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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92화 (34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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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2화. 구진복마진(九眞伏魔陣)

    쿵!

    굉음이 울리고 원강순 표면에서 은빛이 미친 듯이 번뜩이더니 몇 촌 가량이 움푹 들어갔다.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수사들은 그것을 보고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화천기가 령롱, 설령 등의 말을 꺼내자 두려운 기색이 가득하던 은시야차와 사금수는 그 사이 슬금슬금 전송진 방향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화천기는 자신의 일격이 통하지 않자 의외라고 여겼으나 입가에 조롱기를 담고 있었다. 그가 다시 공격하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립과 은월을 번갈아 보았다.

    “설령, 저 자의 몸에서 너의 기운이 진하게 묻어나다니…. 설마 영수가 된 것이더냐?”

    “그렇다면 문제라도 있습니까?”

    안색이 어두워진 은월이 서늘하게 답했다.

    “문제는 없지. 다만 저 자에게 축하 인사라도 해야겠구나! 천규 요왕(妖王)의 총비를 영수로 삼다니. 영계의 삼황(三皇)이라 해도 감히 그런 짓은 못했을 텐데. 하하하!”

    화천기가 요사스런 웃음을 흘렸다.

    은월은 창백한 얼굴로 화천기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 아니던가요?  다른 사람이 이 일에 대해 안다면 당신에게도 득이 되지 않을 텐데요. 게다가 그 분의 총비는 령롱이지만 가장 총애를 받던 것은 저입니다. 당시 나를 도와 누가 당신을 잠들게 했는지 잊지 마세요.”

    은월의 말에 화천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곧 냉소하더니 고개를 돌려 전송진 방향으로 손을 털었다.

    콰앙!

    엄청난 진동과 함께 하얀 전송진이 있던 자리가 움푹 파여 한 장 깊이의 구덩이로 변해버렸다. 이에 몰래 전송진으로 이동하던 은시야차와 사금수가 난색을 표하며 멈추었다.

    “너희 둘은 어딜 가려고 그러느냐?  한 녀석은 공현 단사(丹士)와 똑같이 생겼는데 전신에 시기(尸氣)가 넘쳐흐르고, 다른 녀석은 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당시 공현 단사가 기르던 영수로구나. 공현 단사는 내가 봉인되기도 전에 죽은 지 오래이니 그 시체를 이용해 만들어낸 연시가 은시야차의 경지에 이른 것일 테야. 내 말이 맞느냐?”

    화천기가 은시야차를 보며 물었다.

    “령롱 선자께서 저희를 알아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와 선자는 인연이 닿아 몇 번 뵌 적이 있었지요.”

    은시야차가 머뭇거리다가 결국에는 쓴웃음을 지으며 실토했다.

    “나와 인연이 있는 자는 공현 단사이지 네가 아니다! 그래도 사금수는 겨우 7급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급 요수가 되었구나. 영계로 돌아가도 충분하겠어.”

    “어찌 됐든 제 기억 속에는 당시 절세미인이셨던 선자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송진은 왜 부숴버린 것입니까?”

    “기왕 왔으니 조금 더 머물다 가라는 뜻이다.”

    화천기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은시야차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전송진이 망가졌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가 눈을 굴리며 침묵했다.

    이제 화천기는 그 둘을 상대하지 않고 서 씨 청년을 시작으로 다른 수사들을 냉랭히 훑었다.

    “아주 잘 되었구나! 이렇게 많은 인간 수사들이 몰려오다니. 하나하나가 수행도 높고 쓸 만해.”

    “선배님께서 영계에서 어떤 분이셨는지 또 어째서 화 수사의 몸에 깃드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엽 가의 수사들은 그저 통천령보를 얻기 위해 곤오산 봉인에 틈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팔령척만 내주신다면 선배님이 탑을 빠져나가는 것을 돕겠습니다!”

    하얀 장포의 유생이 상황을 주시하다가 공손히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서 씨 청년도 지체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도 엽 수사와 같습니다!”

    “팔령척?  이건 누구든 능력이 되는 자가 가져가거라. 본 비는 막지 않을 것이다!”

    화천기가 뜻밖의 말을 내뱉자 엽 가 대장로와 서 씨 청년이 흠칫 놀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왜, 보물은 갖고 싶지만 직접 움직이기는 두려운 것이냐?”

    화천기가 그들을 비웃자 백의 유생과 서 씨 청년은 더욱 경거망동하기가 어려워졌다.

    목 부인은 화천기가 출현한 후 더욱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한 손을 조용히 저물대 쪽으로 가져갔다.

    “선배님께서 팔령척에 욕심이 없으시다면 어째서 노부는 막으신 겁니까?”

    궁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대두 괴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다른 이들은 되지만, 너는 안 된다!”

    “어째서 입니까?”

    괴인은 잘려나간 자신의 팔을 보며 원망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어째서냐고?  네가 조금 전에 원살 성조의 분신을 만났기 때문이지!”

    “……저는 원살 성조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대두 괴인은 뜨끔했지만 즉시 부인했다.

    “그 자와 함께하며 마기(魔氣)를 잔뜩도 묻혀 왔구나. 네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다. 궁전에 들어서자마자 내 혼갑(魂匣)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지 않았더냐?  이 육체의 주인이 한발 앞서 나를 깨우지 않았더라면 네 악랄한 수법에 당할 뻔 했지! 감히 멸혼부(滅魂符)로 나를 죽이려 들어?”

    화천기의 녹색 눈이 번뜩였다. 백의 유생은 그 말에 멍해져서는 입술을 달싹이며 황급히 대두 괴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대두 괴인은 그것을 모른 척하며 냉랭한 얼굴로 단 한 마디도 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백의 유생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원살 성조가 누굽니까?  상고 요마를 일컫는 것입니까?”

    “원살 성조가 누구냐고?”

    뜻밖에도 한립이 입을 열자 화천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며 광소했다. 이에 한립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상대가 직접 대답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천남에서 달아난 고마가 곤오산에 나타난 것이 원살 성조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들 여러 가지 추측을 하며 입을 다물었기에 곧 주위가 고요해졌다.

    “저 여인은 상계 요왕의 총비가 아니니 모두 속지 마십시오! 분명 고마 성조의 화신이 우리를 속이려는 함정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고마를 봉인하는데 쓰인 팔령척을 들고 사라진다면 고마가 풀려나 인계는 큰 재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화선종 목 부인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작은 녹색 옥새(玉璽)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옥새 표면에 빛이 번지며 다섯 개의 발톱을 지닌 용의 환영이 그 안에서 나타났다.

    용의 환영이 화천기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요동치는 것이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마주한 것 같았다.

    “화룡새(化龍璽)!”

    화천기가 바로 그것을 알아보고는 표정이 달라져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기이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힘이 공간을 가르며 날아갔다.

    목 부인이 놀란 순간 옥새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포효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열 배 이상 커진 용의 환영이 옥새를 벗어나 날아간 것이다.

    쿠콰쾅!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진동과 굉음이 터져 나오더니 용의 환영과 거대한 힘이 부딪쳐 하얀 빛을 방출하고는 사라졌다.

    그 틈을 타 목 부인과 수려한 여인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금색과 은색의 빛줄기가 각자에게 뻗어 나와 일월사를 형성한 것이다.

    그 안으로 스며든 여인들을 본 화천기는 눈썹을 끌어 올리며 입에서 은색 빛기둥을 뿜어냈다.

    그런데 수사들은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전신이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사슴의 환영이 진법 속에서 튀어나와 은색 빛기둥을 삼키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거대 사슴이나 은색 빛기둥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았다.

    “팔기록(八麒鹿)!”

    한립이 서둘러 팔령척을 쳐다보았다.

    원래 허공에 떠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보물이 어느새 일곱 가지 빛깔을 방출하며 여덟 마리의 영수의 환영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화천기도 그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서늘해져서는 궁전으로 몸을 날렸다.

    쿠르릉!

    팔령척은 귀가 터져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냈고 궁전을 중심으로 한 거대 진법이 영기의 빛을 방출하며 아홉 줄기로 나뉘어 땅을 갈랐다. 그러자 지하에서 아홉 개의 제단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바깥에 있던 소형 제단보다 몇 배나 컸고 각각이 금빛의 거대한 칼날을 품고 있었다. 금빛 칼날의 모양은 돌거인들이 들고 있던 것과 똑같았지만 훨씬 컸다. 열댓 장 크기의 칼날은 법기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둥에 가까웠다.

    “구진복마진(九眞伏魔陣)…….”

    백의 유생이 그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한립은 그의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은월의 팔을 잡고 후퇴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진법이었다.

    그때 공간 벽 어딘가에서 검은빛이 번뜩이더니 순식간에 허물어져 내렸다. 그리고 안에서 새까만 마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만족스런 웃음소리가 들리며 머리가 둘, 팔이 넷 달린 검은 그림자가 마기 속에서 뛰쳐나와 허공에 우뚝 섰다. 그러나 아홉 개의 거대 칼날이 그를 향해 금빛을 뿜어내자 마귀의 웃음소리가 끊어졌다.

    공간 전체를 뒤덮을 만큼 엄청난 양의 금빛이 마기를 밀어내자 쌍두사비(雙頭四臂)의 마귀가 놀라 뒷걸음질 친 것이다.

    빛 속에서 날카로운 예기들이 번뜩이며 검은 그림자의 머리가 날아가려던 순간 쿵, 하며 금빛 줄기들과 마기가 충돌했다.

    야리야리한 몸이 검은 그림자의 앞에 나서 금빛들을 막은 것이다.

    펑!

    고운 손이 금빛을 튕겨내고 기쁨 가득한 얼굴을 드러냈다. 매혹적인 몸매에 새까만 치마를 두른 그녀는 세상에 둘도 없을 절색의 여인이었다.

    은월이 그녀를 보며 두려움에 떠는 동안 한립은 먼저 나타난 쌍두사비의 마물을 주시했다. 추마골에서 달아났던 바로 그 고마였다.

    체내의 청죽봉운검들이 일시에 울어대며 잃어버린 두 개의 비검과 공명하고 있었다.

    고마 앞의 여인은 매우 유약해 보였는데 어떤 경지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한립은 신형이 흐릿해져서 구진복마대진의 다른 쪽으로 이동한 후에야 은월의 팔을 놓아주었다.

    시종일관 아무 말도 없던 규령이 뒤를 바짝 쫓았는데 은월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은월이 그런 한립을 보며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조심하거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은월은 쓸쓸한 얼굴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서 씨 청년과 엽 가 수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진법 쪽으로 물러서며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 자들에게도 마기가 느껴지다니!”

    일월사 안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베틀 북이 진동하더니 목 부인이 나타났다. 베틀 북 위에 선 그녀가 한 손에 화룡새를 쥐고 다시 용의 환영을 불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과 고마를 마주친 용의 환영은 방금 화천기를 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앙되어 있었다. 목 부인이 통제하지 않았다면 벌써 날아가 저들을 덮쳤을 것이다.

    화룡새의 정체를 모르는 서 씨 청년이 목 부인을 냉랭히 쳐다보았다. 상황이 갈수록 혼란스러워지고 가면 갈수록 엄청난 존재들이 쏟아져 나오니 이곳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아 진 것이다.

    아무리 통천령보가 욕심난다지만 목숨을 부지해야 뭐든 소용이 있는 법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여 옆의 천란 성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임은병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란 대선사와 시선을 교환하고 도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의 유생은 다른 이들과 달리 마물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팔린 틈에 팔령척을 차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다른 엽 가 수사들에게 눈짓을 했고 그들이 호법을 서는 동안 수결을 맺었다. 순간 그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똑같이 생긴 그림자가 나타나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은시야차는 새로 등장한 여인의 얼굴에 눈을 부릅떴다. 마기가 만연하지 않았으면 그녀의 얼굴을 보고 령롱 선자라 여겼을 것이다.

    그럼 전송진을 없앤 여인은 누구고, 한립 곁의 은월은 또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은시야차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눈을 굴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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