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9
599화. 돌변
진법에서 엄청난 빛이 터져 나오자 허공의 열댓 마리 교룡들이 미친 듯이 꿈틀거리더니 몇 배로 불어난 몸뚱이로 전방을 향해 뻗어나갔다.
콰콰콰쾅!
열댓 마리 교룡이 한 마리씩 공간 장벽을 향해 몸을 내던진 것이다. 그러자 회색의 장벽이 극심하게 흔들렸고 드디어 형태도 왜곡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교룡이 장벽에서 폭발하고 거대한 바람과 화염 덩어리로 변하자 핏빛이 번뜩이며 핏빛 칼날이 같은 곳을 갈랐다.
쨍!
귀가 먹먹할 정도로 강한 울림이 들려왔다. 장벽에 한 줄기 금이 간 것이다. 하지만 구멍은 뚫리지 않았고 바로 다시 검은 빛을 발산하며 틈을 메우려 했다. 이에 서 씨 청년과 은시야차 등이 공격을 퍼부어 겨우 틈이 메워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그때 한립이 나섰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거검이 금빛 뇌전을 번뜩이며 매섭게 공간 장벽의 틈을 갈랐다. 금빛 뇌전과 빛이 번뜩이니 작은 태양이 뜬 것처럼 주위가 밝아졌고 한 장 길이의 틈이 순식간에 녹아내려 몇 배로 커졌다.
그 모습에 다른 수사들은 물론이고 한립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
마치 벽사신뢰가 장벽과 상극이라도 되는 듯 했다. 설마 흑풍기가 마도의 보물이었단 말인가?
금빛이 가시자 장벽 바깥에서 옅은 빛이 투과되었다. 다른 이들이 법보를 발동해 공격하려는 순간 짧은 검은 비도가 소리 없이 균열을 베고 사라졌다.
마지막 남아있던 얇은 장막마저 쾅 소리를 내며 깨져나가 몇 장 크기의 구멍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익숙한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다들 기뻐하고 있는데 은빛이 번뜩이며 누군가 장벽 앞에 나타나 가장 먼저 구멍을 빠져나갔다. 바로 한립의 꼭두각시였다.
그러자 잠시 주저하던 다른 수사들도 서둘러 각종 둔술을 펼쳐 출입구로 날아들었다.
한립도 등에서 은색 날개를 펼치며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
이미 흑백의 기운으로 변해 장벽 앞까지 이르렀던 규령이 의아한 얼굴로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가 지체한 탓에 서 씨 청년과 다른 요수들이 먼저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돌연 장벽 바깥에서 날카로운 핏빛이 번뜩이더니 서 씨 청년의 고함 소리와 임은병의 다급한 교성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진득한 피비린내와 사산 진인의 웃음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갑시다!”
한립이 그제야 은색 날개를 펄럭여 은빛 뇌전으로 변해 구멍을 빠져나갔다. 아직도 의아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규령이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한립이 장벽 바깥에 나타난 순간 도처에서 무수히 많은 핏빛 기운들이 덮쳐왔다. 그러나 이미 대비를 하고 있던 그는 멈추지 않고 몇 번이고 은빛을 번뜩이며 이동해 핏빛 기운이 미치는 범위를 벗어났다.
신형을 멈추고 자신이 나온 구멍 입구를 바라보던 그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구멍 바깥은 이미 피바다로 변해 있었다. 농염한 기운 속에 무언가가 유유히 떠다녔는데 그것은 바로 은시야차와 사금수, 그리고 온 몸이 새하얀 털로 뒤덮인 커다란 괴물이었다.
괴물은 사산 진인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기(尸氣)가 하늘을 찔렀고 녹색 눈에 흉악한 이를 드러낸 말라비틀어진 백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괴물은 핏빛 칼날로 누군가를 궁지로 몰고 있었는데 바로 천란 초원 대선사인 서 씨 청년이었다. 그는 팔 하나와 다리를 잃고도 푸른 구슬과 은색 갈고리 법보로 곳곳에서 덮쳐드는 핏빛 기운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영서공작이 사금수가 변한 보라색 안개에 휩싸여 있었는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임은병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는데 은시야차가 방출한 살혼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중이었다. 만일 은색 누에가 수놓아진 손수건의 신통이 대단하지 않았다면 벌써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천란 선사들 쪽이 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저건!”
한립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규령이 하얀 털의 괴물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아는 연시(煉尸)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무어라 답할까 고민하던 규령은 사실대로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연시가 되기 전에 그저 평범한 영수였을 때 친분이 조금 있었습니다. 저자의 주인 역시 영계에서 내려온 인간 수사였거든요. 곤오산에 봉인된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는데 연시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저 자의 육체도 본래 영계 요수였단 말이군요.”
“그렇지요. 영계에서 내려오는 수사들이 수행에 제한이 있듯 영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계로 내려오며 그 전의 기억을 지워버렸죠.”
규령이 탄식하듯 설명했다.
“기억을 지우면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까?”
한립은 놀라기도 했고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시간이 나면 규령에게 영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것이다.
“자신이 영계 출신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규령도 안타까웠다. 한립은 침묵하다가 갑자기 은월을 떠올렸다. 은월은 특수한 신분이니 상황이 다를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불현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봉인된 공간을 빠져나왔지만 이곳도 어딘가 괴이했던 것이다. 텅텅 빈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궁전 위의 팔령척이나 그들과 싸우던 고마 성조의 흑풍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쉽게 공간 봉인을 빠져나올 수 있다 했더니 이유가 따로 있었다.
사방에 거대한 구덩이나 깊은 골짜기가 파여 있어서 거대 요수가 발톱을 세워 패악을 부린 것 같았고 궁전도 절반이 부서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궁전 잔해를 의식으로 훑어보았지만 아직도 기운을 단절하는 금제가 발동하고 있어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그도 안심할 수 있었다. 사실 원살 성조는 적으로 만나기에 너무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유일한 출구인 전송진이 흑풍기로 만들어낸 공간에 막혀 있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았다. 한립은 눈을 빛내며 어찌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수사, 저와 서 형을 구해주신다면 그간의 시시비비는 가리지 않겠습니다. 천란 성녀의 이름으로 천란 초원과 수사의 은원은 없었던 것으로 하지요!”
이때 지칠대로 지친 임은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다급하게 한립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돌올인들에게 쫓겨 다녔는데 은원을 없앤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저는 도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단칼에 거절했다.
“한 형, 우리가 대진에 온 것이 무엇 때문인지 잊으셨습니까? 저와 서 선사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나머지 대선사께서가 수사를 가만히 둘 것 같냐는 말씀입니다!”
임은병의 협박에 한립이 피식 웃으며 피바다 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수건에서 은빛이 거세지며 일순 살혼사를 밀어내고 있었으나 안색이 창백한 것이 강제로 법력을 끌어올리는 비술을 사용한 것 같았다.
서 씨 청년은 가장 먼저 기습을 받고 피바다에 갇혀서인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그나마 상황이 가장 나은 것은 전신에서 오색의 빛을 반짝이는 영서공작이었다.
상고 영수는 보라색 안개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반대로 사금수도 그것 때문에 발이 묶여 있었다. 사금수의 가장 강력한 신통인 금색 파동이 오색빛에 맥을 못 추었던 것이다.
“임 선자께서 무슨 말을 하신다 해도 도와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두 분이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다면 저라도 나서서 끝을 내드릴 생각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대선사 세 명이야 찾아오면 상대해 주면 그만입니다.”
한립은 차분히 답했다. 그는 인간형 꼭두각시와 규령의 도움이 있다면 원영 후기 세 명이 달려들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천란 초원 대선사들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죄다 그를 찾으러 날아올 리도 없었다. 대선사들이 천란 초원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모란인들이 즉시 돌올인들을 전멸시켜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일족의 명운과 복수 사이에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한립에게 천란 성녀의 협박이나 부탁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시가 한립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웃어댔다.
“역시 한 수사께서 물정에 밝으십니다. 제가 한 형을 공격한 것도 아닌데 굳이 나서실 이유가 없지요! 당신들은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얌전히 목숨이나 내놓으십시오.”
연시가 서 씨 청년과 임은병을 향해 소리치는 것을 보며 한립은 속으로 냉소했다.
공간 장벽 안에서 사산 진인이 비술을 이용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순간, 영수대 속의 제혼이 즉각 알아차린 것이다.
그가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는데 사산 진인이 몰래 은시야차와 전음을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립은 웬만한 원영 후기 수사보다 훨씬 강력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하얀 털의 연시가 뜻밖에도 은시야차에게 봉인 밖을 나가자마자 인간 수사들을 공격하자는 내용이었다. 단 누구를 공격할지는 정하지 않았는데 서 씨 청년과 임은병이 먼저 빠져나오다 재수 없게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러니 한립도 어느 정도는 연시에게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처음 보는 연시였지만 원영 후기의 수행에 저런 모습을 지닌 연시 요물이라면 그는 분명 만요곡의 만년시웅(万年尸熊)일 것이다.
만년시웅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대진 요족 중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요물이었다. 또한 만요곡은 대진에서 태일문, 천마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 세력으로 그곳의 부곡주가 직접 이곳에 나타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산 진인이란 수사가 본래 있어 그를 처리하고 그자의 행세를 한 것인지, 아니면 만년시웅이 만들어낸 화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요물이 수련한 은닉 공법이 워낙 특수해 한립도 그의 진짜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한립은 멀리 피바다를 바라보며 전신에 가득 시기를 뿜어내는 만년시웅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비록 천란 성전 수사들을 구해줄 마음은 없었지만 핏빛 칼날이 원영 후기 수사의 피와 살을 삼키고 위력이 급증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서 씨 청년이 죽는 순간 그가 나서서 핏빛 칼날을 회수할 생각이었다. 저렇게 사악한 물건은 언제든 적으로 마주칠 수 있기에 손에 넣는 게 낫다.
냉랭한 눈빛으로 관망하던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에 곁에 있던 규령이 눈을 빛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 형, 도와만 주신다면 서금충을 성체로 키우는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조건이라면 수사도 마음이 끌리시겠지요.”
묵묵히 싸움을 하던 서 씨 청년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한립을 향해 외쳤다.
“서금충 말입니까?”
“안 됩니다! 서금충을 성체로 만드는 방법은 우리 성전의 독문 비술인데 어찌 함부로 외부인에게 발설할 수 있겠습니까!”
임은병이 그 말을 듣고는 안색이 창백해져 반대했다.
“목숨이 날아갈 마당에 독문 비술이 무슨 소용입니까! 설마 저 칼날에 흡수당해 윤회도 못하고 죽고 싶은 것입니까? 게다가 우리가 이곳에서 죽으면 그 소식을 들은 모란인들이 곧 초원으로 쳐들어 올 것입니다. 겨우 전승되는 비술 하나와 일족의 흥망성쇠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 말을 들은 임은병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렸지만 다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만년시웅은 고민하는 한립의 얼굴을 보고는 상황이 불길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 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