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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12화 (369/2,000)

# 612

612화. 봉령대법(封靈大法)

령롱의 말을 듣고 향지례는 바로 그러겠다고 수락했다. 그리고 만년시웅은 조금 주저했으나 결국 이를 악물고 받아들였다. 핏빛 칼날은 더없이 귀중한 보물이었으나 영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은 없었다.

잠시 후 황토색 부적 두 장과 반 척 길이의 핏빛 칼날이 령롱의 수중에 들어왔다. 은발 여인은 보물들이 진품임을 확인하고 핏빛 칼날을 갖고 놀았다. 핏빛이 번뜩이자 그녀는 흡족한 얼굴로 보물을 회수하고 향지례와 만년시웅을 향해 말했다.

“상계와 하계를 연결하는 방법은 역령통로 외에도 인계와 영계 사이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있다. 다른 곳보다 경계면이 약해 두 세계의 공간균열 속에 위치하지. 충분한 힘만 있다면 그곳을 뚫고 올라갈 수 있다. 고마계가 인계를 침략했을 때도 우연히 고마계와 인계가 만나는 공간을 발견했기 때문이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고마 성조들이 신통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렇게 쉽게 이곳으로 넘어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간이 만나는 접점이라…….”

향지례가 중얼중얼 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세상천지가 이렇게 방대하니 당연히 공간이 만나는 접점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상고수사들도 오랜 세월 백방으로 찾아 다녔지만 열댓 개를 발견했을 뿐이니까.

어떤 것은 위치가 수시로 변하고 어떤 것은 일정한 위치에 있는데 스스로 붕괴되거나 형태가 변해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게다가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역령통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지. 공간을 통과하면서 가장 위험한 것은 영계와 인계를 차단하는 힘이 아니라 공간 폭풍 때문이다. 일단 공간폭풍에 휩싸이면 아무리 뛰어난 수행을 지녔어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지.

어쨌든 이런 것들은 이후에 고민할 문제고 일단 공간접점을 찾아야겠지. 내 그 중 몇 곳을 기억하고 있지만 세월이 흘렀으니 아마 대부분은 붕괴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새로운 장소는 너희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물론 그 전에 내가 알고 있는 이전 공간들의 위치와 찾는 방법 그리고 구체적인 특징을 상세히 알려주도록 하겠다.”

“감사드립니다, 왕비님!”

만년시웅과 향지례가 무척 기뻐하며 각자 새하얀 옥으로 만든 옥간을 꺼내 은발여인에게 건넸다. 여인은 그들에게 관련 내용이 적힌 옥간을 복제해 나눠주었다. 임은병이 뜨거운 눈빛으로 그것을 지켜보았으나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주었으니 어서 가 보거라. 너희의 안목이면 이게 거짓인지 진짜인지는 감별할 수 있을 것이다. 난 9층으로 돌아가야 하니 불필요한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향지례와 만년시웅은 이것이 명백한 축객령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곧바로 인사를 하고 떠났다. 임은병도 한립을 향해 잠시 눈길을 주더니 묵묵히 은색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이제 대청 안에는 한립과 은발 여인만 남게 되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을 응시하는데 시선이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은발 여인은 대청 출구를 보며 눈을 빛냈다.

잠시 후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두 녀석이 나름 분별은 있구나. 의식을 남겨 놓아 이곳을 염탐하지는 않았으니 말이야. 그럼 이제 천정비를 꺼내 보거라.”

“어찌 제가 천정비를 지니고 있다 여기십니까?”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느냐! 내 분혼이 네 기령이었던 것을 잊지 말거라. 네가 얻은 수정비석에 적힌 고대 문자를 나도 보았다. 이번에 네가 힘을 보탠다면 솥도 필요 없고 팔령척도 네게 주겠다. 통천령보가 귀하기는 하지만 영계에서 최고의 보물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이 기억 속에 네가 지닌 또 다른 보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언인지 떠오르지가 않아……. 내 분혼에 무슨 수작을 부려 놓은 것은 아니겠지?”

“농담도 잘하십니다. 선배님의 강력한 의식을 겨우 원영 중기인 제가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흥!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치우거라. 너와 기령의 약조가 아직 풀리지 않았고 분명 너와 관련된 기억 일부가 봉인 되어 있어. 아마 엄청난 보물을 지니고 있는 거겠지. 통천령보인 솥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니 말이야.”

은발 여인이 냉소하며 그를 훑었다.

“그렇다면 어쩌실 겁니까?  저를 잡아다 고문이라도 해서 알아내실 작정이십니까?”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인간형 꼭두각시가 돌연 흐릿해지며 사라져 그의 곁에 나란히 섰고 동시에 몸에서 은빛을 뿜어냈다.

만일 눈앞의 여인이 신비로운 병에대해 알아내려 한다면 기령을 발동해 은월을 강제로 깨울 수 있을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전에 상대에게 제압당할 가능성이 컸지만 말이다.

은발 여인이 한립의 반문을 듣고는 얼굴이 싸늘해지더니 눈빛이 사나워졌다.한립은 그녀를 경계하며 소매 속으로 몰래 삼염선을 쥐고 다른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동시에 인간형 꼭두각시의 손에 희미하게 작은 궁이 나타났다.

푸훗!

갑자기 은발 여인의 얼굴이 풀어지며 웃어댔다. 뜻밖에도 아주 익숙한 표정이었고 곧 귀에 익은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은월?  너인 것이냐?”

“주인님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와 롱몽이 융합하기 전에 병에 대한 기억을 봉인해 두시다니요! 령롱이 공간이 폭발해 의식이 크게 상하고 당시 주의식이던 롱몽이 잠들어 제가 주도권을 되찾아 오지 않았다면 벌써 봉인을 풀어 버렸을 것입니다.”

“기억을 봉인하는 것에 너도 동의한 것 아니더냐. 그렇지 않고서야 나도 쉽게 그럴 수 없었겠지.”

눈앞의 여인이 령롱이나 롱몽이 아닌 은월이라는 것을 알고 한립은 크게 기뻐했다. 이전과 달리 한결 편히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잠시 주도권을 잡았지만 제 의식은 롱몽에 비해 약하니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롱몽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기운을 회복하면 저는 나설 기회가 없겠지요. 조금 전에는 싸우느라 바빠 기억 봉인에 대해 깊이 추궁하지 않았으나 이런 허술한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주인님께서 작은 병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제게 봉령대법(封靈大法)을 거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 동의하에 비술을 걸어두시면 저나 주인님이 죽거나 제 기령의 신분이 정식으로 풀리지 않는 한은 영계로 되돌아가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겠구나. 그런데 일단 육체를 되찾으면 정말 영계로 돌아갈 수는 있느냐?”

한립이 그녀가 어째서 자신을 도우려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쩔 수 없이 저도 영계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롱몽의 힘만으로는 역령통로를 소환할 수 없으니까요. 롱몽과 저 그리고 령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쉽게 저버릴 수 없습니다. 아마 제 기령의 신분은 주인님께서 영계로 오셔서 비술을 펼쳐야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겠지요.”

은월의 달라진 눈빛에 한립이 할 말을 잃었다.

“주인님, 일단 법술을 펼치세요. 그렇지 않으면 늦습니다. 그 후에 제가 파계부로 장벽을 부수고 핏빛 칼날로 마물을 막는 동안, 주인님께서 천정비를 이용해 진마기를 억누를 진법을 발동해 주세요. 그럼 제가 영혼탄서(靈魂呑噬)의 신통을 발휘해 본래의 육체로 돌아가면 됩니다. 원살 성조의 분신을 먹어치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거예요.”

“그래, 일단 임시로 진법을 설치하마. 네가 잠들고 다른 둘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바닥을 뒤집어 진법 법기 한 벌을 들고 날아다니며 곳곳에 설치하고 푸른 기운을 뿜었다. 그러자 은월이 조용히 원래 자리에 앉아 그가 진법을 설치하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한립의 신형이 번뜩이며 은월이 가부좌를 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름다운 은월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제 술법을 시작할 테니 너도 조심하거라!”

당부를 마친 그가 수결을 맺어 전신에서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입에서 기괴한 주술이 흘러나오고 한참 뒤 한립과 은발 여인을 동시에 감싸며 눈을 찌를 듯한 빛의 장막이 펼쳐졌다.

장장 한식경이 지나서야 주술을 외는 소리가 멎었고 은월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푸른빛도 사라졌다. 은발 여인이 이마를 짚고 고통스러워했다.

“괜찮은 것이냐?”

“괜찮습니다. 비술은 성공적이네요. 그럼 이제 가시죠! 언제 롱몽이 다시 깨어날지 모르니 어서 9층으로 가야합니다.”

은발 여인은 고개를 젓더니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가 돌연 한립을 보며 빙그레 웃는데, 마치 갓 피어난 장미처럼 싱그러웠다. 한립은 그녀가 정말 괜찮은지 신중히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킨 은발 여인이 황토색 부적 한 장을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빛이 번뜩이며 노란기운이 폭발했고 투명한 공간장벽이 허공에 나타났다.

핏빛이 장벽을 갈랐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한립이 손을 젓자 삼염선의 화염과 거대한 검기가 동시에 분출되었다. 인간형 꼭두각시도 뇌화궁의 불화살을 날려 같은 곳을 공격했다.

드디어 장벽이 왜곡되며 강력한 공격에 허물어졌고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 마기가 새어나왔다. 은빛 여인이 핏빛에 휩싸여 안으로 들어갔고 등 뒤의 풍뢰시를 번뜩이며 한립도 사라졌다.

장벽 너머에서 다시 나타난 한립은 온통 마기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원강순이 소매에서 빠져나와 은색 보호막을 쳤지만 칠흑 같은 마기는 은색 보호막에 닿을 때마다 부식되는 소리가 들려왔고 보호막의 빛은 흐려졌다.

만 장에 이르던 마기의 심연에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이곳의 마기보다는 훨씬 나았다. 벽사신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속전속결을 해야 한다.

한립이 은월을 힐끗 보았다. 은발 여인은 핏빛 칼날이 변한 보호막 속에 있었는데 마기들이 꿈틀거리면서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은월은 즉시 공간의 중심으로 뻗어나갔고 한립은 신형이 흐릿해지며 높이 떠올라 은닉술을 펼쳤다.

드디어 제단 방향에서 은월의 웃음소리와 늑대의 포효가 들려왔다. 바로 이어 흑의 여인의 서늘한 일갈도 터져 나왔다.

“감히 이곳으로 돌아오다니, 본 성조가 당신을 마화할 것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폭음이 이어졌다. 한립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제단을 지나 날아갔다. 위로 계속 솟구치다 보니 방대한 공간에 만들어진 구름에 이를 수 있었다.

그제야 명청령안을 극성으로 발휘해 마기를 뚫고 상황을 살폈다.

제단이 있는 곳에는 백여 장 규모의 검은 구멍이 생겼고 그곳에서 쉼 없이 마기들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 안은 너무 새까맣고 깊어 마기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구멍 위에 핏빛과 검은 빛이 번뜩이며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폭음과 폭발이 계속되었고 그로인해 생겨난 거대한 영기의 압력이 마기들을 밀어냈다. 마치 두 마리의 용이 싸움을 하며 구름을 헤집는 것과 비슷했다.

잠시 동안은 승패가 나지 않을 듯했다.

한립은 은월이 괜찮은 것을 보고 조금 안심한 후 남색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도처를 수색했다.

조금 전의 공간 폭발로 제단은 망가졌지만 질령연옥으로 만들어진 비석들은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립은 오래 걸리지 않아 부서진 돌덩이들 아래에서 비석의 흔적을 찾았다. 하나는 아직도 화룡새 파편이 박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처음과 같이 멀쩡했다.

한립은 검은빛과 핏빛을 살피고는 다시 은닉술을 펼쳐 기운을 완전히 감추고 조용히 하강했다. 어찌나 은밀하게 움직였는지 마물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돌무더기에 도착한 그는 한 손을 펼쳐 옥여의 하나를 휘둘렀다. 그러나 희미한 노란빛이 번뜩이며 그가 돌무더기 아래로 흡수되었다. 수정비석을 꺼내든 그의 표정이 더없이 신중했다.

옥여의를 머리 위로 던진 한립은 천정비를 살피며 영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정비석이 부르르 몸을 떨며 빛을 발산했는데 아주 아름다운 빛이었다.

조심스런 손길로 수정비석을 거대한 돌비석에 가져다대자, 돌비석이 두부처럼 쑥 들어가며 천정비를 빨아들였다.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기도 전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돌비석에서 남색 빛이 터져 나오더니 갑자기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땅으로 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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