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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98화 (355/2,000)
  • # 598

    598화. 다시 나타난 핏빛 검

    드디어 흑의 여인이 본체인 은색 늑대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립과 서 씨 청년, 임은병, 규령은 붉은 빛 속의 누군가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자를 보는 수사들의 눈빛이 흉흉했다. 은시야차와 사금수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며 끼어들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다들 왜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시냔 말입니다.”

    붉은 빛 속에서 자신은 무고하다는 얼굴로 오십대의 노인이 나타났는데 바로 사산 진인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셨으면 인사나 나누시지 않고 이리 몰래 숨어 계시다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서 씨 청년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무슨 짓을 하다니요. 전송되어 들어오자마자 수많은 수사들과 마주치니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힘들어 조심했을 뿐입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어째서 제 곁에 그리 바짝 붙어있었던 겁니까?  수사의 둔술이 신묘하기 그지없어 영서공작의 오색빛이 비추지 않았다면 전혀 모를 뻔 했습니다.”

    임은병은 얼굴을 굳히며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건 오해십니다. 왜 그렇게 됐냐면…….”

    사산 진인이 실실 웃으며 무어라 해명하려는데 한립이 냉소하며 말을 끊었다.

    “진마탑 앞에서 보물을 이용해 나를 암습한 것이 수사시지요?  당시에는 둔술이 너무 빨라 붙들지 못했지만 대충 윤곽은 확인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기운을 봉해도 섬뜩한 기운과 피비린내가 새어나오는 듯합니다. 그 핏빛 칼날로 수없이 많은 원영들을 삼키셨나 봅니다. 이곳에 같이 들어온 수사들이 보이지 않은지 오래이니, 아마 이미…….”

    한립이 서늘한 웃음으로 말을 맺자 서 씨 청년과 임은병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간사하게 웃어대던 사산 진인은 표정이 굳었지만 고개를 마구 저어대며 부인했다.

    “정말 오해십니다. 피비린내라뇨! 일개 산수에 불과한 제가 어찌 그런 보물을 지니고 있겠습니까?  증거도 없이 모함하지 마십시오.”

    “증거?  웃기는 소리! 그 자가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한립의 얼굴에 한기가 어리며 입에서 금빛 비검이 날아가 사산 진인을 갈랐다. 서 씨 청년과 임은병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을 뿐 굳이 그를 막지 않았다.

    사산 진인이 놀라 당치도 않은 소리를 지껄여댔지만 소매를 기민하게 펄럭이며 남색 비검으로 한립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두 비검이 교전하더니 중간에서 영기의 빛이 폭발했다.

    이에 한립은 그저 냉소했다. 그가 수결을 맺자 청죽봉운검에서 검빛이 거세지며 남색 비검은 두 동강이 나 고철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화들짝 놀란 사산 진인이 곧바로 푸른 청동 방패를 방출했지만 한립의 비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금빛 비검이 결국에는 사산 진인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갈팡질팡하던 사산 진인이 돌연 하얀 빛줄기로 변해 어딘가로 쏘아져 나갔는데 흑백의 빛이 번뜩이며 규령이 차분한 얼굴로 그 앞을 막아섰다.

    사산 진인이 흠칫하며 다시 방향을 틀었는데 서 씨 청년마저 걸음을 옮겨 그 앞을 막아버렸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금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몸을 떨며 검 그림자를 만들어내 뒤덮었다. 도망갈 길이 막히자 사산 진인의 표정이 악독해졌고 소매 속에서 핏빛 무언가가 튀어나갔다.

    금빛 검 그림자들이 흩어지며 금빛 비도가 몇 장 밖으로 튕겨나갔다. 핏빛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열댓 개로 갈라져 쫓으니 날카로운 금속성의 충돌음이 연달아 들려왔고 농염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인간 수사들과 요수들은 핏빛 기운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다만 한립만이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 공격을 당하는 것이 자신의 본명 법보가 아닌 듯한 한립의 표정에 서 씨 청년이 의아함을 느꼈다.

    사산 진인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허공을 가리키자 핏빛이 그에게 돌아가 반 척 길이의 짧은 칼날로 변했다.

    “과연 당신이었군요! 그 핏빛 칼날은 마룡인을 모방해 만든 것입니까?”

    한립이 핏빛에 휩싸인 칼날을 보며 물었다.

    마룡인이란 말이 나오자 다들 표정이 달라졌고 은시야차마저 눈을 빛내며 허공의 핏빛 칼날을 살폈다.

    그러나 사산 진인은 그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오히려 한립의 금빛 비검을 보며 놀라는 중이었다.

    자신이 핏빛 칼날이 그렇게 많은 공격을 가했는데 여전히 금빛을 반짝이며 멀쩡했다. 핏빛 칼날의 위력을 알고 있는 사산 진인으로서는 크게 놀랄 일이었다.

    “고민할 것 없습니다. 제 비검은 특수한 능력을 지녀 핏빛 칼날의 위력이 아무리 강해도 없앨 수 없을 테니까요.”

    한립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손짓하자 금빛 비검이 빠르게 돌아왔다.

    “날 죽일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사산 진인은 상대가 법보를 거두는 것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당신을요?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당신에게 죽은 이들과 깊은 인연이 있던 것도 아닌데 그들의 복수를 대신해 줄 마음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제가 생각한 자가 아니었다면 쓸모가 없으니 죽였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위력적인 보물을 지녔는데 도리어 힘을 합쳐 이곳을 빠져나가야지요!”

    “한 수사의 뜻은 그럼…….”

    서 씨 청년이 먼저 그의 생각을 읽고 답했다.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무조건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흑풍기가 통천령보라지만 상대가 다른 적을 상대하느라 이곳에 신경쓰지 못하니 본래 위력을 거의 내지 못하겠지요. 그렇다면 봉인된 공간의 한 곳을 노려 공격하면 부수고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은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영묘원을 탈출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런 추측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때는 공간이 불안정해서 다행히 빠져 나온 것이지만 반대로 지금은 동급의 수사들이 많으니 한 번에 강력한 일격을 펼친다면 똑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일 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은시 수사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 자의 법기가 상당히 강력해 보이니 이곳을 빠져나가는데 도움은 되겠습니다.”

    서 씨 수사가 은시야차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하자 은시야차가 잠시 사산 진인을 바라보더니 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산 진인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수사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힘을 합쳐 이 공간을 깨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을 겁니다. 이곳에 남았다가는 원영이 통째로 요마에게 삼켜지고 말테니까요.”

    “이곳을 떠나면 다들 제 갈 길을 가는 겁니까?  나중에 딴 소리하면 안 됩니다.”

    사산 진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지금 할 짓이 없어 아무나 공격하는 이들로 보이십니까?  정도 수사들도 아니고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서 씨 청년이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건 그렇습니다! 만일 태일문 녀석들이었다면 저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럼 여러분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산 진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에 수사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각기 다른 공법을 사용하는 수사들이 모였으니 서로의 속성과 상극인 공격이 한 데 합쳐져 좋지 못한 결과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 수사, 일행 중에 수사가 한 명 더 있는 것 같은데 나와서 같이 상의하시죠. 그 분이 사용하시던 비도의 위력이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서 씨 청년이 한립을 향해 말했다. 이에 다른 이들도 동시에 그를 응시했다. 한립은 속으로 서 씨 청년을 욕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다들 안심하십시오. 그 수사도 공격에는 참여할 것입니다. 허나 공법상의 이유로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기 힘드니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시죠.”

    그 말에 서 씨 청년은 불만스러웠지만 고마를 죽일 때 보여준 엄청난 위력을 생각하며 더는 따지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산 진인은 한립과 서 씨 청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눈치 채고 희희낙락했다.

    서늘하게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숙인 사산 진인은 마치 무언가를 고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입술을 달싹이며 누군가와 전음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고 그의 감춰진 한 손에 언젠가부터 하얀 털들이 빼곡하게 자라났다 사라졌다.

    몇 촌 길이의 하얀 털들은 각각이 철침처럼 단단했다.

    수사들이 공간을 어떻게 깨는 것이 효과적일지 의견을 조율하고 있을 때, 한립은 의식을 이용해 불안에 떠는 제혼을 다독이고 있었다.

    일다경이 지나고 계획을 마친 그들은 몸을 날려 정해진 위치에 섰고 진법 깃발과 원반 등을 꺼내 공격의 위력을 더해줄 보조 진법을 펼쳤다.

    그리고 한립과 서 씨 청년은 함께 풍염용렬진(風炎龍烈陣)을 펼치기 시작했다. 비록 커다란 종파의 산문을 지키는 강대한 진법과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임시로 설치할 수 있는 진법 중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축에 드는 공격형 진법이었다.

    반각 후 진법이 완성되자 규령과 은시야차 등이 보조형 진법 속으로 들어갔고 풍염용렬진은 자연히 한립과 서 씨 청년이 맡아서 유지했다.

    서로 죽이려고 용을 쓰던 사이에서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연합을 해야 했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다들 저 곳을 향해 공격하시면 됩니다!”

    서 씨 청년이 거침없이 명을 내렸다. 다른 이들이 이견이 없자 그가 한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립이 곧바로 수결을 맺어 열 손가락을 펼치니 법결들이 연달아 날아가 주위의 깃발들에서 영기의 빛이 터져 나왔다.

    서 씨 청년도 깊이 숨을 내쉬며 한 손에서 새빨간 법결을 쏘아 보냈고 진법 중앙에 묻어둔 진법 원반에서 빛이 번뜩였다.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팟, 팟 하는 소리가 들리며 열댓 개의 새빨간 불기둥이 진법 중앙에서 솟구쳐 올라 뜨거운 열기를 뿜어댔다. 주변 기온이 삽시간에 올라 다들 입이 마르고 피부가 퍼석해졌다.

    그때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어 푸른 진법 원반을 꺼내 들었다. 그가 원반을 치니 푸른빛이 번뜩이며 진법이 호응하듯 진동했다.

    푸학.

    열댓 개의 푸른 바람기둥이 교룡처럼 응결되어 한립의 주술 소리에 따라 불기둥을 파고 솟구쳤다.

    불길과 바람이 융합되어 바람기둥으로 된 거대한 열댓 개의 교룡들이 만들어 진 것이다.

    “다들 공격하시죠!”

    진법이 발동하자 서 씨 청년이 반가워하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가 입을 벌려 푸른 구슬을 뱉어내자 머리 위를 맴돌던 영서공작이 오색 광채를 뿜어 구슬을 휘감고 장벽으로 날아갔다.

    이를 본 은시야차, 임은병 등도 보조 진법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신통이나 법보를 이용한 공격을 시작했다. 위력을 극대화 시키는 공격 순서에 따라 공간 장벽에 연달아 충돌소리가 들려왔다.

    쿠광쾅쾅! 파치칙!

    전방의 벽에서 경천동지할 폭음이 들려오자 폭발한 영기의 압력에 공간 자체가 흔들렸다.

    한립은 소매를 펄럭여 수십 개의 금빛 비검들을 비처럼 쏟아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서 씨 청년이 눈부신 청죽봉운검들을 보고 안색이 변해 그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그러나 한립은 다른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비검들을 하나로 뭉쳤고, 열댓 장 길이의 거검이 그가 날린 법결을 맞고 검빛 뇌전에 둘러싸였다.

    그러나 그는 거검을 이용해 바로 공격을 가하지 않고 갑자기 수중의 진법 원반을 투척했다.

    펑!

    그가 수결을 맺어 허공의 진법 원반을 가리키자 원반이 빠르게 몸을 떨더니 터져나갔다. 그리고 진법 원반 속에서 나온 대량의 푸른 기운이 진법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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