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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02화 (359/2,000)
  • # 602

    602화. 깨져나간 공간

    “칠묘 수사!”

    임은병이 미색 장포를 입은 문사를 보며 반갑게 외쳤다.

    “오, 임 수사셨군요. 어째서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미색 장포의 문인은 매부리코에 강한 인상을 지녔는데 그가 바로 천마종의 장로인 칠묘 진인이었다.

    천마종과 천란 성전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천란 성녀과도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 환형술을 꿰뚫어 보는데 특효인 묘음보경(妙音寶鏡)도 그가 빌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백발의 노인은 태일문 현청자였다. 늙은 도사도 여인을 보고 인사를 했으나 한립 등 다른 수사들을 보고서는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임 선자, 이분들은 누구십니까?  게다가 서 수사께서는 어딜 가시고 영수만 있는 겁니까?”

    노 도사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현청자의 말에 임은병이 영서공작을 힐끗 보며 주저했다.

    그때 영서공작의 머리 위로 빛이 반짝이며 서 씨 청년의 얼굴이 환영으로 나타나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저를 찾으시는 겁니까?  육체가 사라져서 원영을 영수에 기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럴 수가! 원영 후기의 서 형의 육체를 감히 누가 멸했단 말입니까?  설마 고마 성조의 분신이 이미 빠져나온 것입니까?”

    현청자는 크게 놀라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미 진마탑에 어떤 마물이 갇혀 있었는지 알고 오신 게로군요.”

    “서 수사, 오해는 마세요! 저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사문의 소식을 듣고 이곳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마 성조에 관한 일은 매우 중요하니 관련 정보를 나눌 수 있을까요?”

    현청자의 얼버무림에 서 씨 청년은 불만스러웠지만 이미 원영밖에 안 남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고마 성조가 풀려난 것은 맞습니다. 제 육신은 그것에 당한 것이 아니라 만요곡 만년시웅의 기습을 받아 사라졌지요.”

    “만요곡이요?  그럴 리가요. 빈도가 줄곧 봉인 결계의 틈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런 자를 들여보낸 기억이 없습니다. 설마 곤오산으로 들어오는 다른 통로가 있었단 말입니까?”

    “만년시웅은 우리 보다 먼저 곤오산에 들어와 있었고 알 수 없는 비술을 사용해 인간 수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아무 것도 모르고 당했지요!”

    서 씨 청년은 자신의 육체가 핏빛 칼날에 잡아먹히던 일을 떠올렸다.

    “정말 만년시웅이라면 서 수사가 당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만요곡에는 미형주(迷形珠)라는 이보가 있는데, 그것을 삼키면 자유자재로 용모를 바꿀 수 있고 요기나 시기를 감쪽같이 가릴 수 있다더군요. 심지어 제 묘음보경도 미형주의 신통은 깰 수 없습니다.”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미형주를 삼키면 법력에 제한이 생긴다던데요. 서 형께서 기습을 당할 때는 이미 원형을 드러냈나 봅니다.”

    칠묘 진인의 말에 현청자도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자신이 아는 바를 말했다.

    “두 분의 말씀이 얼추 맞습니다. 저도 기습을 당한 후에야 그 자가 연시였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도 만년시웅의 기습을 받고 원영이라도 살아남은 것이 행운입니다! 게다가 수사는 한 번도 남의 몸을 빼앗은 적이 없으니 돌아가 적당한 육체를 찾기만 하면 백여 년 내로 원래 수행을 회복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중년 문사가 영서공작을 보며 미소 지었다.

    “칠묘 수사께서도 알아 차리셨겠지만, 잠시 영수의 몸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 오래 이 상태로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적합한 육체를 찾아야합니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자 중년 문사는 더는 무어라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규령을 바라보았다.

    “이쪽에 계신 수사는 얼굴이 낯선데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까요?”

    칠묘 진인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으나 그녀를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어쨌든 10급 요수의 수행은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한 부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고 대신 한립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 분은 규령 수사로 저처럼 우연히 금제를 촉발해 이곳으로 전송되었습니다.”

    “금제가 촉발해 곤오산 내부로 전송되어 오다니 그런 일이 다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수사의 얼굴도 처음 뵙는 듯합니다.”

    현청자가 조용히 서 있는 규령을 보다가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 모는 일개 산수이니 저를 처음 보시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천마종 칠묘 진인과 동행하시는 것으로 보아 수사의 신분도 평범하지는 않겠지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어떻게 8층에 들어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알기로 전송진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을 텐데요.”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없었군요. 저는 태일문 현청자라 합니다. 이곳에 들어온 방법은 전송진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태일문 고유의 파계부(破界符)를 썼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후의 공간 장벽은 힘으로 깨고 나왔습니다.”

    “파계부로 공간 장벽을 깰 수 있다고요?”

    한립은 파계부라는 소리에 눈썹을 끌어올리며 의심스러운 내색을 했다.

    “부적만으로는 안 되지요. 저희 문파의 특화된 비술과 천아신검(天阿神劍)이 있어야 합니다. 빈도도 8층에 들어서자마자 또 다른 공간 장벽에 갇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현청자는 자신들이 탈출한 흑풍기의 공간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태일문 파계부와 천아신검이야 유명하지요. 저희는 속수무책으로 갇혀 있던 곳을 이렇게 쉽게 들어오시다니 정말 대진 제일의 정마 세력답습니다.”

    임은병이 부럽다는 듯 탄식했다.

    “임 선자께서는 괜히 그러십니다. 천란 성전의 보물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제가 모를까요. 다만 우연히 본문의 신검에 공간을 깨트리는 신통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현청자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겸손히 답했다. 임은병도 상대가 그저 예의를 차리느라 한 말인 것을 알았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천란 성전도 고계 수사의 수로 보면 두 종문보다 못하진 않았지만 상고 시대부터 내려오는 두 종파의 보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지, 건 노마가 들어와 있다던데요?”

    중년 문사가 돌연 주위를 살피자 서 씨 청년 과 임은병이 한립을 쳐다보았다.

    사실 화선종 목 부인이 한립이 건 노마를 죽인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상대의 실력을 보고나니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에 현청자와 칠묘 진인도 자연히 한립을 쳐다보았다. 한립은 내심 한숨을 푹 쉬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곤오전에서 본 이후 행적이 묘연합니다. 다른 곳에서 보물을 찾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저도 음라종 수사들이 보이지 않아 궁금했습니다.”

    “갈 수사와 다른 장로들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그들은 저와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엽 가 수사들의 기습을 받아 이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번에는 서 씨 청년이 무덤덤하게 그들이 어찌 되었는지 밝혔다.

    “그랬군요.”

    “곤오산은 정말 위험천만한 곳이군요. 이렇게 많은 동급 수사들이 목숨을 잃다니…….”

    현청자가 무슨 눈치를 챘는지 한립을 잠시 응시하다가 탄식했다.

    “음라종 수사들이 없는 것은 차라리 다행입니다. 괜히 무관한 자들이 설쳐대다 일이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일단 고마 성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중년 문사가 궁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칠묘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는 엽 가와 고마 때문에 이곳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이 일은 수도계 전체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현청자도 나서서 거들었다. 그 말을 듣고도 서 씨 청년과 임은병이 바로 입을 열지 못하고 표정이 묘했다.

    아무래도 금제가 걸려 있다 보니 한립의 생각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떠들어 대기가 꺼려졌던 것이다. 규령 역시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현청자와 칠묘 진인은 평온한 표정의 한립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다들 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분이 고마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니,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 수사께서 말씀을 해주신다면야…….”

    쿠콰콰콰쾅!

    현청자가 인자한 낯으로 대답하려는데 궁전 쪽에서 경천동지할 진동이 들려오며 열댓 개의 우윳빛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이에 현청자는 안색이 변해 곧장 입을 다물었다.

    8층 전체가 미친 듯이 흔들리며 땅이 갈라지고 허공에서 하얀 빛이 번뜩였다. 마치 공간 자체가 왜곡되며 변형되는 중인것 같았다.

    “이런, 고마 성조가 벌써 9층 봉인을 개방하려하나 봅니다! 그럴 수 없을 텐데 어찌!”

    칠묘 진인이 놀라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9층 봉인? ’

    한립은 그 말을 듣고 이상하다 여겨 서둘러 원강순을 발동해 은색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가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궁전에서 솟아 오른 열댓 개의 빛기둥이 돌연 먹물처럼 까맣게 변하더니 사방팔방으로 꺾여 날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도처의 균열에서 일어난 하얀빛과 검은빛이 섞여 기묘하게 반짝였다.

    “공간균열!”

    이번만큼은 한립도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한 손을 뒤집어 새빨간 부적을 불러냈고 그것을 몸에 붙이자 적황색의 교룡의 환영이 몸에 깃들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별안간 반인반교의 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임은병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모두가 새까만 균열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검은 빛이 번뜩인다고 생각한 순간에 이미 어둠에 잡아 먹혀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었다.

    공간균열에 삼켜졌던 경험이 있던 한립은 공간균열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강령부로 육체를 강화하고 원강순에 최대한의 법력을 쏟아 부었다.

    그 나름대로의 최선의 대비를 한 것이다.

    그러나 어둠은 오래가지 않았고 곧 눈앞이 밝아지며 낯선 공간이 나타났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한립은 곧 냉정을 회복하고 주위를 돌아보다가 가슴이 서늘해졌다.

    ‘9층!’

    이곳은 독립된 공간으로 가운데에 거대한 공터가 있었다. 허나 도처에 노르스름한 기운이 출렁거려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나타난 허공 아래쪽에는 백여 장 높이의 거대한 제단이 있었는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네모난 형태였고, 사면의 계단을 이용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백옥으로 만들었는지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게 세공된 제단이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거대한 돌기둥들이 우뚝 서서 초대형 진법을 형성했고 각 돌기둥은 엄청난 빛을 발산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제단 꼭대기에 앉은 산만한 머리 둘 달린 늑대였다. 검은 늑대 머리는 검은 기운을 마구 뿜어대며 주변에 있는 적수와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8층에서 사라졌던 수사들과 요물들이었다.

    화천기의 몸에 깃든 롱몽 요비가 두 팔을 춤추듯 움직이며 거대 손을 이용해 검은 기운을 밀어냈다. 만년시웅, 은시야차 등의 요물은 전부 보였는데 유일하게 엽 가 대장로와 대두 괴인만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죽은 것인지 아니면 아직 9층에 이르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중에서 한립의 눈길을 끈 것은 거대 늑대 옆에 서 있던 인간 수사였는데 놀랍게도 화선종 여인이었다.

    검은 기운이 드리운 멍한 얼굴로 보물을 발동해 분노한 얼굴의 목 부인과 싸우고 있었는데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각자 신통을 발휘해 거대 늑대를 필사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거대 늑대 머리 위로 노란 바람이 넘실거렸는데 그 안에서 검은 교룡이 나타나 입에서 검은 바람을 뿜어 거대한 은색 연꽃에서 나타난 여덟 마리 영수의 환영을 막아냈다.

    허공에 떠서 꼼짝 않고 있던 은색 연꽃에서 요란한 빛이 터지며 불경의 글자들이 꽃잎을 타고 흘러넘쳤다.

    불경의 글자들은 각각 손바닥만 한 부적으로 변해 검은 교룡이 토해낸 검은 바람과 부딪쳤는데, 그때마다 폭음이 연달아 들리며 흉흉한 기세의 검은 바람을 흩어버렸다.

    흑풍기와 팔룡척 사이의 대대적인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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