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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94화 (351/2,000)
  • # 594

    594화. 목숨

    한립은 무언가 이상해 명청령안을 발동했다. 그러자 엽 가 수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영기로 만든 환영이었다.

    놀란 그가 서둘러 주변을 살폈으나 엽 가 대장로가 인근에 숨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 순간, 흑의 여인이 금빛 장도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검은 깃발을 허공에 던지며 이상한 주술을 외워댔다.

    콰앙.

    흑풍기에서 돌연 검은 돌풍이 몰려나왔다. 돌풍은 점점 커져 소용돌이로 변했고 소용돌이 위로 노란 먹구름이 만들어지더니 은색 뇌전이 번뜩이며 당장이라도 벼락이 내려칠 것 같았다.

    노란 먹구름 아래의 검은 소용돌이는 점점 흉포한 소리를 내며 바람의 칼날을 응결해냈다. 또 주위에 있던 모래먼지와 돌덩이들이 딸려 올라가 충돌하며 회전하는 소리가 엄청났다.

    한립은 곧바로 전신의 푸른 기운을 방출해 두꺼운 보호막을 만들어 자신과 은월을 보호했다. 그러나 괴상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보호막은 폭풍우 속의 돛단배처럼 미약해 보일 뿐이었다.

    한립의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흑풍기는 원살 성조 화신의 조종을 받아 드디어 통천령보의 엄청난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한립은 흑풍기의 위력을 벗어나 있었는데도 엄청난 굉음에 귀가 멍해졌고, 눈앞이 뿌옇게 변해 의식으로도 한 걸음 앞을 살피기 어려웠다. 만약 보호막이 없었다면 악랄한 바람에 순식간에 갈갈이 찢겼을 것이다.

    그나마 명청령안을 이용해 두 눈에 법력을 불어 넣은 덕에 모호하게나마 열댓 장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맹렬한 소용돌이 때문에 구진복마진의 중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꺼질 듯 울려대는 진동과 굉음을 통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추측할 뿐이었다.

    허공을 올려다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 평소의 몇 배의 법력을 불어 넣은 보호막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진동을 해댔다. 흑풍기의 위력이 시간이 갈수록 더 거세지고 있었던 것이다.

    심호흡을 하며 한립이 힐끗 발밑을 보았다. 그런데 보호막 한 장 밖에서 검은 바람기둥이 솟구치더니 엄청난 힘으로 보호막을 바람기둥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흠칫 놀란 그가 서둘러 전신의 법력을 응결하고서야 겨우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열댓 개의 검빛이 보호막에서 빠져나와 주위를 미친 듯이 난도질 했다.

    이에 아직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못한 바람기둥이 잘게 흩어져 검은 기운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또다시 바람기둥을 형성할 모양이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한립이 은월을 불러 더욱 뒤쪽으로 물러났다. 바람기둥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토둔술을 이용해 지하로 숨어도 그다지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겨우 바람기둥 몇 개를 피한 끝에 공간의 가장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눈앞에는 정체불명의 회색 장벽뿐이었지만 그의 생각대로 거리가 멀어지니 광풍도 많이 잦아들었고 검은 바람기둥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한립과 은월은 일단 한 시름을 놓았다.

    한립이 궁전 쪽을 돌아보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금빛 비검으로 회색 장벽을 내리쳤다.

    촤륵.

    회색 장벽은 손쉽게 금빛 비검에 잘려나가긴 했으나 순식간에 회복되어 한립을 당황케 했다.

    잠시 고민을 하던 한립이 한 손을 움직여 저물대에서 삼염선을 꺼냈다. 조심스럽게 영력을 주입하니 부채에 삼색의 빛이 번졌다.

    그는 가볍게 장벽을 향해 부채질했다. 그러자 삼색 화염이 빠져나가 소리 없이 장벽을 녹였는데 거의 한 장 크기의 커다란 구덩이가 나타났다.

    그러나 빛이 가시고 안을 확인한 한립은 더욱 난감해졌다.

    장장 열댓 장을 뚫고 들어가서야 화염이 사라졌는데 여전히 장벽이 뚫리지 않은 것이다. 삼염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한 것은 아니었지만 깊은 장벽에 머뭇거려졌다.

    아무리 삼염선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상고 수사가 마련한 금제를 뚫을 수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곳은 롱몽이라는 화신기 요족과 고마 성조의 화신을 봉인하기 위한 곳이 아니던가!

    게다가 삼염선을 최대로 발동하면 고마 성조의 이목을 끌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을 벗어나기도 전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장벽을 더 뚫고 들어갔다가 숨겨진 다른 금제가 발동될 수도 있었다. 장벽이 깨지는 것을 대비해 금제를 펼쳐 두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은 삼염선을 든 손에 힘을 풀었다.

    “이렇게 간단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급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주인님!”

    롱몽이 나타난 이후 계속 얼이 빠져있던 은월이 돌연 입을 열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무어라 답하려다가 얼굴을 굳히며 광풍 속을 응시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계속 그리 숨어 있겠다면 제가 어찌 나와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삼염선에서 다시 삼색 빛이 번들거렸다.

    “한 수사, 진정하시고 말로 합시다. 그 부채의 위력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누런 광풍 속에서 나타난 수사는 뜻밖에도 서 씨 청년과 임은병이었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오, 두 분이셨군요. 설마 혼란한 틈을 타 저를 처리하기라도 하실 작정이셨습니까?”

    “그리 비꼬실 것 없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한 형을 찾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 같이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찾자는 것이니까요.”

    임은병은 한립이 적대적으로 나올 것을 알았기에 손을 저어 장벽을 친 다음 말했다.

    “목숨을 부지할 방법?”

    한립은 즉시 관심이 생겼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시다시피 고마 성조의 흑풍기 위력은 우리가 감당할 수준이 아닙니다. 마물이 영계 요비(妖妃)와 싸울 동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통천령보는 필요 없으니 나가겠다는 뜻입니까?”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바라보았다.

    “농담이시지요?  통천령보가 아무리 귀해도 목숨만 하겠습니까. 고마 성조는 진마탑에 오랜 세월 갇혀 있느라 원기가 크게 상했을 겁니다. 원기를 회복하는데 우리의 원영만한 영약은 없지요! 저 자에게 일단 여유가 생기면 우리 중 누구도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을 겁니다.”

    서 씨 청년은 고마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는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당연히 힘을 합쳐 전송진을 지키고 있는 고마를 죽이고 살 길을 찾아야지요.”

    “겨우 우리만으로 말입니까?  저 머리 둘 달린 고마의 위력을 알기는 하십니까?”

    “어찌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 될 거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한립의 말에 임은병도 황당하다는 듯 실소했다.

    “저 자는 세 명의 대수사와 열댓 명의 원영기 수사들의 협공을 뚫고 달아났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리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수중의 깃털 부채를 매만졌다.

    “고마가 천남에서 달아난 요물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제야 천란 대선사와 임은병이 시선을 교환하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둘이 합류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의 머리 위에서 돌연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와 한립 등의 안색이 달라졌다. 노란 돌풍 속에서 푸른색과 보라색 빛이 번뜩이더니 은시야차와 사금수가 나타난 것이다.

    두 요물은 전신에서 영기의 빛을 방출하며 흉악한 돌풍 속에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은시야차의 풍둔술이 이곳에서도 통하는 것 같았다.

    “당신들이었군요. 두 분도 함께 하시려는 겁니까?”

    요물들의 정체를 확인한 한립이 신중히 물었다.

    “물론입니다! 우리가 인간 수사들과 같은 부류는 아니지만 고마 성조 입장에서는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남아 있다가는 우리도 끝장나는 건 똑같지요.”

    은시야차는 거침없이 말했다.

    “두 분도 힘을 보태시겠다니 잘 됐습니다! 여기에 규 수사까지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겠지요. 늦기 전에 움직입시다! 진법과 팔령척이 얼마나 더 버텨 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서 씨 청년은 고민도 없이 수락하고는 한립을 쳐다보았다.

    이제 한립의 동의만 있으면 그들의 임시 연합이 결정되는 것이다. 한립이 입술을 축이며 침묵하다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고마를 죽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 무력화시키고 빠져나가는 것이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좋습니다! 바로 규 수사를 부르지요.”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즉시 수결을 맺자 체 내의 본명패가 진동하며 영기의 빛을 방출했다.

    은시야차와 사금수도 그동안 허공에서 내려와 인간 수사들과 나란히 섰다. 잠시 후 한립 뒤편으로 노란빛이 번뜩이며 추한 여인이 나타났다.

    규령은 주위에 서 씨 청년과 은시야차 등이 몰려들어 있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한립을 보고 입술을 달싹였을 뿐이다.

    무표정하던 한립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빠르게 스쳐 사라졌다.

    “왜 그러십니까?  규 수사께서 지하에서 뭐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눈치 빠른 임은병이 그를 주시하고 있다가 눈을 빛냈다.

    “아닙니다. 그저 화선종 수사 두 분도 지하에서 출구를 찾고 있다는 군요.”

    “아, 그렇군요.”

    한립의 자연스러운 응답에 여인이 웃는 듯 마는 듯 수긍했다. 그러나 절대 그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도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괜히 캐물어 일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움직일지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했기에 순식간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각자 영기의 빛을 번뜩이며 광풍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한립이 규령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땅 속으로 사라졌고, 은월은 다시 작은 여우 요수로 변해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검은 전송진 방향을 바라보며 은빛에 휩싸인 인간형 괴뢰를 꺼냈다. 그가 한손을 저으니 꼭두각시는 눈에 띄지 않는 노란빛으로 변해 보라색 눈을 번뜩이며 다시 사라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기에 만일을 대비한 것이다. 꼭두각시가 그의 곁을 지킨다면 한결 편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이 수결을 맺어 풍뢰시를 불러내자 은빛이 번뜩이며 그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머리가 둘 달린 고마는 팔짱을 낀 채 허공에 떠서 검은 전송진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신중한 얼굴로 궁전 방향을 바라보며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네 개의 손에는 각각 보라색 고리 한쌍과 푸른 창, 새빨간 벽돌 모양의 보물이 들려 있었다. 흑풍기에서 불어대는 강력한 돌풍은 고마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마가 눈을 번뜩였다.

    멀리서 굉음이 터지며 금빛 장도에서 분출된 도기(刀氣)가 솟아올라 층층히 덮인 누런 먹구름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 엄청난 기세에 돌풍 소리도 잠시 멈추었다.

    이에 고마가 미간을 좁히며 망설였다. 지원을 나가야 할지 아니면 계속 전송진을 지키고 있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굉장한 금빛이 터져 나오며 굵직한 바람기둥이 만들어진 것이다. 직경이 열댓 장은 되는 바람기둥은 꼭 흑룡처럼 보였는데 인근의 공기를 빨아들여 모든 것을 찢어발길 기세였다.

    그것을 확인한 고마가 한시름을 놓다가 머리 중 하나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을 부릅떴다.

    “흥!”

    고마가 거대한 팔을 앞을 향해 휘두르자 한줄기 붉은 빛이 허공을 가르며 무수히 많은 벽돌로 변해 무언가를 내리 누르려 했다.

    벽돌은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새빨간 불길의 불구렁이로 변했는데 그 수가 굉장했다.

    “경계심이 뛰어나십니다!”

    광풍 속에서 두 수사가 나타나며 서늘하게 말했다. 그 중 하나의 손에서 남색 빛줄기가 뻗어 나가 옥으로 만든 우산으로 변해 불구렁이를 막아섰다.

    쿠콰콰콰쾅!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지만 옥 우산은 혹한의 성질을 지닌 고보라 불구렁이들을 버텨냈다. 이에 불구렁이들이 흉흉하게 달려들었지만 상극의 속성을 지닌 고보를 만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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