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
600화. 영수와 원영
요물이 법력 손실을 감수하고 수결을 맺자 핏빛 칼날의 빛이 배로 늘어나 거대한 악귀의 얼굴로 변해버렸다. 악귀는 커다란 입으로 황급히 피바다 속에 갇혀 있는 서 씨 청년을 한 입에 삼킬 작정이었다.
그가 악귀로 변하자 주변의 핏빛 안개가 파도가 치듯 출렁거렸다. 꼼짝없이 죽게 생긴 서 씨 청년이 놀라 푸른 구슬과 은색 갈고리 보물을 이용해 악귀 얼굴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악귀는 핏빛 실뭉치를 뱉어내 두 개의 보물을 옭아맸고 그대로 삼켜 버려 서 씨 청년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악귀가 다시 입을 벌렸을 때는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음산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를 보고 서 씨 청년은 이를 악물자 체내의 원영이 두 눈을 부릅뜨며 육체를 빠져나오려 했다.
꽈광!
그때 돌연 금빛 뇌전이 멀리서 날아들어 악귀를 공격했다.
쾅!
또 다시 금빛이 퍼져나갔다. 이에 악귀는 순식간에 절반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악귀는 포기하지 않고 서 씨 청년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붉은 빛으로 휘감아 서 씨 청년을 단번에 삼키려는 것이었다. 서 씨 청년도 빠르게 핏빛에 잠식당하는 것을 느끼고 다급하게 주술을 읊어댔다.
그러자 아직 잠식당하지 않은 육체에서 노란 빛이 터져 나오며 폭발했다. 핏빛이 노란 광선에 구멍이 뚫려나가는 동안 키가 몇 촌 밖에 안 되는 원영이 열댓 장 밖의 허공으로 순간이동을 하며 번뜩였다.
노란 보호막을 두르고 빛줄기로 변해 달아나려 한 것이다.
“어딜 가려고?”
만년시웅이 콧방귀를 뀌더니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원영의 머리 위에서 검은 빛이 번뜩이며 거대한 손이 날아들었다.
이에 서 씨 청년은 절망했다.
원영 후기인 그는 원영을 이용해 순간이동을 할 수도 있고, 몇 가지 현묘한 비술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핏빛 기운을 빠져나오느라 무리를 한 탓에 법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 한립은 수십 장 밖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의 차분한 얼굴은 금빛 뇌전 공격 후에도 도와줄 의사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서 씨 청년은 그에게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남은 법력을 맹렬히 움직여 원영의 입에서 금속의 영패를 분출했다.
서 씨 청년이 본명 법보로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 찰나, 갑자기 허공에 그림자가 나타나 한 손을 들어 올리니 울음소리가 들리며 녹색빛이 번뜩였다. 녹색빛은 금빛을 머금고 극히 빠른 속도로 검은 기운이 변한 거대 손을 공격했다.
콰쾅!
거대 손은 금빛의 공격에 구멍이 뚫린 채 가느다란 뇌전에 휩사여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은빛 속의 인물이 열댓 장을 단숨에 뛰어넘어 서 씨 청년의 원영 가까이 다가왔다.
죽기 일보 직전에 살아난 서 씨 청년의 원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할 것도 없이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목숨을 구해줬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원영을 남의 손에 넘길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은빛 속의 인물은 달아나는 그를 본체만체 하며 멀리 떠 있는 만년시웅을 바라보았다.
이때 영서공작이 서 씨 청년의 명을 받아 갑자기 몸을 털어댔다. 그리고 꼬리 깃털 몇 개가 단번에 뽑혀 날아가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오색빛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사금수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보라색 안개가 오색빛의 폭발로 와해되었고 몇 장 크기의 거대한 공간이 생겨났다.
이 틈을 타 영수는 기이한 궤적으로 보라색 안개를 빠져나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서 씨 청년의 원영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그 모습에 서 씨 청년도 크게 반가워하며 영수에게 날아갔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영수가 입을 벌려 서 씨 청년의 원영을 삼키더니 남은 꼬리 깃털을 바짝 치켜세운 것이다.
오색빛이 찬란하게 분출되며 영서공작이 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같은 시각, 은시야차와 임은병이 교전을 하고 있을 때 흑백의 기운이 불쑥 끼어들었다.
은시야차는 규령을 보자 즉시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규령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그를 보더니 입을 달싹여 전음을 보냈다.
이에 은시야차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천란 성녀를 가두고 있던 살혼사를 회수했다.
살혼사가 사라지자 희색이 만연해 달아나려던 임은병 앞에 이번에는 규령이 몸을 번뜩이며 나타났다.
규령의 갑작스런 공격에 천란 성녀가 식겁해서 즉시 손수건 보물을 이용해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기이한 빛이 번뜩이며 도끼에서 뿔이 달린 거대 호랑이의 환영이 뿜어져 나와 그녀를 덮쳤다.
촤작.
손수건은 은빛 속에서 두 조각으로 찢겨 졌고 호랑이의 환영은 노란 기운으로 변해 그녀를 휘감았다. 임은병이 불길한 직감을 느꼈을 땐 이미 고개를 떨어뜨리고 쓰러지고 말았다.
규령은 거침없이 수결을 맺어 노란 기운으로 그녀를 꽁꽁 감쌌다.
그 후 흑백의 기운이 용솟음치며 임은병과 함께 사라졌고 잠시 후 한립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뜻밖에도 만년시웅은 그들이 하는 것을 지켜볼 뿐 나서지 않았다.
인간형 꼭두각시 역시 규령 다음으로 몸을 날려 한립의 뒤로 돌아갔다. 한립은 생포한 천란 성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신기하다는 얼굴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오색 빛을 찬란하게 빛내며 이전보다 배는 커진 영서공작이 있었다.
“한 수사! 뭐하시는 겁니까? 무슨 의미죠?”
오색 빛 속에서 서 씨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보다 훨씬 굵고 탁하며 흉포한 기운이 서린 목소리였다.
“별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수사를 도와 임 수사를 구해낸 것뿐이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한립의 말에 서 씨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오색빛이 옅어지며 기묘한 모양을 드러냈다. 영서공작은 크기가 커졌을 뿐 아니라 머리 위로 사람의 얼굴을 둥둥 띄우고 있었는데 바로 서 씨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임은병을 보며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임 수사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다만 몇 가지 조건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설마 저를 실망시키지는 않으시겠지요?”
“지금 저를 위협하는 겁니까!”
“위협은 아니지요. 아까 스스로 약조하신 바를 잊으신 겁니까? 임 수사를 곁에 둔 것은 만일을 대비해서입니다.”
한립이 냉소하며 음산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무엇이든 좋으니 일단 저 요물들을 쫓아 버리고 다시 이야기 합시다!”
“좋습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으니까요.”
서 씨 청년의 제안에 한립이 턱을 쓰다듬으며 동의했다. 별 일 아니라는 듯한 그의 태도에 서 씨 청년은 당황스러웠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규령에게 무어라 분부하고는 인간형 꼭두각시와 나란히 날아올랐다.
피바다 인근에 이르자 한립이 만년시웅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만요곡 부곡주께서 이곳까지 오신 데에는 곤오산에 중요한 볼 일이 있어서겠지요? 저 수사들은 제가 필요해서 데려갈까 하는데 말리시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말투만 상의를 하러 온 것이었지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수사는 한립이라 불리는 천남 수사가 맞습니까?”
한립의 강경한 태도에 은시야차와 사금수가 내심 분노하는데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만년시웅이 뜻밖의 질문을 했다.
일순 표정이 굳은 한립이 곧 태연히 물었다.
“맞습니다. 어찌 나중에 천남을 찾아 복수라도 하시려는 것입니까?”
“복수 같은 것에는 흥미 없습니다. 이번에는 한 형이 천란 수사들을 원하시니 내드리지요. 허나 이번 한 번 뿐입니다! 또 다시 우리 만요곡의 일을 막아선다면 아무리 저 둘의 도움이 있더라도 살아서 대진을 빠져 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만년시웅의 눈에서 녹색 화염이 일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립이 입술을 꿈틀했지만 그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년시웅이 차분히 수결을 맺어 핏빛 기운을 향해 손을 뻗자 핏빛이 반짝이며 허공에서 선회해 거대한 칼날의 모습으로 피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진득한 핏빛 기운들 속에서 한립에 의해 흩어졌던 악귀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악귀가 섬뜩한 웃음을 짓더니 입을 벌려 피바다를 몽땅 흡수해버렸다.
그러나 핏빛 칼날이 더욱 짙어져 피비린내를 풍기자 속이 매스꺼웠다. 만년시웅이 은시야차와 사금수에게 무어라 하더니 바로 궁전 방향으로 날아갔다.
세 요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전 속으로 사라졌는데 무슨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만년시웅이 무슨 말로 은시야차를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 요수가 사라지자 한립이 고개를 돌려 뒤쪽의 영서공작을 향해 물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해볼까요?”
“말해보시지요.”
서 씨 청년이 인간형 꼭두각시와 규령의 수중에 떨어진 임은병을 살피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수사의 말을 들으니 서금충을 성체로 진화시키는 데 무슨 비결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제가 알기로 상고 기충은 오래 전부터 명성이 자자했고 부리는 주인 없이도 무엇이든 갉아먹고 죽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천란 성전의 서금충도 상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영충의 알을 이어받아 키워낸 것이겠지요.”
“수만 년을 기다릴 수 있다면 서금충은 분명 천천히 성체에 이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수사들은 수명이 제한되어 있으니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야 없지요. 아무리 가문이나 종파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 해도 수만 년을 버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서금충은 마지막 단계에서 진화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지요. 수사께서도 영충을 기르시니 알겠지만 성체와 아닌 것의 차이는 천양지차입니다.”
“맞습니다. 제 서금충 역시 지금 상태에 이르고 나서는 최근 몇 년간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천란 초원에서 서금충을 성체로 배양하는 방법을 사용하면 진화 기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습니까?”
“거의 3분의 1로 줄일 수 있지요. 게다가 진귀한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면 더 빨리도 가능합니다.”
“3분의 1! 이번에 나선 보람이 있습니다. 허나 제가 서금충 성체 진화의 비결을 알게 되면 앞으로 어찌 상대할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농담도 잘하십니다! 한 형의 서금충 무리는 이미 제가 상상할 수 없는 규모더군요. 하지만 성체의 진화는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비결을 얻어가도 수 천 년은 배양해야 가능할 거란 이야기지요. 수천 년 후의 일을 제가 지금 걱정할 까닭이 있을까요?”
한립이 묻는 말에 서 씨 청년이 솔직하게 답했다.
“허심탄회하십니다. 수 천 년 뒤에는 서금충이 누구 손에 있을지는 알 수 없지요. 게다가 천란 성전이 미리 대책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고요.”
한립이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 생각하셔도 별 수 없지요. 그럼 이 비술을 원치 않으십니까? 조건을 바꾸는 것은 제 쪽에서도…….”
“원합니다. 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이번 생에 성충으로 진화하지 못한다고 해도 비술을 익혀 두면 다른 영충을 배양하는데도 참고가 될 테니까요. 제가 영충을 기르는 데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서요.”
“좋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옥간에 비술을 복제해 드리지요. 오랫동안 영충을 길러 오신 분이니 단번에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아보실 겁니다.”
서 씨 청년은 의아하다는 표정이 스쳤으나 고민 없이 답했다. 하얀 빛이 번지며 허상으로 만들어진 얼굴이 영서공작 체내로 사라졌다.
한립은 미소를 지었고 기다리는 동안 멀리 있는 궁전을 바라보았다. 세 요물이 들어간 뒤로 여전히 고요하기만 한 것이 오히려 기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