잠시 후, 이변이 시작되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