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3
603화. 9층
한립은 즉시 두 개의 통천령보를 알아보았고 화선종 여인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규령이 알려줘 화선종 여인들이 지하에서 몰래 진법을 펼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전송진을 이용해 달아나는 것이 급하지 않았더라면 더 자세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여인들 중 하나가 고마 성조에게 미혹되어 조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기겁할 일은 거대 늑대는 이렇게 많은 적수들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다른 수사들이 겨우 버티거나 밀려나기를 반복하며 제단 가까이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거대 늑대가 입에서 뿜어대는 검은 기운은 마치 농밀하고 기이한 빛을 내서 만년시웅의 핏빛 기운을 제외하고는 다른 수사들은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만일 화천기와 만년시웅이 거대 늑대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거나 허공의 은색 연꽃이 없었다면 나머지 수사들은 진작 무슨 일이 터졌을 것이다.
어쨌든 은시야차의 살혼사나 사금수의 금색 파동은 마기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시선을 돌린 한립은 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거대 늑대는 마치 제단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제단 꼭대기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정말 봉인이 풀리다니! 고마가 어떻게 봉인 법기들을 풀어낸 거지?”
한립이 의아하여 고개를 돌리니 스무 장 밖에서 현청자가 중얼거렸고 그 곁에선 칠묘 진인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제야 임은병, 영서공작, 규령 등도 9층 곳곳에 나타난 것이 보였다. 방금의 공간균열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금제를 발동해 모두를 다음 층으로 이동시킨 것이 분명했다.
특히 임은병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아무래도 갑작스런 일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한립은 그들을 훑어보고는 현청자와 칠묘 진인이 바라보는 곳을 살폈다.
“……!”
한립은 자기도 몰래 눈이 부릅떠졌다. 거대 늑대 뒤쪽에 놀랍게도 몇 장 높이의 돌비석이 있었는데 보자마자 익숙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바로 질령연옥(叱靈軟玉)과 같은 진귀한 재료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회색의 투박해 보이는 비석들은 천남에서 만장 깊이의 마기의 심연에 내려갔을 때 보았던 것과 비슷했다. 다만 그때 보았던 돌비석들은 이미 조각나 있었고 멀리 보이는 것은 멀쩡했다.
비석들 중 하나에 청록색 도장이 절반쯤 박혀서 비석의 검은 빛이 흔들거렸다.
한립이 눈을 빛내 살피니 비석의 영기가 제단 곳곳에 있는 진법과 호응한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진법의 핵심은 바로 비석이었고 거대 늑대는 그것 때문에 제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지러운 상황에 그의 머리도 복잡해졌다.
“현청자, 칠묘 형! 마침 잘 와주셨습니다. 고마 성조가 제단의 봉인을 풀려 합니다. 제단이 무언가를 가두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마 성조의 뜻대로 놔둘 수는 없지요.”
목 부인은 현청자를 비롯한 한 무더기의 수사들이 나타나자 무척 기뻐했다.
“본 진인도 보았습니다. 현청 수사, 상황이 다급하니 어서 움직이시죠!”
칠묘 진인은 무표정하게 말하고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자 소매 속에서 다양한 영기의 빛이 반짝였고 일곱 개의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도, 검, 구슬, 거울 등 다양한 형태의 보물이 있었는데 구리 거울은 임은병이 빌려 사용했던 묘음보경이었다.
일곱 개의 보물들은 빠른 속도로 거대 늑대를 향해 쇄도했고, 현청자도 한숨을 쉬며 소매 속에서 노란 검을 뽑아들었다.
검은 광택이 없고 낡은 골동품 같았지만 노 도사가 입을 벌려 피를 뿜어주자 살아나기 시작했다. 용울음 소리가 울려 퍼지며 검신에 빛이 반짝였다.
노 도사는 한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두 손의 거대 늑대가 연달아 검은 마기를 분출했고 어슴푸레한 마기가 출렁이며 노란 빛과 일곱 보물들의 기운을 휘감았다. 그 속에서 빛이 터져 나오기도 하고 무언가 충돌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곧 잠잠해졌다.
노 도사가 그것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져 안색이 달려졌다.
그가 서둘러 손으로 수결을 맺어 검기를 움직이려 했으나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그때 아래쪽에 있던 마기가 용솟음치며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한립과 새로 나타난 수사들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칠묘 진인은 재빨리 수결을 맺으며 일곱 보물들을 회수했다. 하지만 현청자는 손에 들고 있던 낡은 검을 연달아 내려친 끝에 노란 검기의 장벽을 만들어 잠시 마기가 다가오는 것을 막아냈다.
노 도사가 신중한 얼굴로 중년 문사를 돌아보았다.
“칠묘 형, 일반적인 보물들로 상대할 마기가 아닙니다! 어서 그것을 사용하시지요. 봉인이 풀릴 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니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됩니다. 빈도가 호법을 서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현청 형만 믿겠습니다.”
칠묘 진인도 같은 생각인지 바로 저물대를 스쳐 손바닥만 한 비취색 원반들을 꺼냈다.
꽈광! 파칫!
그 모습을 본 한립도 수십 개의 금빛 비검들을 분출해 다가오는 마기를 흩어버렸다. 그리고 규령은 커다란 은색 도끼를 들어 호랑이 환영이 뿜어내는 노란 안개로 마기를 가까스로 막아내는 중이었다.
임은병과 서 씨 청년이 깃든 영서공작은 오색빛의 보호를 받으며 버티고 있었다. 한립은 그들을 훑어보다 미간을 좁히며 공간 중앙의 팔령척과 흑풍기를 응시했다.
두 개의 통천령보 중 하나는 잠시 마화(魔化)가 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인이 없어 진정한 위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은색 연꽃과 검은 구렁이의 다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요란하게 싸워대는 두 보물을 보고 있자니 한립도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마 성조의 화신과 거대 늑대가 아니라도 이곳에 모인 수사들이 그가 통천령보를 갖고 달아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에 한립은 그저 다가오는 공격에만 반응하고 이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거리를 유지했다. 벽사신뢰가 이상한 마기에 꽤 효과적이었지만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만 쓰기로 한 것이다.
괜히 나섰다가 고마 성조가 자신을 주시하면 큰 낭패였다. 게다가 고마 성조의 분신이 이곳을 탈출해도 대진 수도계의 문제니 그가 대신 나서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립은 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제단 쪽을 살폈다. 그런데 의식을 방출해 제단 표면에 닿자마자 정체 모를 금제에 막혀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제단 아래쪽을 훑다가 멈칫했다.
제단 백여 장 아래에서 뜻밖에도 금빛 구슬로 뭉쳐진 서금충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숨겨놓은 서금충들도 9층으로 전송된 것이 확실했다.
몰래 영충들을 풀어 놓은 것은 8층을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장벽이 가장 약한 지점을 찾도록 땅 속에 넣어 놓고는 흑풍기가 만들어 놓은 공간에 갇히며 의식이 끊겼었다.
원래는 8층 땅 밑에 있었으나 전송이 되면서 제단 아래쪽에 나타났기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한립은 거대한 제단과 도처에서 반짝이는 돌기둥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잠시 후 불현 듯 무슨 생각이 떠오른 그가 서금충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금빛 구슬은 반짝이며 허물어져 천 마리가 넘는 서금충으로 변해 흩어졌다.
땅 위의 만년시웅과 화천기 등은 틈이 날 때마다 멀리 있는 거대한 돌기둥을 공격해 진법을 없앨 수 있는지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년시웅과 핏빛 칼날이 가끔 돌기둥에 옅은 상처를 남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심지어 화천기의 거대 손 마저 돌기둥의 빛을 흔들거리게 할 뿐이었다. 시간이 많다면 그들이 부수지 못할 것은 없겠지만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돌기둥은 단단하기가 상상초월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뒤로 물러나려고 하면 머리 둘 달린 거대 늑대가 검은 기운을 분출해 마기를 북돋았고 슬금슬금 빠져 나가려는 그들을 붙들어 놓는다는 것이었다.
달아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한립은 어떻게 이곳을 빠져 나갈까 궁리 중이라 마기의 공격을 막으면서도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현청자의 비호 아래, 칠묘 진인이 다섯 개의 비취색 고리를 발동해 허공에 띄웠다. 문사는 계속 주술을 외우며 열 손가락을 튕겨 법결들을 연달아 날렸다.
다섯 개의 고리는 작아졌다 커졌다하며 울부짖더니 눈부신 영기의 빛을 반짝였다.
머리 둘 달린 거대 늑대는 대량의 검은 기운을 뿜어내 새로 나타난 수사들을 허공에 묶어두고는 다시 시선을 제단 주변의 화천기와 만년시웅에게 돌렸다.
마물의 눈에는 그 둘만이 진정한 적수였다.
화천기야 요왕의 총비인 롱몽이 깃들어 있었으니 언제든 자신과 은색 늑대의 몸을 두고 다툴 수 있었고, 갑자기 나타난 백곰 연시는 원영 후기의 수행에다 그가 지닌 핏빛 칼날이 매우 위력적이었다.
뜻밖에도 핏빛 칼날이 마기와 상극이었던 것이다.
고마 성조의 화신도 강력한 미혼술을 걸려던 여인을 제압하지 않았더라면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히 그녀에게 9층 진법을 통제할 수 있는 화룡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온 것이지 아니었다면 마기를 전부 소모하기 전에 벌써 진마탑을 떠났을 것이다.
마물은 지금 제단의 봉인에 틈을 만들어 네 발을 제단 꼭대기에 붙이고 있어 정순한 마기를 계속 보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수사들과 싸우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고 허약해져 있던 원기도 회복할 수 있었다.
마물은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이 공격해오는 적들을 대충 쳐내며 봉인이 완전히 풀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공에서 익숙한 영력이 감지되어 거대 늑대가 고개를 쳐들었다.
“금마환(禁魔環)?”
다섯 개의 비취색 고리를 본 거대 늑대의 눈에 두려운 기색이 스쳤다.
검은 늑대 머리는 경천동지할 포효성을 내지르며 입을 벌렸는데 검은 빛이 번들거리는 것이 무언가를 분출하려는 듯했다.
그 순간 허공의 칠묘 진인도 술법을 완비했는지 비취색 고리 하나를 가리켰다.
“가두어라.”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비취색 고리가 빛을 폭발하며 사라졌다.
다음 순간, 거대 늑대의 머리 위에서 비취색 기운이 번뜩이더니 괴이하게도 늑대 목에 고리가 생겨났다.
거대한 고리는 표면에서 주술이 나타나더니 수축하기 시작했고 검은 늑대 머리는 분출하던 마기도 멈추고 고통스럽게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텅!
그 결과 비취색 빛이 번지며 늑대의 발톱이 튕겨나갔다.
고리가 더욱 바짝 늑대의 목을 옥죄어 낑낑거리는 소리마저 내지 못하게 만들자 마물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 모습에 제단 주변의 수사들과 요물들이 기뻐하며 각종 신통을 부려 남은 마기에 맹공을 퍼부었다.
과연 거대 늑대가 붙잡혀 있자 마기도 위력이 크게 줄어 그들의 공격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만년시웅과 화천기가 서둘러 마기를 헤치고 중앙으로 뻗어나갔다.
은시야차와 사금수도 튀어 나가려다가 귓가에 들리는 만년시웅의 전음을 듣고는 반대로 돌기둥 쪽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돌기둥에 가까워지기도 전에 회색의 살혼사 뭉치와 금색 음파 등을 방출해 동시에 돌기둥 중 하나를 노렸다.
허공의 현청자와 칠묘 진인도 결과에 만족했다. 노도사가 검에 법력을 불어 넣은 후 마기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검기가 튀어 나와서 마기를 가르니 전방에 길이 뚫렸다.
이와 동시에 문사가 다른 비취색 고리들을 연달아 가리키니 허공에서 하나씩 사라져 늑대 다리 주변에서 번뜩였다.
쿵!
네 개의 고리가 동시에 다리를 조여오자 거대 늑대도 더는 제단 위에서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문뜩 허천전에서 얻었던 고보인 오행환(五行環)이 떠올랐다.
위력은 조금 다르지만 칠묘 진인이 거대 늑대를 속박하는 방법은 비슷했다.
‘설마 오행환이 금마환의 모조품이었나? ’
이때 놀란 현청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감히?”
이어 노 도사가 수중의 보검을 던지니 빛줄기로 변해 마기를 뚫고 나아갔다.
곁의 중년 문사도 제단의 거대 늑대를 개의치 않고 회색 기운으로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한립도 화천기와 백곰 연시가 마기를 헤치고 중앙으로 가서는 하얀 거대 손, 녹색 거대 손을 만들어 공중의 흑풍기가 변한 검은 구렁이와 은색 연꽃을 잡아채려는 것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