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6
606화. 고마의 형상
현청자와 칠묘 진인은 크게 기뻐했다.
한립의 삼염선이 어떤 통천령보의 모조품인 줄은 모르겠으나 평산인과 적명고에 맞먹는 능력을 지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들은 어렵게 만들어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로 자신의 보물의 기운을 북돋아 고마 성조의 분신을 처리하려 했다.
삼염선을 사용한 한립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지만 바로 푸른빛이 반짝이는 옥병을 꺼내 무언가를 삼켰다. 영력이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돌연 스산한 늑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립이 섬뜩한 느낌에 서둘러 고개를 돌리니 제단 위의 거대 늑대가 검은 빛에 휩싸여 울부짖었는데 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식과 명청령안을 발동해도 검은 기운 속을 살필 수 없었다. 미간을 좁히고 있던 한립이 검은 빛이 번뜩였다고 느낀 순간 눈앞의 은색 방패가 흐릿해지며 폭음이 터졌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보호막을 벤 것이다. 너무 순식간이라 놀랍게도 반격의 기회조차 노릴 수 없었다.
‘이런!’
괴이한 상황에 한립이 즉시 몸을 날리려는데 귓가에서 무언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푹! 푹!
한립은 스스로 몸을 날리기도 전에 무언가에 공격당해 날아갔다.
“흠?”
제단의 검은 빛 속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또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어서 피하세요, 주인님! 천랑찬(天狼鑽)입니다!”
다급한 은월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자 동시에 어떤 그림자가 한립 앞을 막아섰다.
퍼퍽!
몇 차례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뒷걸음질 치는 그림자는 한립이 곁에 숨겨둔 인간형 꼭두각시였다. 꼭두각시의 보호막과 푸른 장삼이 뚫리고 가슴과 내단 쪽에 괴이한 짧은 칼날이 박혀 있었다.
한립은 7, 8장을 튕겨 나간 후에야 배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체내의 법력을 응결해 겨우 멈춰 설 수 있었다.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난 그가 서둘러 몸을 살피자 할 말을 잃었다.
원강순으로 만들어진 은색 방패와 영력으로 형성한 푸른 보호막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랫배 쪽의 장삼이 찢겨나가고 금은색으로 빛나는 서금충 갑옷마저 뚫고 그 속으로 검은색 내갑(內甲)이 드러났다.
내갑도 몇 촌 정도 뜯어져 있었고 은빛의 괴이한 칼날이 아랫배에 박혀 있었다.
“흡!”
한립의 얼굴에 푸른 기운이 반짝이더니 전신에 은은한 금빛이 형성되어 칼날이 엄청난 힘에 튕겨나갔다.
몸을 날린 한립이 괴이한 날을 쥐고 자세히 살폈다. 반 척 길이의 칼날은 야수의 날카로운 발톱과 비슷했다. 가슴이 서늘해진 한립이 서둘러 아랫배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2, 3촌 깊이의 상처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고 드러난 속살도 투명해서 희미하게 금빛이 비추었다. 명왕결 일성을 수련하고 얻은 효과로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진 것이다.
명왕결이 아니었다면 보호막과 갑옷이 뚫린 후 곧바로 내단을 통과하는 칼날 때문에 쓰러졌을 것이다. 천랑찬의 위력이 정말 대단했다.
한립이 고개를 들어 이번엔 자신 앞을 막아선 인간형 꼭두각시를 살폈다. 거대 늑대의 또 다른 발톱 두 개가 박힌 부위는 오색빛이 반짝였지만 크게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한립도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보아하니 다른 재료에 오행옥을 더해 제련해 만든 육체가 제법 단단한 듯했다.
검은빛 속의 고마 성조의 분혼 역시 일격필살의 공격이 연달아 통하지 않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천랑찬은 은색 늑대의 육체가 지닌 강력한 신통 중 하나였던 것이다.
공격을 할 때마다 은색 발톱을 하나씩 뽑아야 했고 이 발톱들은 은색 늑대가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제련해서 화신기 수사들조차 경계할만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원영 중기 수사의 몸으로 연달아 세 번의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다니 정말 황당했다.
제단 위의 검은 빛이 사라지고 거대 늑대의 방대한 육체 대신 호리호리한 흑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검은 의복은 흉악한 생김새의 갑옷으로 변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갑옷은 검은 빛을 번뜩였고, 앞쪽에 뿔이 두 개 달린 악귀가 네 팔로 기다란 검은 가시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흑의 여인이 냉랭히 한립을 보았다.
“저건 뭐지?”
“고마의 진마갑(眞魔甲)입니다. 육체를 마화시킨 후에야 대량의 진마기를 응결해 만들어 낼 수 있죠. 방어력이 굉장히 높을 뿐 아니라 갑옷이 함유한 마기를 통해 신통의 위력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상고시대에 벌어졌던 전쟁에서도 요족과 인간 수사들이 진마갑 때문에 고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마 중에서도 일부만 쓸 수 있어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전쟁의 승패가 달라졌을 지도 모르지요.”
“기억이 난 것이냐?”
한립의 물음에 뜻밖에도 은월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한립은 의식을 이용해 인간형 꼭두각시를 움직여 몸에 박힌 은색 칼날을 뽑아 회수하자 오색빛이 상처 부위를 감싸며 붙기 시작했다.
이어 그의 아랫배 쪽의 서금충 갑옷 역시 꿈틀거리며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다만 은색 보호막은 아예 작은 은색 방패로 만들어 앞을 막게 했다.
“점점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중입니다. 이전에는 모호하기만 했던 기억이 선명해지고 있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많습니다.”
은월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한립은 눈을 빛내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고 인간형 꼭두각시가 옆으로 이동해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흑의 여인은 한립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머리 위의 세 개의 보물과 검은 기운이 대치하는 것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갑자기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읊더니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가느다란 검은 실 10개가 화룡새가 박힌 비석을 향해 날아들자, 비석 표면에 검은 빛이 흐르며 진동했다.
제단 주변의 기둥들이 비석과 공명하며 더욱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검은 갑옷의 여인의 얼굴이 진중해지며 머리카락들이 하나씩 곤두섰다. 곧 제단이 흔들렸고 부분, 부분 검은 빛을 번뜩이며 칠흑 같은 마기가 새어나왔다.
검은 갑옷 여인이 광소하더니 흡족한 얼굴로 허공을 가리켰다.
“깨져라!”
날카로운 목소리에 제단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기운들이 허공에 응결해 칠흑 같은 거대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검은 형상은 누각만큼 커다랗고 전신을 여인과 똑같은 검은 갑옷으로 가리고 있었으며 머리에 뿔이 달린 여인이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원살 성조!”
고마의 형상을 본 만년시웅이 화천기의 호법을 서다 놀라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한립과 현청자 등도 크게 놀랐다.
그 순간 고마의 형상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끝없는 보라색 눈동자를 빛냈다.
고마의 형상 위에서 검은 기운이 세 보물의 기운에 밀려 점점 붕괴하고 있었다.
노랗고 붉은 기운은 아무 것도 막아서는 것이 없자 하늘을 뒤덮을 기세여서 마치 제단을 둘러싼 보호막 같기도 했다. 고마의 형상도 그것을 감지했는지 다가오는 빛을 보며 손을 들었다.
콰쾅!
굉음이 들리고 거대한 검은 야수의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다섯 발톱이 반짝이는 노란 붉은 기운을 가르며 움켜쥐자 커다란 도장과 작은 북이 붙들렸고 하늘을 뒤덮던 빛도 환영처럼 흩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마의 형상은 수중의 보물들을 보더니 뜻밖에도 낯선 목소리를 냈다.
냉랭한 목소리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묻어났다.
“이……이곳은, 인계인가!”
이때 허공에서 눈을 감고 있는 화천기의 몸에는 은색빛이 터져 나오다 못해 응결해 등 뒤로 은색 늑대의 머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늑대 머리가 고마의 형상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다시 화천기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뜬 화천기가 놀라 소리쳤다.
“과공신념대법(跨空神念大法)! 원살 성조의 의식을 불러내다니!”
그 소리에 수사들의 안색이 변했다.
고마의 형상이 만들어낸 마수의 발톱이 귀청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황토색 도장과 적명고를 으깨버렸기 때문에 현청자와 칠묘 진인은 더욱 안색이 파리해졌다.
통천령보의 모조품 두 개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다.
이후 고마의 형상은 다른 수사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발밑의 검은 갑옷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공을 들여 인계로 내려 보낸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이번에 술법을 펼쳐 나를 소환한 것은 눈앞의 저 조무래기들을 처리해 달라는 것이더냐? 이전에 이미 나를 두 번이나 소환했으니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럼 네 의식 속에 심어둔 누혼인(縷魂印)이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나를 소환하는데 소모한 진마기면 직접 성조 동족들을 제련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입니다! 다른 수가 있었으면 소환을 했을까요? 그나마 제단에서 진마기가 새어나와 소환을 한 것이지 이전에는 소환을 할 진마기 조차 남아 있지 않았단 말입니다.”
검은 갑옷의 여인이 눈썹을 끌어 올렸다.
“네 본신의 마기로 소환한 것이 아니라면 빨리 움직여야겠구나.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야.”
거대한 고마의 형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단에서 새어나오는 새까만 기운을 발바닥으로 흡수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가운 보라색 눈동자가 훑고 지나가자 수사들은 전부 경계심을 최대로 끌어올렸고 몇몇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에 고마의 형상이 한 손을 들어 올려 커다란 손가락을 튕겼다.
핑!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사라졌다.
아직도 매의 모습을 한 마물과 싸우고 있던 사금수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돌연 요물의 몸이 부풀어 쾅! 하고 터져나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른 마물과 싸우던 은시야차가 그것을 보고 놀라 두 날개를 펄럭이며 풍둔술을 발휘해 사라졌다.
고마의 형상이 코웃음을 치며 은시야차가 사라진 방향을 쥐었고 거대한 마수의 발톱이 허공에 나타나서 무언가를 낚아챘다.
푸른빛이 발톱 사이로 폭발하며 풍둔술이 풀린 은시야차가 나타났는데 연시의 몸이 검은 기운에 속박당해 꼼짝 못하고 있었다.
은시야차는 발톱이 몸에 닿는 순간 입에서 회색 실덩이들을 마구 분출해 폭발시켰다.
쿠콰쾅!
회색빛이 번쩍이며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마수의 발톱은 검은빛이 번뜩이며 회색빛과 폭음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은시야차는 온몸에 검은 불길이 치솟아 단단하기 그지없던 몸이 재로 변해 흩날렸다.
원신은 달아날 틈도 없었다. 이어서 마수의 발톱이 번뜩이며 다시 사라졌다.
원영 후기의 요물 두 마리가 간단히 죽임을 당하자 다른 수사들은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버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이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숨고 달아나 다음 목표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립도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를 내며 은색 뇌전으로 변해 스무 장 밖으로 물러났는데 귓가에 다급한 여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설령은 어디 있지? 어서 그녀와 융합해 령롱을 불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부 죽을 것이야!”
고마의 형상이 나타나자 화천기의 몸에 깃든 롱몽이 당황하며 은월을 찾고 있었다.
‘융합? ’
한립은 전음을 듣고 놀라 머뭇거렸다. 그때 제단 위에 떠있던 고마의 형상이 멀리 보이는 영서공작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영서공작의 오색빛이로구나! 인계에 영계의 영수가 남아 있었다니. 마침 필요했는데 그 오색빛을 좀 빌리자꾸나.”
고마의 형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멀리 달아나고 있는 공작새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에 서 씨 청년이 기겁해서 속도를 높였고 원영의 체내에 남아 있는 진원의 힘을 모두 쏟아 부었다.
팟.
오색빛이 요란하게 밝아지며 두꺼운 보호막을 두른 것처럼 공작새를 감추었다. 그러나 고마의 형상이 냉소하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허공을 쥐었다.
꽝!
거대한 울림과 함께 오색 보호막이 움푹 들어가고 공작새가 튕겨나갔는데 안정을 찾기도 전에 거대한 마수의 발톱이 허공을 가르며 낚아챘다.
“서 형!”
임은병이 그것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