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6
586화. 반서(反噬)
“한 수사, 이것들은 어찌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그의 뒤쪽에서 규령이 걸어왔다. 그녀는 흑백의 기운을 뿜어 작아진 백골 다섯 구를 끌고 오는 길이었다.
건 노마가 갇힌 순간 통제를 잃은 마귀의 화신들이 땅으로 추락했기에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키하하학!
한립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건 노마의 원영을 물어뜯고 있던 새까만 해골 머리들이 돌연 입을 벌려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듣기만 해도 기혈이 뒤틀리고 마음이 뒤숭숭해 지는 소리였다.
흑백 기운 속에 갇혀 있던 백골 다섯이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꿈틀거렸다. 두 눈에서 핏빛을 번뜩이며 포악한 기운을 뿜어낸 것이다.
백골들이 동시에 입을 벌려 흑백의 기운을 공격했다.
쾅!
추한 부인은 축 늘어진 백골들의 공격을 상상도 못했기에 흑백의 기운이 금세 흩어져버렸다.
다섯 개의 하얀 그림자가 금제를 벗어나 새까만 해골 머리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한립이 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그가 냉소를 머금자 수중의 작은 솥에서 푸른 기운이 퍼져 나와 벽을 형성하고 다섯 개의 그림자들을 막아버렸다. 다섯 백골들도 허천정의 기운에 갇힌 것이다.
그때 원영을 깨물고 있던 해골 머리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푸른 빛줄기에 싸여 꼼짝을 못하면서도 전신에서 청록색 화염을 번뜩이며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안 돼! 다, 당장 이것들을 풀어줘!”
건 노마의 원영이 갑자기 기겁해서는 소리를 질러댔다.
한립이 이상해 그를 보기는 했지만 풀어 달라고 풀어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도 달라졌다. 다섯 개의 해골 머리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며 난동을 부리다가 갑자기 건 노마의 원영을 물어뜯은 것이다.
이번에는 그저 피를 빠는 정도가 아니라 ‘와드득 와드득’ 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원영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반서(反噬)……!”
한립은 단번에 해골 머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주객이 전도되어 부리던 해골 머리들이 그를 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원기를 크게 상한 건 노마는 오자동심마의 흉포한 본성을 억제하지 못하고 잡아먹히고 있었다.
이에 한립이 솥에서 푸른 빛줄기를 불러내 해골 머리들을 휘감고 억지로 원영과 떼어 놓았다. 그러나 이미 상당히 뜯어 먹힌 건 노마의 원영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원영은 아직 살아 있었다. 비록 순식간에 절반가량 작아지기는 했으나 의식만 남아 있다면 정보를 빼내는 데는 무리 없을 것이다.
한숨을 내쉰 그가 원영 옆의 귀라번을 회수해 저물대에 넣고는 어딘가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인간형 꼭두각시가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새까만 가죽 주머니를 가져왔다.
혈마주가 폭발하며 떨어뜨린 건 노마의 저물대였다. 한립은 급히 저물대를 살피지 않고 규령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원영을 처리해야하니, 그동안 규 수사께서 백골들을 살펴주셔야겠습니다.”
“제게 맡기고 다녀오시지요.”
규령이 대답을 하고는 입에서 흑백의 기운을 뿜어 백골들을 휘감았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으로 허공의 쥐었다. 그러자 푸른 거대손이 불쑥 나타나 핏빛 원영과 다섯 개의 해골 머리를 움켜쥐자 한립이 빛줄기로 변해 북극원광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인간형 꼭두각시는 제자리에서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규령은 한립이 사라진 후에야 시선을 꼭두각시에게로 돌렸다. 저물대 속에서 꺼내는 것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꼭두각시라는 것을 눈치 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일각이 지났을 때 북극원광을 가르며 한립이 나타났다. 무표정한 얼굴의 그는 이제 건 노마의 원영 따위는 들고 있지 않았다.
“오자동심마의 본체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양의 기운이 극히 강한 화염으로 천천히 연화시키지 않고는 없앨 수 없을 겁니다.”
“연화 시킬 필요 없습니다. 오자동심마는 따로 쓸 데가 있으니 잠시 봉인해 두지요.”
“알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규령이 즉시 대답했다.
그가 소매를 털자 부적들이 빼곡히 날아가 백골과 해골 머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두 손을 펼쳐 열손가락을 튕겨내자 금빛 뇌전이 터지며 미세한 금색 실들이 한층 또 한층 빛덩이를 옭아맸다.
특이한 봉인 방식에 규령의 표정이 달라졌다.
한립이 수결을 맺자 법결이 날아가 금색 구슬처럼 변한 빛덩이들이 주먹만 하게 줄어들었다. 구슬들을 보면서도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그가 고민 끝에 입을 벌리자 일곱 빛깔의 불광(佛光)이 번지며 그가 체내에서 배양 중이던 금강조(金剛罩)가 나왔다.
그의 손짓에 따라 일곱 가지 색의 빛이 퍼져나가 금색 구슬들을 빨아들였다.
벽사신뢰로 제압한 것을 다시 불가의 보물로 가둬두었으니 아무리 마귀의 화신들이 흉악해도 난동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그제야 안심한 한립이 저물대에서 옥갑을 꺼내 금강조를 넣고 회수했다.
“혹시 곤오산에 숨어 지낼 만한 곳을 아십니까? 며칠 몸을 피하고 있다가 봉인 금제의 틈이 회복되면 나가기로 합시다.”
한립이 곤오전 입구 쪽을 바라보며 규령에게 물었다.
“한 곳이 있습니다. 저도 우연히 발견한 곳이라 아무도 모르는 장소이지요.”
규령이 그의 질문에 곧바로 답했다.
“그런 곳이라면 가장 좋겠지요. 가시죠! 만일 적을 마주치더라도 웬만하면 상대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꼭두각시를 회수했다. 두 수사가 빛줄기로 변해 곤오전 입구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의식을 이용해 북극원광 바깥을 아무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한립은 기뻐하기 보다는 의아해했다.
그는 양손에 원강순과 삼염선을 쥐고 소리 없이 북극원광을 빠져 나왔다.
매복을 경계하며 천천히 곤오전을 걸어 나오는데 바깥이 고요했다. 거대한 광장에 두 줄로 늘어서 있던 금자영목들은 벌써 베어져 나가있었고 바닥에는 패인 흔적이 여러 군데 나 있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첫 번째로 이곳에 들어온 무리와 충돌한 것 같습니다. 곤오산의 봉인 결계를 열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무리겠지요.”
그녀의 물음에 한립이 신중한 어조로 답했다.
“그들이 곤오산 금제를 깰 때 제가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수사들이 예닐곱 명은 되었고 그 중 저와 비슷한 수행을 지닌 이도 두 명이나 되더군요.”
“두 수사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멀리서 의식으로 살폈기에 어떤 외양을 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에 규령이 고개를 저었다. 한립이 이런 질문을 한 까닭은 고마가 확실히 첫 번째 무리 속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규령에다 인간형 꼭두각시를 얻었으니 상대와 겨뤄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무언가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음라종 수사들은 그렇다 치고 천란 초원의 수사들까지 사라진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초원에서부터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온 그들이 이대로 물러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강적을 만나 달아난 것인가? ’
그러나 그것도 이상했다. 만일 다른 무리가 이곳을 지키던 수사들을 제압했다면 바로 곤오전에 들어와 보물을 빼앗으려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되었든 그는 원하던 바를 전부 이뤘으니 조용히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곧 고마가 지닌 비검도 다시 되찾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규 수사, 아까 말했던 곳으로 가시지요!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더 많은 수사들이 들어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립이 냉소하며 몸을 날렸고 규령이 쓴웃음을 지은 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가는 내내 싸운 흔적들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쫓고 쫓기며 치열한 전투를 벌인 듯했다.
“이건…….”
갑자기 나타난 골짜기를 보며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비검 종류의 보물 때문에 돌계단이 갈라지며 백여 장 가까운 흔적이 남은 것이다. 한립은 자신의 거검술로는 단번에 이런 골짜기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위력적인 신통까지 펼치다니 수사들 간의 싸움이 생각보다 더 극렬했나 봅니다.”
머릿속에 은월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구나! 하지만 나와는 무관한 일이지!”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전음으로 답하며 발끝으로 땅을 박차 올라 구덩이를 넘어갔다. 규령이 그 뒤를 바짝 쫓는데 한립이 서늘한 시선으로 한쪽의 바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을 아니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그가 일갈하자 원영을 휘감은 검은 기운이 바위에서 쏘아져 나왔다. 은빛이 번뜩이며 사라진 한립이 검은 기운 앞에 나타났다.
그가 허공을 쥐자 푸른 거대 손이 나타나서 검은 기운을 잡아채려 했고, 놀란 원영이 순간이동을 해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동급 수사들과 전투 경험이 많은 한립은 원영을 포획하는데 능숙했다.
쿵!
천둥소리가 울리고 푸른 손에서 금빛 뇌전이 번뜩이더니 순간이동을 하려던 원영과 부딪쳐 터져나갔다.
그러자 검은 기운의 태반이 흩어져 버렸고 원영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푸른 손이 재빨리 원영을 낚아채 한립에게 날아갔다.
“이 자는…….”
규령이 원영을 보고 누군지 알아보았다. 육체는 없었지만 이목구비가 음라종 흑의 노인 중 하나와 똑같았던 것이다.
“한 수사, 저를 어쩔 작정입니까! 노부와 수사는 직접적으로 원수를 진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어째서 그리 떨고 계십니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바깥을 지키고 있던 음라종 수사들과 천란 초원 수사들은 어디로 갔지요? 그렇지, 곤오전에서 빠져 나간 여인들과 은시야차와 사금수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한립은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궁금한 바를 물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흉흉하지는 않자 원영이 조금 안심을 하고는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수사들이 들어가고 나서 갑자기 엽 가의 수사들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바로 공격 하더군요! 서 수사의 힘을 빌려 간신히 상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진마탑에서 굉음이 들려오더니 산봉우리 자체가 내려앉았습니다. 탑이 그대로 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여기까지 말한 원영이 머뭇거리자 한립이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광채가 터져 나오며 불경 읊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바로 귀 옆에서 울리는 것 같았는데 누군가 통천령보라고 외치더군요. 그러자 이곳에 모여 있던 수사들이 진마탑으로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때 곤오전을 빠져 나온 여인들과 은시야차 등도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사라졌고요. 저는 대장로님께 이 소식을 전하려 일부러 이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통천령보가 나타났단 말입니까? 그러면 수사는 어쩌다 육체를 잃은 겁니까?”
“정말 통천령보가 나타난 것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원영 후기의 수사들까지 앞 다투어 달려간 것으로 보아 엄청난 보물이 있기는 하겠죠. 다만, 저는 그 후 사산 진인에게 기습을 당해 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 빌어먹을 놈이 숨어 있다가 핏빛 비도로 습격을 했는데 전신의 피가 단번에 빨려나갔죠. 과감히 육체를 버리고 순간이동을 해 달아나지 않았다면 원영도 부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대단한 비도를 지녔단 말입니까?”
“그런 보물은 처음 봅니다. 색깔이 다른 것을 제외하면 외형이 전설 속의 마룡인(魔龍刃)과 엇비슷했지요! 하지만 진짜 마룡인이었다면 제가 이리 도망갈 기회나 있었겠습니까.”
원영도 확실하지 않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마룡인!’
그 말에 한립의 안색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