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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10화 (367/2,000)
  • # 610

    610화. 검은 동굴

    령롱이 통제하는 역성반이 가장 먼저 위력을 발휘했다.

    별빛이 반짝이며 수많은 빛덩이들이 치솟아 수천수만 개의 별들처럼 금색빛줄기를 남기며 은하수를 이루어 장관이었다.

    소용돌이 중심의 머리 둘 달린 늑대는 개의치 않고 오직 검은 소용돌이가 더 많은 빛들을 흡수하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순간 검은 늑대의 표정이 멍해졌다. 은하수를 이루며 날아간 금빛 별들은 소용돌이를 노린 게 아니었다.

    “실수란 말인가?  그럴 리가…….”

    늑대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두 머리 중 하나가 고개를 돌리고는 흠칫 놀랐다.

    다른 머리가 재빨리 주술을 외자 소용돌이 속에서 분출되던 오색빛이 말려 올라가 금색의 별빛들을 막아서려 했다. 령롱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눈치 채다니 이미 늦었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소용돌이 뒤쪽 수십 장 밖에서 별빛들이 뭉치며 안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자는 놀라 주위를 살폈는데 아주 영악해 보였다. 멀찍이 달아나던 한립이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했다.

    “저 자는?  어떻게 이곳에!”

    한립은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약삭빠른 인상의 노인은 뜻밖에도 곤오산에 들어오자마자 고마의 분혼과 령롱의 융합체에 걸려 환묘천상으로 쫓겨났던 향지례였다!

    융령대법(融靈大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혼백은 은색 늑대의 육체를 완전히 장악했고 고마와 영계의 비술에 모두 능했기에 지금 흑의 여인이나 령롱보다 훨씬 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연허(煉虛) 초기 수사에 육박하는 수행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봉인되어 영력이 단절된 상태에서도 화신기 수사인 향지례를 잠시 가둬둘 수 있었다.

    환묘천상(幻妙天象)이란 인계에서는 실전된 상고 비술로 막대한 의식의 힘을 이용해 공간 균열 틈에 누군가를 봉인하는 기술이었다. 이런 공간균열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고 술법을 펼치는 본인은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렇게 형성된 공간균열은 속성에 따라 곤선롱(困仙籠)이나 몽염연(夢魘淵)으로 불리기도 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효과가 어떤지는 각자의 수행에 따라 달라졌다.

    그러나 저계 수사가 고계 수사에게 걸려 갇히면 십중팔구는 낭패를 당할 것이다. 공간균열이 스스로 사라지기를 기다리거나, 강력한 법보로 공간장벽을 뚫고 나오거나 아니면 꼼짝 말고 안에서 술법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실용성이 떨어지는 술법이었다. 고계 수사가 저계 수사를 상대할 방법이 무수하게 많은데 굳이 이런 비술을 사용하며 의식과 법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술을 펼치려면 최소한 화신 중기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고 동급 수사의 경우 정확히 조준해 가두기가 까다롭다는 점도 잘 사용되지 않는 이유였다.

    다행히 비술을 푸는 데는 의식과 법력의 힘이 많이 들지 않아 역성반의 힘을 빌려 령롱이 해낸 것이다.

    향지례는 자신이 정확히 어떤 비술에 당한 것인지 몰라 얌전히 환묘천상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곳에 불려 나온 것이다. 그는 기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향지례가 작은 눈을 깜짝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늑대가 네 개의 눈을 번뜩이며 흑풍기를 향해 검은 빛기둥을 뱉어냈다. 깃발이 요동을 치며 검은빛을 빼곡하게 발산했는데 본래 수축하고 있던 검은 소용돌이가 움찔하며 직경 한 척의 구멍으로 변했다.

    구멍은 칠흑 같이 새까맣고 빛이라고는 없었는데 주변의 왜곡된 공간들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아무리 공간 계열 보물이라지만 흑풍기의 신통은 가히 괴상했다. 향지례가 검은 동굴을 보고는 안색이 확 달라졌다.

    ‘저건!’

    서둘러 입을 벌린 노인은 삼각형의 영전(令箭)을 체내에서 분출했다. 빛이 번뜩이고 보물에서 금빛 화염이 용솟음쳐 금색 야수 형태의 화염으로 변화했다.

    금색 야수는 전신에 가죽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솟아 있었는데 소 같기도 하고 호랑이 같기도 했다. 야수는 형태가 만들어지자마자 풀쩍 뛰어 빛줄기로 벼하더니 검은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와 동시에 향지례의 낡은 의복에서 영기의 빛이 크게 번지며 보라색 보호막이 펼쳐졌고, 그제야 노인은 긴장한 얼굴로 검은 구멍 쪽을 주시했다.

    그러나 금빛 야수가 구멍에 닿기도 전에 검은 구멍 속에서 흑의 여인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구멍이 괴이한 궤적을 그리며 제단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려 수축했다 늘어났다하며 폭발할 기미를 보였다.

    검은 구멍이 폭발함과 동시에 무수히 많은 굵고 얇은 검은 균열이 나타나더니 만 마리의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은 귀가 터질 듯한 소리가 퍼져나갔다.

    멀리서 지켜보는 한립의 눈에는 제단을 비추고 있던 거대한 거울이 깨져나가는 것 같았다.

    한립이 하얗게 질렸다.

    ‘또 공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인가!’

    8층에서 공간이 허물어졌을 때는 그나마 금제를 건드려 이동시켜주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수많은 공간균열들이 마구잡이로 나타나 불규칙하게 퍼져 있었고 크기마저 제각각이었다. 만일 발안정한 공간균열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면 십중팔구 죽은 목숨이었다.

    저번처럼 공간 균열이 안정된 공간으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했다. 제단에 가까이 붙어 있던 칠묘 진인은 여러 공간 균열이 스치고 지나가 몸과 지니고 있던 보물들이 모두 조각나 버렸다.

    조각난 시체 사이에서 원영이 달아났으나 더욱 커다란 균열에 빨려 들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한립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앞에도 크기가 제각각인 공간균열들이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각각의 균열들이 다 다른 방향으로 쇄도해 피하기도 어려워보였다.

    그때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뜻밖에도 규령의 목소리였다.

    한립도 차마 그녀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뜻밖에도 허천정을 앞세우고 먼저 공간 균열 중 작은 것을 골라 달려든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웅!

    미세한 균열이 허천정에 잘라버리려다가 푸른빛이 번뜩이더니 잠시 멈춘 것이다.

    한립은 고민할 틈도 없이 멈춘 균열을 비켜 날아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이 있던 자리는 동시에 여러 균열들이 교차로 지나가 조각이 나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곧 검은 균열들이 동시에 진동을 해서 한립의 표정이 구겨졌다.

    균열들이 검은 빛을 내며 수축하더니 다시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 본래 왔던 곳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마치 지금까지 보았던 것은 환상이라는 듯 별안간 한립 주위의 허공이 깨끗하게 변했다.

    한 시름을 놓은 한립이 비명소리를 기억하고 서둘러 규령이 있던 곳을 살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규령만 보이지 않았다.

    놀란 그가 의식을 이용해 요수의 본명패를 점검했는데 과연 사라지고 없었다. 뜻밖에도 규령은 공간균열에 삼켜진 것이다.

    한립은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오래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는 재빨리 공간 전체를 훑어 상황을 파악했고, 결국 임은병과 만년시웅만이 살아남았다.

    만년시웅은 강렬한 핏빛 빛덩어리 속에서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임은병의 안색은 너무 안 좋았다.

    사실 수많은 균열들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었는데 우연히 균열들 사이의 틈에 위치해서 운 좋게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행운이라니, 정말 천란 성수라는 것이 신통이 대단해서 그 자를 모시는 성녀를 비호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한립은 더욱 긴장된 얼굴로 그들을 지나 제단 쪽을 바라보았다.

    원살 성조의 분신이 흑풍기로 폭발을 일으킨 이유는 봉인을 깨트리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제단은 검은 기운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주변의 기둥들은 공간 균열이 휩쓴 탓에 완전히 훼손되었다. 이곳의 진법은 거의 사라진 것과 다름 없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시하는 동안 검은 빛은 아직도 극심하게 반짝이며 몸을 줄였다 키웠다 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

    드러난 상황에 한립의 동공이 좁아졌다.

    백여 장 높이의 제단은 이제 5, 60장 밖에 남지 않았고 윗부분은 거대한 칼날이 메어낸 듯 잘려나가 있었다.

    그 곁에 사람 한 명과 두 개의 물체가 떠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전신을 보라색 보호막으로 감싼 향지례였는데 처음에는 굉장한 영기의 빛을 뿜어냈을 보호막이 지금은 바람만 불어도 터질 듯 위태로워보였다.

    향지례 본인도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개의 물체 중 하나는 역성반이었는데 직경 한 척의 원반이 빙글빙글 돌며 엄청난 양의 금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물건은 흑풍기로 놀랍게도 절반이 잘려나가 짜리몽땅해진 모습이었다.

    조금 전 폭발로 통천령보의 절반이 날아갔지만 아직도 검은 빛을 발산하는 것이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립이 아무리 살펴도 령롱과 검은 늑대를 찾을 수 없어 의아해 하는데 돌연 역성반이 움직이며 중심에서 금빛을 분출했다.

    날렵한 누군가가 그 안에서 나타나 흑풍기 쪽을 노려보았는데 보이지 않던 령롱이었다.

    그리고 절반 밖에 남지 않은 흑풍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검은 바람이 몰아치더니 머리 둘 달린 검은 늑대를 뱉어낸 것이다.

    늑대는 전신의 털이 빛을 잃고 푸석해졌고 눈도 총기를 잃어버린 듯했다.

    향지례가 늑대를 보자마자 안색이 굳더니 깊게 심호흡을 하며 기운을 북돋았다. 지쳐보이던 노인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고 즉시 손가락을 뻗었다.

    푹! 푹!

    금색과 붉은색 두 줄기의 빛이 손끝을 떠나 열댓 장으로 늘어지더니 마치 용이라도 된 듯 검은 늑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향지례는 전신에 마기가 충만한 상대를 보고 진마탑이 억누르고 있던 마물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니 당연히 적이 가장 힘이 빠져있을 때 선공을 날려야했다.

    검은 늑대는 이를 드러내며 두 머리가 동시에 새까만 빛기둥을 뱉어 용처럼 날아드는 검빛을 막으려 했지만 충돌하자마자 밀리기 시작했다.

    흑풍기의 폭발을 촉발하느라 상당한 마기를 소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늑대는 당황하지 않고 제단 쪽을 훑고는 입에서 금강석이라도 뚫을 만한 괴성을 내질렀다.

    멀리 있던 한립이 놀라서 쳐다보는데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수십 장 남은 제단이 해변의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던 것이다. 동시에 제단의 잔해 안에서 새까만 마기들이 넘실넘실 빠르게 퍼져나갔다.

    “봉인이 열리고 있어!”

    만년시웅이 당황해 소리쳤다.

    령롱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향지례도 마기를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난색을 표했다. 한립은 엄청난 마기의 양에 입 꼬리를 꿈틀 하더니 즉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리 위를 선회하던 금색 거검이 그의 손짓에 따라 빛줄기로 변해 멀지않는 공간의 장벽을 갈랐다.

    쿠콰쾅!

    장벽에서 금빛이 폭발하고 난 뒤 바로 수많은 새빨간 화살들이 쇄도했다. 인간형 꼭두각시가 뇌화궁으로 쏘아 보낸 불화살들이었다.

    찰나의 순간 공간 장벽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구멍을 뚫으려면 한참 걸릴 것이 분명했다.

    한립이 한 손을 뒤집어 삼염선을 꺼냈다. 삼염선을 발동하려 호흡을 가다듬는데 강력한 빛과 두 줄기의 호선이 장벽의 같은 곳을 공격했다.

    한립이 고개를 돌리니 만년시웅과 임은병이 초췌한 얼굴로 날아와 돕고 있었다. 그들도 한시바삐 이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면 엄청난 마기에 잠식당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든 일단 살아야 했다. 한립도 무어라 말하지 않고 바로 삼염선에서 삼색의 불새를 방출해 호되게 장벽을 공격했다.

    삼색빛이 터지고 그 사이를 각종 주술이 번뜩이며 흐르니 이번에는 장벽이 쿠르릉하며 변형되었다.

    이에 다른 보물들의 공격도 격렬해졌다. 각종 공격에 장벽의 왜곡된 부분을 집중 공격하자 드디어 조금씩 조각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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