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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88화 (345/2,000)

# 588

588화. 팔령척(八靈尺)

월광석을 꺼내 머리 위로 띄운 한립이 규령을 불러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진입했다.

진마탑에 들어서자 몇 층 정도는 굉장히 넓고 조용했다. 귀물의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었는데 먼저 들어간 수사들이 깨끗이 처리하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으로 보아 상당히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지하 3층에 이르렀을 때 노르스름하게 타버린 시체가 돌기둥 옆에 엎어져 있었다. 한립이 살펴보니 엽 가 수사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지하 4층에는 별 다른 것이 없었고 5층에 도착하니 다시 시체 두 구가 더 발견되었다. 전신이 녹색으로 물들어 한 눈에 보기에서 극독에 당해 죽은 시체들이었다.

그것들 중 하나는 산수 무리의 거한이었는데 머리가 따로 떨어져 있었고 몸도 비검에 난도질을 당했다. 거한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식간에 당한 것 같았다.

한립은 시체들을 재로 만들고는 규령과 6층으로 내려갔다.

‘흠.’

이번에는 뜻밖에도 살아 있는 인물을 만날 수 있었는데 거대한 얼음 덩어리 속에 갇힌 궁장 차림의 여인이었다.

가까이 가 여인의 얼굴을 살피니 놀랍게도 그녀는 백요이였다. 그녀는 수결을 맺은 채 투명한 비검을 들고 눈을 감고 있었다.

얼음 속에서 희미하게 영기의 파동이 감지되지 않았다면 창백하기 그지없는 얼굴 때문에 죽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한립은 바로 그녀의 봉인을 풀어 주지 않고 의식을 이용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자 그제야 한손을 들어 거대한 얼음에 가까이 가져갔다.

촤륵.

보라색 화염이 손바닥을 타고 얼음덩어리를 흘러 다니며 한기를 흡수했다. 잠시 후 얼음이 녹아내린 백요이가 속눈썹을 꿈틀거리며 드디어 눈을 떴다.

한립을 알아본 그녀가 즉시 긴장한 기색을 풀었다.

“한 형이셨군요! 다른 수사인 줄 알고 긴장했습니다.”

여인의 쇠약한 목소리와 웃음이 얼마나 부상이 심한지 알려주었다.

“백 수사께서는 얼음 속성 공법을 익히셨을 텐데 직접 스스로를 봉인하신 겁니까?”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여인의 얼굴을 훑었다.

“중상을 입고 적을 상대할 길이 없어 본명법보를 이용해 오랜 세월 제련해온 현빙한기(玄氷寒氣)를 방출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혼전 중이고 다들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바빠 겨우 살아남은 것이지요.”

“공격한 수사는 모르는 얼굴이었습니까?”

“아무래도 봉인 결계에 틈을 만든 무리 같았습니다. 다른 수사와 싸우고 있었는데 낯선 얼굴의 수사가 끼어들어 기습했지요. 현빙한기로 만들어낸 얼음은 원영 후기 수사가 아니고서는 단숨에 깨트리기 어렵기 때문에 일단 방출해 몸을 보호했지만 저도 중상을 입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한 수사를 만나 이렇게 도움을 받습니다. 순식간에 한기를 거두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별 것 아닙니다. 그럼 백 수사께서는 이제 어찌 하실 것입니까?”

“저와 부 수사는 한 형과 헤어져 누각들 중 하나에서 상당한 수확을 얻었습니다. 원래 그쯤에서 만족하고 물러나려고 했는데 진마탑에서 보물이 나타났을 때나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곳에 왔다가 수많은 수사들과 마주쳐 싸우게 되었지요. 음라종 수사들도 있었고 은시야차와 산수들 그리고 낯선 얼굴도 많았습니다.

각 무리가 상대를 마구 공격하는 통에 저희도 말려 들었지요. 저는 누군가에게 쫓겨 달아나느라 부 수사와 중간에 헤어졌는데 보아하니 부 수사는 기회를 보아 이곳을 벗어난 것 같습니다.”

백요이가 자신이 겪은 바를 한립에게 들려주다 그의 옆에선 추한 부인을 힐끗 보며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규령이 뿜어내는 요기가 대단했던 것이다.

“규 수사는 저와 연합하기로 했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홀로 이곳에 뛰어들었을 리 없지요.”

한립이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채고 미소 지었다. 이에 규령도 그를 따라 미소짓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러셨군요. 하긴 한 형은 저보다는 훨씬 현명하시니까요!”

백요이는 추한 부인과 한립의 사이가 단순한 연합 관계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 마음을 놓았다.

“오는 길에 부 수사의 유골을 발견했습니다. 이미 목숨을 잃었더군요.”

“부 수사께서 목숨을 잃었다고요?”

백요이는 화들짝 놀라 순간 넋을 잃었다.

“유골은 제가 처리했는데 원영이 빠져나온 흔적은 없었습니다. 혹시 얼음 속에서 이리로 지나가는 다른 수사는 감지하지 못하셨습니까?”

한립이 핏빛 도를 떠올리며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다른 수사요?  아니요. 설마 다른 수사가 또 들어온 것입니까?”

“그렇다면 됐습니다. 백 수사의 부상이 심각해 보이는데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침음하던 한립이 사산 진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덤덤히 물었다.

“어쩌겠어요. 아무리 이곳에 엄청난 보물이 있다고 해도 이제 헛꿈을 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시 이곳을 떠나 봉인 결계의 틈이 다시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그렇게 마음먹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한 형은 자신 있어 보이니 말리지 않겠습니다. 아무쪼록 조심하세요!”

“백 수사도 조심하십시오.”

한립은 포권을 하고 아래층으로 향하는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백요이는 한립과 규령이 멀어지는 것을 본 후 저물대에서 약병을 꺼내 붉은 단약을 입에 넣었다.

그때 벌써 스무 장 가량 떨어진 한립이 돌연 고개를 돌렸다.

“북야소극궁의 위명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시간이 나면 제가 들러 보아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요. 한 수사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갑작스런 물음에 백요이가 주춤하다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안심입니다.”

한립도 미소 짓고는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백요이는 그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자 웃음기 가신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왜지? ’

그녀는 거리낌 없이 환영한다고 대답했지만 상대가 어째서 북야소극궁에 가고 싶어 하는지 의아했다.

한립은 이제 7층에 이르렀다. 고마 등이 강력한 귀물들과 싸우던 공간이 이제는 텅텅 비어있었다. 한립과 규령은 즉시 8층의 작은 석실로 내려가 하얀색과 검은색의 작은 전송진 앞에 멈춰 섰다.

전송진을 내려다보며 한립이 턱을 쓸었다.

“은월,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느냐?  두 개 모두 단거리 전송진으로 다음 층으로 통할 것 같은데 말이야. 무언가 부르는 느낌은 어느 쪽이지?”

“이상하게도 두 개 모두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하얀색 전송진 쪽이 더욱 강렬한 느낌이 들긴 합니다.”

“그거면 됐다. 어차피 검은색 전송진은 사기가 느껴지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으니까.”

평온한 얼굴로 전음을 보낸 그가 곧바로 하얀 전송진으로 걸어가자 규령이 따라 들어갔다.

법결을 던져 넣자 도처에서 빛이 번뜩이며 그들이 사라졌다.

8층에 도착하자마자 한립과 규령은 각각 원강순과 핏빛 갑옷을 방출해 몸을 보호했다. 누군가 전송되어 오는 수사들을 노릴 수도 있기에 당연한 대비였다.

기습은 없었지만 눈앞은 대혼란 그 자체였다.

비검류의 법보들이 허공에서 미친 듯이 날아다녔고 둔광과 영기의 빛이 난무했다.

급히 훑어보니 대략 열댓 명 정도 있었는데 은시야차, 사금수, 서 씨 청년과 천란 성녀, 화선종의 두 여인도 있었다.

갈천호 등 음라종 수사들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죽었는지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것 같았다. 수사들은 서로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궁전 하나를 가운데 두고 흩어져 있었다.

거대한 진법 위에 세워진 궁전 주변에는 수십 개의 제단이 있었고 각각의 제단 위에 몇 장 크기의 백옥으로 만든 돌거인들이 서 있었다.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돌거인들은 두 손으로 금빛 칼날을 휘둘렀는데 거대한 진법의 힘을 빌려 다수의 수사들과 싸우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돌거인들과 싸우는 수사들의 시선이 수시로 궁전 위쪽으로 향했다.

궁전 상공의 열 장 위에 특이한 모양의 비취색 나무 자가 유유히 떠서 녹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고풍스러운 나무 자는 반 척 길이로 천천히 회전했는데 만일 평범한 보물이었다면 이렇게 수사들의 주목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무 자가 회전할 때마다 주변에 무수히 많은 은색의 연꽃이 생겨났고 그 속에서 여덟 마리의 영수의 환영이 보일 듯 말 듯 나타났다.

영수의 환영들은 고개를 쳐들고 자를 향해 울부짖어서 마치 보물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 같았다.

“산각수(狻角獸), 팔기록(八麒鹿), 금린교(金鱗蛟)…….”

환영들의 모습을 통해 정체를 유추하던 한립은 놀라고 말았다. 각각이 상고 시대의 유명한 요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팔령척(八靈尺)! 곤오삼노가 영계로 가져가지 않은 통천령보가 남아 있을 줄이야!”

한립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규령이 놀라 중얼거렸다.

‘팔령척? ’

“통천령보 중에 하나로 상고 시대에도 사용된 일이 드문 보물이라 잘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통천령보이니 위력이야 대단하겠지요.”

머릿속에서 은월이 설명했다.

“그런데 괜찮은 것이냐?”

한립이 은월의 목소리에서 이상을 감지하고 미간을 좁혔다.

“모르겠습니다. 분명 정체를 모르는 보물인데 문뜩 여러 가지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궁전 안에서 무언가가 저를 부릅니다. 아니, 무언가가 아니라 아주 친근한 누군가가요! ……그것도 아니고, 제 나머지 반쪽이 안에 있습니다.”

은월의 의식이 돌연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한립이 자세히 물으려는데 멀리서 서 씨 청년과 은시야차 등이 그가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고 적의를 담아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한립은 성큼성큼 전송진을 벗어나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한 수사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담이 큰 것이 경탄스러울 지경입니다.”

서 씨 청년이 냉소하며 한 손으로 은빛을 방출해 돌거인 하나를 부수었다.

“제가 못 올 이유가 있습니까?  수사도 통천령보를 앞에 두고 저와 싸우자는 것은 아닐 텐데요.”

놀랍게도 와르르 무너졌던 돌거인의 잔해가 제단에서 하얀빛이 번뜩이자 다시 새것처럼 합쳐져 금빛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

한립의 태평한 말에 천란 초원 대선사가 무어라 대꾸하려는데 멀리서 은시야차가 말했다.

“저와도 풀어야할 은원이 있다는 것을 잊으신 겁니까?  아무리 보물이 눈앞에 있어도 그것을 먼저 해결하고 싶은데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시야차 옆의 사금수가 위협적으로 으르렁 거렸다.

“그렇습니까?”

한립은 그 말을 듣고도 오히려 피식 웃음 지었다. 그 옆에 서있던 규령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서자 은시야차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규 수사, 무슨 뜻입니까?  어찌 그 인간 수사와 같이 있는 것입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아니면 나를 바보로 아는 겁니까?  자신들의 본명패만 챙겨서는 내 생사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사라지다니! 내 본명패가 다른 수사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죽지 않으려면 명을 따를 수밖에요.”

규령이 은시야차를 사납게 노려보며 외쳤다. 뜬금없는 상황에 듣고 있던 인간 수사들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질책에 은시야차는 멋쩍은 기색을 보였고 사금수도 으르렁 거리던 입을 곧장 다물었다.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있으니 그들도 가능했으면 규령의 본명패를 회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너무 복잡하고 다급해서 자신의 본명패도 간신히 챙겼는데 다른 이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규 수사 일단 진정하세요. 우리가 본명패를 빼앗는 것을 돕겠습니다.”

은시야차가 순식간에 평정을 회복하고 한립을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어쩔 수없이 명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니 굳이 싸우겠다면 봐주지 않겠습니다.”

규령이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자 은시야차도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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