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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01화 (358/2,000)

# 601

601화. 성수의 인(印)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전음으로 규령에게 무언가를 물었고, 잠시 놀라던 규령도 바로 전음으로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 되었으니 받으시지요.”

영서공작이 입을 벌려 하얀 빛을 뿜어냈다. 이에 한립이 눈을 빛내며 소매를 털었고 푸른 기운이 나가 그것을 잡아왔다.

빛이 가시고 나자 손바닥 크기의 하얀 옥간이 드러났다. 그는 주저 없이 한 손을 올려 의식을 불어넣었다. 처음에는 무표정하던 얼굴이 나중에는 놀람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장장 일다경이 지나 의식을 불러낸 한립이 가볍게 탄식했다.

“서 수사, 이것은 돌올인 선조께서 만드신 방법입니까?  살펴보다보니 감탄스러울 뿐이군요! 기운을 불어넣는 관주법(灌注法)과 천지의 영력을 이용해 강제로 영충의 체내에 오행 영기를 불어넣어 진화를 촉진하다니……. 이런 방법을 생각해낸 수사가 평범할 리 없겠습니다. 엄청난 고생을 하며 일일이 실험을 해야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요.”

“성전은 서금충 알을 얻은 이후 영충 배양에 특화된 장로를 통해 진화 방법을 연구해 왔습니다. 장장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서야 겨우 완성한 비결이지요. 안타까운 것은 서금충 알이 매우 희소하고 필요한 재료가 진귀해 대규모 서금충 무리를 배양하지는 못했습니다.”

한립은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신비한 병과 예상초의 기이한 효과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절대 이렇게 많은 서금충 무리를 키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좋습니다. 두 분을 구해드렸고 법결도 전수 받았으니 거래는 마친 것으로 하지요. 이제 선택하십시오. 알아서 자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윤회의 길로 돌려보내 드릴까요?”

돌연 한립이 안색을 굳히며 흉흉한 기세를 드러냈다.

쿠르릉 쾅쾅!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에서 은빛 날개가 나타났고 두 주먹에서는 벼락 치는 소리가 울리며 금빛 뇌전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영서공작 뒤에서는 은빛이 번뜩이며 인간형 꼭두각시가 소리 없이 나타나 영수를 겨냥했다.

영서공작은 화들짝 놀라 두 날개를 펼쳐 오색빛 속으로 숨어들었는데 뜻밖에도 노란빛에 휩싸인 원영이 영수의 입에서 빠져나와 그 머리에 앉았다.

“수사! 그만 두십시오. 우리 천란과 수사는 아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친분을 쌓아갈 여지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설마 나머지 대선사에게 추격당할 일이 조금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천남에 두고 온 종문과 후인들에 대한 배려도 없으시고요?”

“그런 말씀을 하시면 거꾸로 제가 대선사들을 추격해 멸살할 수도 있습니다.”

한립의 표정이 음산해졌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처음 저와 성녀가 수사를 추격한 것은 수도계가 본래 강자존(强者尊)의 법칙대로 흘러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영 중기 산수가 홀로 초원에 나타나 고계 수사들을 많이 죽였으니 반드시 본보기를 보여야 했지요.

나중에는 성수의 분신까지 가져갔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요! 수사는 두 명의 원영 후기 수사를 부리시고 본인도 대수사에 맞먹는 신통을 지녔으니 저희 천란 성전과 대등하게 교류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게다가 곤오산의 형세가 심상치 않은데 더 많은 수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살아나갈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말씀 다 끝나셨습니까?”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서 씨 청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놔드릴 수는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 저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는 천란의 약속을 믿게 하실 것입니까?  설마 위기에 처해 늘어놓는 감언이설이나 목숨을 건 맹세 따위는 아니겠지요?”

“그럴 수야 없지요! 이곳에 천란 성녀께서 계시니 비술로 천란 성수(聖獸)의 진령을 소환해 성수의 인(印)을 심어드리겠습니다. 거기다 수사를 우리 천란 성전의 객경장로로 삼고요! 수사께서 성수의 분신만 돌려주시면 저희도 성전으로 돌아가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한립의 조소에 서 씨 청년이 서둘러 말했다.

“성수의 인이라면 초원을 지나는 동안 들어보았습니다. 성수의 인이 심어진 선사들은 성전의 핵심 인물들이라고요. 서로를 죽일 마음을 품으면 성수의 인이 발작하는 괴상한 저주인데, 저주에 걸린 수사는 오랜 세월 의식을 바늘로 찔리는 듯한 고통을 당하며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저희 사이가 악화된 원인도 성수의 분신 때문이 아닙니까.”

서 씨 청년이 한립을 설득했다.

한립이 말없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서 씨 청년의 원영은 불안한 기색으로 기다렸다. 상대가 지금 그들을 죽이려 한다면 겨우 원영만 남은 그는 달아날 기회도 없이 이곳에서 끝이 날 것이다.

원영 후기 대선사는 살얼음판을 걷듯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천란 성전의 보복은 두렵지 않으나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들고 싶지는 않군요. 다만 성수의 인을 심고 성전에 들어가는 것은 거절하겠습니다. 성수의 인에 어떤 기괴한 효과가 있을 지도 모르는데 괜히 화근을 품고 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성전에서 먼저 저를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면 저도 가만히 있겠습니다. 허나 또 다시 저를 건드린다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한립이 청년의 원영을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그야 지당한 말씀입니다! 수사의 실력을 보고 건드릴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제 천란 성녀를 놓아주시겠습니까?”

한립의 긍정적인 답변에 서 씨 청년이 기뻐했다.

“아직 기뻐하시기는 이릅니다. 제 조건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어떤 조건인지 말씀 하시지요.”

“성수의 분신을 돌려줄 수는 있지만 지금 바로는 안 됩니다. 아마 몇 년 후에나 가능하겠군요. 물론 성수의 분신은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하지요.”

“성수의 분신을 돌려줄 수 없다고요?  그, 그것은 조금…….”

“아직 두 번째 조건이 남아 있습니다. 천란 쪽에서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수사와 성녀의 원영에 금제를 심어 놓겠습니다. 상대를 조종하는 금신술(禁神術)은 아니니 안심하시고요. 어차피 우리 같은 경지에 이른 자들은 금신술로는 별로 효과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저 우연히 얻은 상고 비술인 질념진뢰(叱念眞雷)를 걸어 놓을까 합니다. 제 신념이 어린 단약을 한 알만 삼키면 됩니다.”

한립은 주저하는 청년의 말을 끊고 유유히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질념진뢰라니, 절대 안 됩니다!”

“원치 않는다면 두 분은 바로 저 세상으로 가셔야지요. 그리고 소식이 퍼지기 전에 천란 초원으로 넘어가 남은 대선사들을 전부 죽이고, 천남의 모란인들에게 귀띔을 해줘야겠군요! 그럼 아마 모란족 수사들은 기쁜 마음으로 당장 초원으로 달려갈 겁니다. 그때 가서 돌올인들의 씨가 말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감히 그런 짓을!”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지 없을 지는 수사가 더 잘 알겁니다. 어차피 성수의 인을 심으려 한 것도 결국 제 손발을 묶어 두려는 것 아닙니까?  성수의 인을 이용해 수사 하나쯤 구속할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허나 저는 누군가의 통제를 받는 것을 꺼려해서 말입니다. 수사가 질념진뢰를 삼키지 않겠다면 그냥 이 기회를 빌려 모두를 죽이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하겠습니다. 제 다섯 손가락이 굽어지는 순간 동의한 것으로 알고 그렇게 하지요. 하나!”

한립이 말이 끝나자마자 숫자를 세며 엄지를 접었다.

“그럼 우리는 당신이 질념진뢰를 이용해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어찌 장담합니까!”

“당장 죽이는 것도 가능한데 굳이 단약을 낭비하면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둘!”

“하지만…….”

원영은 거대 공작의 머리에 앉아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빠져나갈 다른 방법이 없는지 생각 중인 듯했다. 하지만 규령이 영서공작을 막고 노려보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세 수사의 철통 방어에 원영인 그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넷.”

한립은 이미 네 번째 손가락을 접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새끼손가락뿐이었다. 동시에 규령과 인간형 꼭두각시가 기세를 끌어올려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한립도 그저 한 손을 뒤집어 삼염선을 꺼냈을 뿐인데 벌써 삼색빛이 흘러나오며 봉황의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색빛 속에 숨어 있던 청년의 원영은 핏기가 가셨지만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한립의 입술이 움직였고 당장이라도 마지막 숫자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겠습니다! 원영에 금제를 거시지요!”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읊어댔다.

한참 후 안색이 창백해진 그의 미간 사이로 콩알만 한 단약이 빛에 휩싸여 청년의 원영으로 날아갔다.

서 씨 청년은 이를 악물고 두려운 듯 하얀 빛덩이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반짝이는 오색의 빛을 보니 상고 시대부터 내려오는 질념진뢰가 맞았다.

질념진뢰가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오자 서 씨 청년이 한립의 서늘한 시선을 받으며 보호막을 거두자 하얀 빛덩이가 순식간에 원영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청년은 서둘러 의식을 이용해 원영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안심히 되기는커녕 더욱 불안했다.

질념진뢰는 수사의 의식을 응결해 낸 것이라 자유자재로 흩어버리거나 무형으로 되돌릴 수 없다고 했는데 사실 같았다.

무형의 의식을 어떻게 없앤단 말인가!

“억지로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상고 비술이 그렇게 쉽게 제거될 리 없으니까요. 얌전히만 지낸다면 저도 금제를 촉발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원영의 얼굴빛이 나빠졌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정신을 잃은 천란 성녀를 보고는 잠시 주저했으나 곧 한알의 질념진뢰를 여인의 원영에 흡수시켰다.

“우리를 살려준 후에도 계속 금제를 빌미로 협박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서 씨 청년이 계속 원영을 훑어도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자 불만스레 물었다.

“협박이라?  그렇다고 치지요. 하지만 곤오산에서 힘껏 협력해 준다면 이곳을 나간 후에는 각자 갈 길을 가면 됩니다. 당신들은 초원으로 돌아가 천란 장로와 성녀의 일을 하고, 나는 천남으로 돌아가 계속 수련을 하는 거지요. 질념진뢰는 3, 4백년 정도면 알아서 효과를 잃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3, 4백 년……!”

담담한 한립의 말에 서 씨 청년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했으니 어서 움직이시죠.”

한립은 아직도 기절해 있는 임은병을 힐끗 보고 소매를 저었다. 푸른 기운이 날아가 여인을 감싸니 임은병의 눈꺼풀이 꿈틀꿈틀하다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옆에 있는 한립을 보고 놀라 곧바로 열댓 장 밖으로 몸을 날렸고, 입에서 은색 비검을 분출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임 수사,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서 씨 청년의 원영이 혹시나 임은병이 경거망동을 할까 두려워 급히 전음을 보냈다. 이에 한립은 그저 뒷짐을 지고 무표정하게 지켜볼 따름이었다.

규령은 그의 옆으로 돌아왔고 인간형 괴뢰는 다시 한 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동안 천란 성녀는 자신이 질념진뢰의 금제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당황스러운 듯 눈빛이 흔들렸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갑자기 쿠콰쾅! 하는 굉음이 들려오며 공간 전체가 극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곤 그들이 갇혀 있던 공간 장벽 속에서 굵직한 검기가 튀어 나와 허공을 선회해 떨어져 내렸다. 장벽에 한 장 크기의 구멍이 뚫리자 두 개의 빛줄기가 빠져나왔고 빛이 가시고 보니 도사와 유생의 복장을 한 수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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