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7
597화. 원영을 삼키다
손톱만한 구슬은 노란빛에 튕겨 나가자마자 스스로 펑 하고 터져나갔다. 그리고 모두의 보호를 받던 백의 유생의 환영 역시 미간에 붉은 점이 생기며 흩어져 사라졌다.
“음?”
“이게 무슨!”
흑의 여인과 대두 괴인이 동시에 소리쳤다.
“영월환(映月環)? 아니, 영월환의 모조품이로구나!”
흑의 여인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성조께선 어째서 이러시는 겁니까!”
괴인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어째서라니? 엽 수사가 본 성조의 능력을 의심하니 직접 보여준 것뿐이라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흑의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대두 괴인은 불만스런 얼굴이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더 따지지는 않았다. 그저 백의 유생의 환영이 사라지는 것을 의아하게 한번 살폈을 뿐이었다.
이때 죽은 엽 가 수사들의 시체가 저절로 폭발하며 원영 두 개가 튀어나와 각진 얼굴의 수사 쪽으로 날아갔다.
각진 얼굴의 수사는 탁한 얼굴로 백골 고리를 거두어 순식간에 두 원영을 소매 속으로 넣었다. 그리고 서둘러 백골 고리를 발동하는 것이 아무래도 흑의 여인이 이 기회에 자신마저 처리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듯했다.
하지만 정말 대두 괴인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려는 것뿐이었던지 흑의 여인은 각진 얼굴의 수사가 원영을 보호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엽 수사가 팔령척만 가져다준다면, 이곳을 빠져나간 후 마기를 주입해 주겠네. 그렇다면 수명이 얼마나 늘 수 있을지 알겠지? 게다가 내가 요비를 상대할 때는 나설 필요도 없고 말이야. 설마 이 정도 일도 못한다는 건가?”
흑의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냉랭해졌고 눈동자에서 돌연 핏빛이 감돌았다.
대두 괴인이 상대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가 결국 이를 악물고 팔령척 방향으로 날아오르려 했다.
그의 몸이 팔령척이 있는 곳으로 꿈틀한 순간 궁전 안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대두 괴인의 머리 위의 공간이 왜곡되었다. 그리고 열댓 장에 이르는 거대한 손이 나타나 괴인에게 주먹질을 했다.
거대 손의 엄청난 영기에 대두 괴인이 기겁하는데 흑의 여인이 웃음 지으며 손을 저었다.
꽝!
거대한 주먹이 무언가가 튕겨나가 빛으로 흩어졌다. 괴인이 마음을 굳게 먹고 둔술을 펼쳐 노란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가 십여 장 정도 날아갔을 때 허공에서 이상한 빛이 번뜩이며 검붉은 색의 괴이한 칼날이 괴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흑혈인(黑血刃)!”
대두 괴인이 식겁해 소리치고는 즉시 입을 벌려 노란색 검을 분출했다. 조그만 검은 순식간에 한 장 길이의 장검으로 변해 층층이 환영을 만들어 그를 보호했다.
동시에 괴인이 한 손을 뒤집어 새하얀 병을 쥐고 기울이자 하얀 기운이 병에서 나와 날아드는 칼날로 날아갔다.
그러나 검붉은 기운은 순식간에 하얀 기운을 뚫고 거대한 장도로 변해 대두 괴인의 머리를 가르려 했다.
당황한 대두 괴인이 수결을 맺어 노란 거검을 이용해 막고는 소매를 털어 작살로 변한 은빛을 뿜어냈다. 검붉은 장도는 검 그림자로 이뤄진 보호막에 잠시 주춤했으나 웅웅대더니 그것들을 거침없이 깨부수고 노란 거검의 본체와 부딪쳤다.
노란 거검도 몸을 떨며 영기의 빛을 뿜어냈지만 놀랍게도 바로 금이 가고 말았다. 괴인이 안색이 창백해져 입에서 검붉은 피를 내뿜었다.
다행인 것은 날려 보낸 작살이 변한 은빛이 상대의 위력을 조금 누그러트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란 거검이나 은색 작살은 검붉은 장도를 오래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괴인은 즉시 옆으로 튀어나가 몸을 피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흑의 여인의 얼굴이 굳으며 궁전 상공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누군가 코웃음을 치며 나타났는데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엽 가 대장로 백의 유생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딱 심장이 있어야할 자리에 가느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전혀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백의 유생이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자 검붉은 장도도 영향을 받았는지 기운이 크게 줄어들었다. 대두 괴인의 거검과 은색 작살이 장도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숙부님, 어딜 가시렵니까? 흑혈인은 엽 가의 보물이자 반역자를 처단하는 법기이지요! 이미 고마 성조와 결탁해 엽 가를 배반하셨으니 제가 너무 하다 여기지 마십시오. 팔령척은 반드시 엽 가의 차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보물을 고마에게 바치려 하다니 이 자리에서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 사죄하십시오.”
백의 유생이 가슴의 상처는 신경 쓰지도 않고 괴인을 향해 음산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대두 괴인의 얼굴이 복잡해 졌지만 결국 냉소했다. 변명할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
대두 괴인이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유생의 표정도 흉악해졌다.
흑의 여인은 자신이 단번에 유생을 죽이지 못하자 조금 의아해 하다가 미간을 좁히며 허공을 쥐었다. 그러나 그 동작은 전혀 조급하거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촤륵!
반 척 길이의 예리한 빛 다섯 개가 그녀의 손에서 튀어나가 유생 앞에 도착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백의 유생은 분명 그것을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벌려 원반 형태의 붉은 법보를 분출하고는 거기서 뿜어져 나온 붉은 기운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다섯 개의 예리한 빛은 법보에 닿지도 못했다. 하얀 거대 손이 유생 앞에 나타나 번개처럼 그것들을 쥐어 부순 것이다.
흑의 여인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그때 궁전 속에서 롱몽이 웃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살! 당신이 다른 수사들을 시켜 보물을 얻으려 했다면, 나도 인간 수사와 연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한 겁니까? 이렇게 쉽게 팔령척의 금제를 깰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겠지요?
오랜 세월 갇혀 있던 당신이 인계에서 수많은 마공을 물리친 불종의 보물을 두고 얼마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보겠습니다. 운 좋게 팔령척을 부순다 해도 마지막에는 본 비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때 가서 봉인을 깨트릴 마기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군요.”
흑의 여인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지만 유유히 답했다.
“마기가 얼마나 남든 육체도 없는 잔혼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게다가 이곳에 이렇게 많은 영단묘약들이 모여 있는데 본 성조가 마기가 부족할까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요?”
“영단묘약? 설마 저 늙은 마귀가…….”
롱몽이 주춤하며 안색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맺기도 전에 흑의 여인이 허공의 흑풍기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녹색 법결이 튀어나가 통천령보에 흡수되었고, 조용히 허공에 떠있던 검은 깃발이 사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깃발이 각진 얼굴의 수사 눈앞에 있었고 즉시 폭음이 들려왔다.
검은 빛이 사방으로 퍼지고 검은 바람기둥이 하늘로 치솟자 아무런 대비도 못하고 있던 각진 얼굴의 수사가 그 속에 휘말린 것이다.
바람기둥 속에서 살벌한 바람소리가 흘러 나왔고 수많은 바람의 칼날들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찢어발길 기세로 맹렬히 돌았다.
각진 얼굴의 수사는 서둘러 백골 고리에 전신의 영력을 쏟아 부었다. 백골 고리가 다시 환영을 만들어내 눈을 찌를 듯한 노란빛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검은 바람의 칼날이 너무 많았고 특수한 신통을 지니고 있는지 보호막에 닿는 순간 스스로 폭발해댔다!
순식간에 보호막 표면에 엄청난 수의 칼자국이 생겼고 괴이한 공격에 아무리 견고한 노란 보호막이라도 부서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결국 바람기둥이 노란 보호막을 산산조각 냈고 백골로 만든 고리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혈기가 사라진 각진 얼굴 수사는 이를 악물고 입에서 푸른 비검을 뱉어내 검과 하나가 되어 이미 부서져 나가기 시작한 미천탁을 그 자리에 두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튀어나갔다.
살 길이 막막해지자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것이었다.
“안 됩니다!”
백의 유생이 그것을 보고 서둘러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푸른 빛줄기는 검은 바람기둥을 빠져 나가기도 전에 참혹한 비명을 질러대며 난도질당하고 말았다.
갈가리 찢긴 시체 속에서 처량한 소리가 들리더니 삼색의 기이한 빛을 머금은 작은 원영이 나타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각진 얼굴의 수사가 보호하고 있던 다른 두 명의 원영들도 살기 위해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바람의 칼날이 도처에 가득해 달아날 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원영들이 잘려나가기 직전 검은 바람기둥 안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허물어져 버렸다.
이에 세 원영이 깜짝 놀라 재빨리 달아나려는데 흑의 여인이 냉소하며 손짓했다. 그러자 원영들은 주위의 공기가 응결되는 느낌을 받았고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바람기둥 속 검은 빛이 원영들을 감싸 순식간에 세 개의 검은 공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흑의 여인은 수결을 맺어 이상한 주술을 외고 있었다. 검은 빛이 번뜩이며 검은 공들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흑의 여인 코앞에 빛이 크게 번지며 사라진 세 개의 공들이 나타났다. 원살 성조가 신통을 발휘해 그것들을 코앞으로 순간이동 시킨 것이다.
“무슨 짓이냐! 당장 멈춰라, 이 요마야!”
백의 유생은 기겁했다. 그가 허공의 흑혈인을 가리켰고 장도가 빛을 발하며 엽 가 수사들의 원영을 구하려 날아가려했다.
“이미 늦었다.”
롱몽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의 여인의 눈에서 핏빛이 번뜩이더니 붉은 입술 사이로 핏빛 기운이 뻗어나가 원영이 들어있는 검은 구슬들을 휘감았다.
원영들은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핏빛 기운 속에서 축소되더니 손톱 만하게 변해 흑의 여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이 복잡한 일들을 흑의 여인은 익숙하다는 듯 한 호흡 만에 끝낸 것이다. 이에 백의 유생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의 의식을 느낀 흑혈인이 영기의 빛을 발산하며 몸을 떨었지만 잠시 후 그가 분노를 억눌렀는지 보물도 평정을 되찾았다.
“롱몽 선배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분명 구해주실 수 있으셨을 텐데 어째서 저희 엽 가 수사들을 내버려두신 겁니까. 설마 연합을 하자는 말은 다 허언이었는지요!”
유생은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왜 구해줘야 하지? 그들은 겨우 원영 중기 수사들에 불과했다. 나도 영력에 한계가 있는데 다른 이들을 구하는데 낭비할 수야 없지. 게다가 무언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본 비는 엽 가가 아니라 너와 손을 잡았을 뿐이다.”
궁전 속에서 롱몽의 목소리가 냉랭하게 들려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대가 원영을 삼켜 원기를 회복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네가 무엇을 알겠느냐. 원영을 삼켜 마공의 위력을 잠시 높일 수야 있겠지! 하지만 단시간에 마기를 끌어올리는 대가로 원영들을 연화시키느라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마기를 소모하게 된다. 아마 은월랑족의 육체를 이용한 강력한 신통을 쓰려고 마기를 허비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구나. 내 말이 맞습니까? 원살!”
“맞습니다! 뭐, 이 육체의 강력함이야 제가 말하지 않아도 더 잘 아실 테니 속일 생각도 없었습니다. 본래 흑풍기 만으로만 팔령척 금제를 부숴, 법력을 남겨두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면 너무 지체될 것 같아 말입니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마기를 크게 소모하더라도 화신기 후기였던 육체의 힘을 빌려 당신을 죽일 생각입니다.”
흑의 여인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이후 그녀가 작게 탄식하며 수결을 맺었고 전신의 은색 기운을 끌어올렸다. 어찌나 빛이 강한지 태양이 나타난 것처럼 똑바로 살피기 어려울 정도였다.
은빛 속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늑대의 포효가 터져 나왔고 강력한 영기의 압력이 주변을 억눌렀다. 공간 자체가 강력한 영기의 압력에 진동했고 땅이 극심하게 흔들려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은빛은 수축했다 확장했다하며 수십 배로 불어나더니 결국에는 거대한 은색 늑대로 변했다.
두 개의 늑대 머리 중 하나는 검고 하나는 은색이었는데, 은색 늑대는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고, 검은 쪽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거대 늑대의 발톱들은 하나하나가 칼날 같았고 머리통도 웬만한 누각만해서 백의 유생이나 대두 괴인 모두 식겁해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늑대 요수의 몸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