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591화 (348/2,000)

# 591

591화. 화신기 수사

“화정조?  설마 그걸 생으로 복용한 것은 아니겠지요?”

“당연히 생으로 복용했습니다. 그래야 불 속성 영력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회색 장포 노인은 안색이 변했지만 빙벽 속의 사내는 여전히 덤덤했다.

“그렇게까지 할 줄이야! 제련을 거치지 않은 화정조의 불 속성 영기는 너무 패도적이라 체내의 법력을 몽땅 태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요.”

“호 형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도박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빙벽 속에서 생을 마감하라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향 노괴나 풍 노괴처럼 엄청난 위력을 숨기고 정원(精元)이 유출될까 몸을 사리라고요?  혹시나 과도하게 법력을 사용했다 목숨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저계 수사 흉내나 내는 어릿광대짓을 하면서 말입니다.”

백 노괴가 자조적으로 물었다.

“어릿광대짓이라니, 백 형이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둘은 영계 수사들이 인계에 내려오며 사용했던 역령통로(逆靈通路)를 찾기 위해 그러고 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면 화신기 후기에 이르지 않고는 영계로 승천할 수 없을 테니까요. 사실 상계 수사들이 법력을 억제하고 내려올 수 있다면 우리도 비술을 통해 법력을 끌어올리면 같은 통로로 승천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천지의 영기가 급변하고 난 후, 얼마나 많은 화신기 수사들이 그 역령통로라는 것을 찾아다녔습니까?  대진이 아니라 인계 곳곳을 샅샅이 살폈을 겁니다.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역령통로가 존재하지 않거나 육지가 아닌 심해 속에 있는 것이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가져보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말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회색 장포 노인도 빙벽 속 사내의 말이 일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천통로를 찾는다는 망상을 쫓기보단 성실히 수련해 화신기 후기에 이르러 승천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상고 마계의 수작으로 인계의 천기 원기가 이리 희박해지지만 않았어도 우리의 자질이면 벌써 영계로 넘어가고도 남았을 텐데요!”

빙벽 속 사내가 옛일을 언급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원망해봐야 어쩌겠습니까. 마지막 상고 수사 무리가 승천을 한 후, 화신기 후기가 되어 영계로 간 이들은 정말 손에 꼽힐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했지요! 상고 시대와 비교하면 정말 천지차이입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거의 만 년 간 단 한 명도 영계로 올라가지 못했으니 풍 노괴와 향 노괴도 실낱같은 희망에라도 매달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회색 장포 노인도 그 일을 생각하면 울적해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책을 강구하는 것이고, 저도 제 방법대로 수련에 정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호 형도 제 뜻을 아셨겠지요. 풍 노괴의 제안을 거절하시든지 아니면 홀로 다녀오시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폐관 수련에 들어가야 해서 멀리 배웅은 못하겠습니다.

아, 문하의 제자들을 시켜 골짜기를 완전히 봉쇄할 것이니 다른 노괴들에게도 그리 전해 주십시오!”

빙벽 속 사내가 조급히 제 할 말만 하고는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빙벽 속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회색 장포 노인은 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결국에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혈기단 두 알이라면 위험을 무릅쓸 만하겠지?  ……백여 년의 수명이 늘어나면 이번 일을 통해 잃은 정원을 보충하고도 남을 테니까.”

노인은 중얼중얼 거리며 빛줄기로 변해 골짜기를 떠났다.

* * *

곤오산, 진마탑 8층 궁전 앞.

한립이 무표정하게 수결을 맺자 열댓 개의 비검들이 진동하며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검을 만들었다.

쿵!

금빛이 내리치자 백옥으로 만들어진 돌거인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제단에서 빛이 반짝이자 돌 조각들이 다시 뭉쳐져 돌거인은 처음으로 돌아갔다.

이미 네 마리의 꼭두각시를 완전히 없앤 후였다. 진법 때문에 거의 불사신 같았지만 계속 깨부수면 더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많은 원영 중후기 수사들이 공격하니 다행이었지 두셋이 모였으면 법력이 바닥나기 전에 돌거인들을 전부 없애지 못했을 것이다.

돌거인들이 손에 든 금색 칼날은 무슨 재료로 제련한 것인지 아주 날카롭고 특히 마공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마공을 익힌 자들은 보호막이 칼날을 막지 못해 금색 칼날에 접근하지 못했다.

게다가 누군가 진법 속으로 뛰어들어 궁전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제단 위의 돌거인들이 외부 수사들에 대한 공격을 일시에 포기하고 무수히 많은 도의 기운을 쏘아 보냈다.

현묘한 궤적을 그리며 모여드는 도기를 전부 막아낼 실력자는 이 중에 없었기에 다들 안으로 달려들지 못하고 바깥에서 돌거인들을 하나씩 없애는 중이었다. 이것들만 없애도 진법을 파훼하는데 절반은 성공하는 셈이었다.

한립이 주변을 둘러보니 제단 위에 남은 꼭두각시들이 이제 몇 마리 되지 않았다.

곧 진법을 깰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돌연 머릿속에 은월의 거친 숨소리와 고통에 시달리는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한립이 즉시 전음을 보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생긴 것이더냐?”

“그것은 아닙니다. 궁전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려 하는데 아주 이상하고 익숙한 느낌이 듭니다……. 윽, 머리가 너무…….”

은월이 간신이 숨을 고르며 중얼거리다가 참기 어려운지 고통스럽게 외쳤다.

그녀의 말에 한립은 진법 중앙의 궁전을 쳐다보았다. 겉보기에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한립이 다시 은월에게 물어보려는데 놀라운 영기의 압력이 궁전에서 터져 나왔다.

쿵!

노란 빛줄기가 궁전의 지붕을 뚫고 솟아오르더니 거대 손으로 변해 팔령척을 움켜쥐려했다. 기이한 현상에 진법을 깨던 수사들은 깜짝 놀라 몇몇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때 수사들의 혼을 쏙 빼놓을 듯한 매혹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팔령척 옆의 공간에 파문이 일며 머리를 산발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자는 나타나자마자 팔뚝만 한 굵기의 빛기둥을 뿜어냈는데 노란 거대 손이 빛기둥에 뚫려 사라졌고 노란빛에 휩싸인 누군가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자는 코웃음을 치며 귀신처럼 움직여 열댓 장을 가로질렀다. 자신을 추격하는 존재가 있자 노란빛 속의 수사가 핏빛 화살을 분출했다.

피를 이용한 공격은 무척 빨랐지만 신형이 흐려지며 가볍게 피했고 핏빛 화살은 그대로 허공을 뚫고 지나갔다.

잠시 후, 노란빛 속에서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노란빛은 어떤 비술을 사용했는지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완전히 다른 곳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노란빛이 가시고 나타난 사내는 얼굴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는데 가슴에 날카로운 맹수의 손톱자국이 깊게 패였고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팔 한쪽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처참한 몰골 그 자체였다.

“숙부님!”

진법 외곽의 한 여도사가 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 소리쳤다.

팔까지 잘려나간 처참한 몰골의 수사는 뜻밖에도 엽 가의 대두 괴인이었다. 이에 수사들은 당황스러워했다. 특히 하얀 장포를 입은 유생의 표정이 급변했다.

한립과 서 씨 청년은 대두 괴인의 신분을 몰랐으나 의식으로 그자가 원영 후기의 수사라는 것을 알고는 경악했다.

한립이 신중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남색 장포를 입은 것으로 보아 독성문 수사 같았는데 머리가 산발인지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체형으로 판단하건대 아마 독성문 대장로인 화천기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젊은 여인의 목소리로 웃어대지 않았던가?

정말 괴이한 일이었다.

만일 이곳에 모인 수사들의 수행이 높지 않았다면 한립은 팔령척이고 뭐고 곧장 도망갔을 것이다. 다른 수사들도 머뭇거리며 신비에 싸인 산발인 수사를 쳐다보았다.

‘원영 후기의 수사를 순식간에 저 꼴로 만들다니 설마 화신기 수사란 말인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며 놀라는 중이었다.

머리를 산발한 수사는 대두 괴인이 멀찍이 달아난 것을 보고도 뒤쫓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그곳에 모여 있는 다른 수사들에게로 돌렸다.

칼날처럼 섬뜩한 눈빛에 수사들은 시선을 내리고 몸을 움츠렸다. 엽 가의 여 도사와 화선종의 여인은 수행이 가장 낮은 탓에 비틀거리며 물러나기까지 했다.

한립은 즉시 남색 빛을 일렁이며 명청령안을 발동해 그자의 시선을 막아냈는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너는……!”

머리를 산발한 수사가 여인의 목소리를 내며 한립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이때 한립의 영수대가 꿈틀대며 하얀 빛이 스스로 빠져나와 눈처럼 새하얀 아기 여우가 앞으로 나섰다.

영수는 주저 없이 바닥을 굴러 은빛 속에서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로 요수의 환술로 변신한 은월이었다.

“과연 너였어!”

수사가 은월을 보자마자 냉랭히 소리치고는 산발한 머리를 넘겨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다.

“화천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독성문 옷차림을 한 수사는 분명 화천기가 맞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이 요사스러운 비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괴이한 모습에 수사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들 그의 몸에 누군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멀리 달아났던 대두 괴인이 품에서 단약을 꺼내 삼키고는 잘린 팔뚝에 부적을 붙였다. 하얀 빛이 번지며 피가 뚝뚝 떨어지던 상처가 금세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제야 대두 괴인이 파리한 낯빛으로 화천기를 바라보았다.

한립은 눈앞의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마 저 자가 은월을 이곳으로 부른 것일 텐데 어떤 관계일지 무척 궁금했다.

“설령, 네가 이제야 이곳으로 돌아올 줄이야! 허나 기운이 그리 약해져서는 겨우 여우 요수의 몸에 깃들어 있다니. 우리 은월천랑(銀月天狼)의 이름에 먹칠이라도 하려는 것이더냐?”

화천기의 얼굴에 놀란 빛이 사라지고 태연히 입을 열었다.

은월은 한참 후에야 물었다.

“당신이 령롱인가요?”

화천기가 그 말에 눈빛이 달라져 그녀를 쳐다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일족 제일의 미녀이자 천규신랑(天奎神狼)의 총비(寵妃)가 어이없게도 기억을 잃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로구나! 하긴 원살 성조의 분신에게 육체를 빼앗기고 겨우 달아난 주제에 멀쩡하기는 힘들었겠지. 설령, 난 령롱이 아니라 롱몽이다!”

화천기는 분명 사내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웃음소리나 몸짓에는 교태가 가득 묻어났다.

지켜보던 한립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직 저 여인과 은월의 관계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은월의 불행에 퍽 고소해 하는 말투였다.

은월이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화천기를 바라보는데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아직 흐릿하기는 하지만 기억대로라면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바로 나겠군요!”

“흥! 전부 잊은 것은 아니었구나. 그래, 너와 나는 본래 하나였고 령롱이라고 불렸지. 다섯 번째 천년뇌겁을 견디기 위해 은월랑족 최상의 비술을 수련하다 문제가 생겨 혼백이 둘로 갈라져 버렸지만. 우리는 독립적인 원신으로 새로 태어났으나 이전에는 네가 의식이 더욱 강해 내가 오랜 시간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상황이 정반대가 되었구나! 네 원신은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어졌어. 내가 손가락 하나만 써도 죽일 수 있을 만큼.”

화천기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은월이 일순 긴장했다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기억나는 것이 많지는 않지만 서혈혼인(噬血魂印)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당신은 날 죽이지 못할 거예요. 내가 정말 죽는다면 당신도 좋은 꼴을 볼 수 없을 테니까.”

은월이 차분히 말했다. 그 말에 화천기가 얼굴을 굳히며 눈에서 녹색 빛을 분출했다. 그러자 은월의 몸이 즉시 부들부들 떨리며 무형의 기운에 의해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에 한립이 입술을 달싹이자 거대 손이 나타나 은월을 잡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 모습에 화천기가 열을 받았는지 한립을 노려보았다.

‘이런!’

불길한 예감에 한 손을 뻗자 원강순이 커다랗게 변해 그의 앞을 막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