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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85화 (342/2,000)

# 585

585화. 구슬을 깨트리다

건 노마가 분노하며 핏빛 안개로 흩어졌다가 옆에서 다시 응집해 육신을 갖추려했다. 그러나 은색 사슬이 포기하지 않고 따라붙어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런 일이 연달아 반복되자 핏빛은 이전보다 확실히 연해졌다.

“죽고 싶으냐!”

핏빛 속에서 분노한 노마의 괴성이 들려왔다. 소리는 질렀지만 건 노마도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 챘다.

북극원광이 곳곳에 깔린 공간에서 핏빛 안개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은색 사슬은 어디서든 날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핏빛 안개가 다시 형체를 만들어내지 않고 반대로 똘똘 뭉쳐 핏빛 구슬을 형성했다.

“혈마주(血魔珠)!”

“노부가 네까짓 녀석을 정말 두려워 할 줄 알았더냐?  죽어라!”

핏빛 구슬에서 노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빛줄기로 변해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에 한립이 양환에 법결들을 던져 넣자 은색 사슬이 나타나 다시 혈마주를 공격했다.

하지만 구슬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은색 사슬들을 돌파했다.

쾅! 콰쾅!

구슬이 웅웅 울어댈 때마다 은빛 사슬이 가볍게 튕겨나간 것이다.

이에 한립이 무표정하게 한 손을 뒤집어 금색 뇌전을 일으켰고 소매 속의 다른 손에는 삼염선이 들려 있었다.

노마가 원신과 원영을 모두 혈마주에 담았으니 구슬만 깨버리면 끝이었다.

혈마주는 마도 공법 중에서 명성이 대단했는데 원영과 원신을 모두 담아 두 번째 육신처럼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듣기로는 이것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100가지가 넘는 영수의 피가 필요했고 몇 가지 특수한 마공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립에게는 상대를 쉽게 처리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일단 혈마주가 가까이 다가오면 벽사신뢰를 아낌없이 방출해 가둔 후 삼염선으로 일격에 처리할 작정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데 빛줄기로 변해 날아들던 구슬이 화르륵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사방을 살폈다. 혹시나 곤 노마가 특수한 둔술을 이용해 기습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화염에 둘러싸인 혈마주가 저 멀리 북극원광 속에서 나타났다.

“노부가 그리 어리석은 줄 아느냐! 이곳에서 너희 같은 고계 수사들과 목숨을 걸고 다투느니 밖으로 나가 다른 이들과 협공해 상대해 주겠다.”

빽빽한 은색 광선들 사이로 혈마주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이제 와서 쫓는 것은 무리였다. 분명 의외의 상황이었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대신 한립의 시선이 규령과 상대하고 있는 오자동심마로 향했다.

거대 백골은 여전히 뼈로 만든 칼을 들고 휘두르고 있었는데 건 노마와 같이 달아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립의 표정이 달라지더니 천둥소리가 울리며 등 뒤에서 날개가 솟아났고 서늘한 시선으로 건 노마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했다.

그리곤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벌려 푸른빛에 휩싸인 무언가를 뱉어냈다. 그것은 바로 허천정이었다.

그때 북극원광 속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며 멀리서 건 노마의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북극원광 사이로 핏빛이 되돌아오고 있었는데 그 뒤에 깡마른 누군가가 그를 뒤쫓고 있었다.

건 노마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립을 보며 가슴이 서늘해졌다.

혈마주가 주춤하자 뒤따르던 은색 빛줄기 속의 그림자가 붉은 색 화살을 꺼내 허공에 던졌고 이에 무수히 많은 화살들이 촘촘히 나타나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러자 한립이 혈마주로 변한 건 노마를 향해 피식 웃고는 삼염선을 흔들었다. 봉황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삼색의 화염이 흘러나와 불새로 변해 구슬을 덮치려 했다.

앞뒤로 쏟아지는 공격에 건 노마는 식겁했다. 삼염선의 위력은 이미 보았고 뒤에서 쫓아오는 자의 공격도 더없이 날카로워 이미 기습을 당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한쪽을 선택한 혈마주가 뒤쪽으로 물러나며 핏빛을 터트렸다. 그러자 회색 악귀의 얼굴이 구슬에서 피어올라 입을 벌리고 새까만 깃발을 뿜어냈다.

바람을 타고 몇 척 크기로 커진 깃발은 음기가 가득했으며 귀기가 흘러내렸다.

한립은 즉시 깃발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마기가 훨씬 농염한 것을 제외하면 그가 이전에 얻은 것과 똑같이 생겼다. 음라종 대장로인 건 노마가 귀라번을 지니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깃발이 혈마주 앞을 가로막고 펼쳐졌다.

즉시 기세등등한 음풍이 불더니 주위가 새까만 안개로 가득 찼고 그 안에서 괴상한 형상의 악귀 머리들이 연달아 나타나 날아드는 화살들을 향해 불꽃을 뿜었다.

화살들이 거침없이 음기로 파고들며 폭발음이 이어졌다. 건 노마가 깃발의 기세에 숨어 혈마주와 귀라번을 조종해 달아나다가 뒤쪽을 힐끗 살폈다.

그런데 불로 이뤄진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그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흠칫 놀란 건 노마가 귀라번의 녹색 기운을 키우자 깃발 표면에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음기가 분출되며 악귀가 빠져나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이전의 악귀 머리와는 달리 사지를 갖춘 흉악한 악귀는 새까만 갑옷을 입고 손에 삼지창을 들고 있었다.

삼지창 끝에는 녹색 귀화가 번들거리는 것이 위력이 굉장해 보였다. 귀물은 귀라번 속에서 오래 갇혀 있었는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흥분해 울부짖었다.

그 순간 삼색의 불새가 귀물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에 악귀는 입을 벌려 칠흑 같은 음기를 방출했고 손에 들고 있는 삼지창을 뻗어냈다.

쿵!

불새와 음기가 충돌한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신비로운 기운이 퍼져나가며 주변의 십여 장이 삼색의 주술로 차올랐다.

그 속에서 흉악한 생김새의 악귀와 분출한 음기가 눈 녹듯이 사라졌지만 그 덕에 혈마주는 삼색의 기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건 노마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귀라번을 보자 속이 쓰려왔다. 음라종의 보물인 귀라번이 빛을 잃고 암담해졌고 영성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실 귀라번이 음라종의 보물로 손꼽히는 이유는 겉으로 드러난 위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의 진정한 위력은 18개의 깃발을 모두 모았을 때 제대로 발휘되는데 모든 깃발이 다 있다면 화신기의 수사와 마주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멸문의 위기가 아니고서는 18개의 귀라번을 한 수사가 지닐 수 없기에 수행이 가장 높은 18명의 수사들이 하나씩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 하나를 한립이 갖고 있었다. 건 노마는 그 생각만 하면 이가 갈렸다.

그는 삼염선의 공격을 받고 차라리 조금 마음이 놓였다. 위력적인 보물일수록 법력을 많이 소모해야 했으며 화선종 여인에게도 이미 한 번 사용했으니 더는 부채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건 노마의 생각과는 달리 이변이 일어났다.

은색 빛줄기 속의 인영이 손에서 비취색 무언가를 쏘아 보냈는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중에 사라진 것이다.

‘안 돼!’

익숙한 기운에 건 노마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처음 습격당했을 때 벽사신뢰에 당해 원기를 크게 상했었기 때문이다. 노마는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두고 볼 수 없었다.

악귀 얼굴이 귀라번을 삼키자 혈마주가 모호해졌다. 비취색 빛의 짧은 화살이 금빛 뇌전을 품고 날아들어 관통하기 직전에 혈마주가 사라진 것이다.

거의 열댓 장 밖에서 핏빛 화염이 폭발하며 혈마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혈마주가 나타나자마자 검은 빛이 번뜩이더니 비도가 소리 없이 날아들었다.

쩡!

잠시 후 구슬이 깨지는 맑은 울림과 건 노마의 비명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말도 안 돼! 혈마주가 이렇게 허무하게……. 태일문의 천아신검(天阿神劍)도 불가능한 일을!”

건 노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악에 받쳐 소리쳤다. 결국 핏빛 구슬이 완전히 깨져 나가자 그 안에서 원영이 빠져나왔다.

원영의 모습은 정말 괴상해서 핏빛 보호막과 깃발 외에도 전신을 다섯 개의 해골 머리가 깨물고 있었는데 새까만 해골 머리들이 원영을 꽉 물고 피를 빠는 모습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건 노마는 즉시 귀라번으로 북극원광을 막아내며 검은 기운으로 변해 달아나려 했다. 이에 규령과 싸우던 거대 백골이 건 노마의 날카로운 소리에 울부짖더니 다섯 개의 회백색 기운으로 흩어져 돌아갔다.

혈마주가 망가졌기에 핏빛 그림자로 육체를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오자동심마 중 하나에 원영이 깃들 수 있었다.

당연히 규령이 오자동심마가 떠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녀는 즉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흑백의 빛줄기로 변해 그 뒤를 쫓았다.

한립이 무표정하게 은빛 날개를 펄럭이더니 검은 기운 앞에 나타나 손을 뻗었다.

꽈광!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금빛 뇌전들이 변한 그물이 원영을 덮친 것이다. 벽사신뢰를 알아본 원영은 급히 방향을 틀었는데 그가 향한 방향에 창백한 얼굴의 중년 수사가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노란 장삼을 걸친 목석같은 얼굴의 수사는 한 손에 붉은 활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립이 제련해낸 꼭두각시였다.

꼭두각시는 아무 기척 없이 나타나 건 노마의 원영이 화들짝 놀란 사이에 두 눈에서 보라색 빛을 방출했다.

건 노마의 원영은 보라색 빛에 휩싸여 귀신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그곳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미혼술이로구나!”

강력한 의식을 지닌 노마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소리쳤다. 당황한 그가 바로 고개를 돌려 중년 수사의 눈을 피해 급히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려했다.

그러나 이상한 영기의 파동이 감지되더니 작은 솥이 앞을 막아섰다.

천천히 허공에서 돌고 있는 솥은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노마는 단번에 솥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재빨리 벗어나려 했다.

그 순간 작은 솥이 맑은 소리를 내며 진동했고 푸른 기운이 흘러나와 건 노마를 향해 쏟아졌다.

엄청난 빛을 흩뿌리며 검은 기운 속에서 건 노마가 괴성을 질러댔지만 핏빛 원영이나 귀라번 모두 푸른 빛줄기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꽈광!

은빛이 번뜩이고 한립이 뇌둔술을 펼쳐 건 노마 앞에 섰다. 그가 빙긋 미소 지으며 손을 뻗자 허공에 파문이 생기며 푸른 솥이 나타나 떨어져 내렸다.

솥을 든 한립은 차분한 눈빛으로 건 노마의 원영을 쳐다보았다.

원영은 이미 겁에 질려 있었는데 적대적인 그의 눈빛에 이를 악물더니 피를 내뱉으려 했다. 이에 한립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팟! 팟!

금색과 은색 부적이 각각 원영에게 날아가 붙었고 그 즉시 모든 행동을 멈추고 피를 뿜어 펼치려던 악독한 비술이 흩어져 버렸다.

이때 은빛이 번뜩이며 노란 장포를 입은 중년 수사가 다가왔다. 아무런 기척도 찾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한립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처음부터 꼭두각시를 곤오전 입구 방향에 숨어 있게 했다. 교활하기 그지없는 건 노마가 달아날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꼭두각시는 본래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서 호흡이나 맥박이 없었고 수행까지 높으니 거의 완벽한 은신술을 펼칠 수 있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달아나던 건 노마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꼭두각시의 기습을 받았고, 뇌화궁(雷火弓)과 금뢰목(金雷木)으로 만든 화살에 쓴맛을 보고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립은 건 노마의 원영을 꼭 생포해야 했기에 마수찬과 다른 진귀한 재료를 섞어 제련한 마수비도(魔髓飛刀)로 혈마주를 부수고 벽사신뢰로 노마의 원영을 꼭두각시 쪽으로 몰고 갔다.

현광정으로 제련한 꼭두각시의 두 눈을 이용해 미혼술을 펼쳐 시간을 끌고 허천정을 이용해 원영을 포획하기 위해서였다.

한립이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통보결 일성을 익혀 허천정에서 영기의 빛을 내뿜을 수 있었는데 아마 제대로 솥뚜껑을 열어보기라도 하려면 원영 후기는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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