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4
584화. 마귀 합체
건 노마가 변한 핏빛 그림자는 조밀하게 모여든 은빛 광선에 주춤했다. 그 틈을 노려 추한 부인이 허공에 검은 방망이를 휘둘렀고 방망이 그림자가 층층이 생겨나 핏빛 그림자의 머리를 노리고 사납게 떨어져 내렸다.
아직 가까이 오지도 않았는데 느껴지는 엄청난 압력에 건 노마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규 부인의 공격에 한립이 양환을 가리키자 은색 광선 일부가 거대한 그물처럼 변해 핏빛 그림자를 덮치려 했다.
이에 핏빛 그림자가 낮게 울부짖으니 괴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갑자기 핏빛 그림자의 전신에 기이한 빛이 흐르더니 배가 불룩해지다 터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핏빛이 사방으로 퍼지더니 방망이 그림자와 북극원광이 변한 거대 그물을 피해 열장 밖에서 다시 응결되었다.
건 노마가 변한 핏빛 그림자가 완전무결한 상태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한립도 손쉽게 상대를 죽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건 노마가 이렇게 기묘한 수법으로 피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치 형태가 없는 진짜 그림자처럼 변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마공은 상고 시대에 고마들이 주로 펼쳤던 것으로 상고 수사들이 곤욕을 치렀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보니 매우 난감하기는 했다.
내심 놀라기는 했지만 한립은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입을 벌려 보라색 불덩이를 분출했다. 불덩이가 허공을 가르며 점점 커졌고 핏빛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북극원광으로 이뤄진 그물을 조종했고 다른 쪽 소매를 펄럭여 굵은 금빛 뇌전을 분출했다.
규령도 검은 방망이 법보를 휘둘러 다시 검은 그림자들을 만들어냈다. 새까만 방망이 그림자들이 핏빛 그림자의 도처에서 겹겹이 날아들었다.
사실 북극원광 속에서 싸울 때는 도검류의 보물은 함부로 방출하기 어려웠다. 잘못 조종했다가는 상대를 상하게 하기도 전에 북극원광에 박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립도 청죽봉운검보다는 벽사신뢰와 자라극화를 이용하는 중이었다.
건 노마는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위력적인 공격이 쇄도하는 것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혀끝을 깨물어 피를 머금고는 입에서 핏빛에 감긴 회색 빛덩이들을 분출한 것이다.
뇌전이 그것과 부딪치더니 녹색 연기를 뿜어내며 사라졌다.
그 순간 다섯 개의 하얀 빛기둥이 솟아올라 백골들이 마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건 노마가 오자동심마의 본체를 소환한 것이다.
다섯 백골들은 나타나자마자 입에서 청록색 화염을 뿜어냈다.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으나 그 중 두 줄기가 자라극화가 변한 불덩이와 부딪쳐도 밀리지 않았다.
나머지 세 줄기의 화염은 청록색 화염의 장막을 형성해 북극원광으로 만들어진 거대 그물을 막아냈다. 이에 사방팔방에서 검은 몽둥이 그림자가 날아들어 다시 한 번 압력으로 건 노마를 잡아 두려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건 노마도 신형을 폭파시키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라도 소모하는 법력이 어마어마할 테니 마구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자동심마의 본체를 소환했으니 이미 다른 계획이 세워져 있을 것이다.
건 노마가 의식을 이용해 명을 내리자 다섯 백골들이 그를 등지고 서서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회백색의 빛의 장막이 펼쳐지며 건 노마와 백골들을 전부 감쌌다.
콰르릉!
검은 방망이 그림자와 회백색 빛이 번뜩이는 동안 소름끼치는 거대한 울림이 들려왔다.
한립은 검은 방망이의 위력에 흡족했다. 10급 요수인 현암귀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싸울 때는 법력이 떨어져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오자동심마가 방출한 회백색 보호막도 단단하기가 상상 이상이었다. 검은 방망이 그림자가 전부 사라진 후에도 회백색 보호막은 여전히 건재했다.
규령이 그것을 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음산하게 보호막을 주시하더니 콧방귀를 뀌며 입을 벌렸다. 정기를 분출해 검은 방망이에 흡수시킨 것이다.
방망이가 길게 울부짖다니 광채 속에서 갑자기 형태가 변해 검은 색의 예리한 도끼로 변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오른 도끼는 주술 소리를 타고 점점 날카로운 은빛을 방출하며 불어나 열 장 가까이 커졌다.
방대해진 몸집만큼 품고 있던 봉인이 풀린 것처럼 살기(煞氣) 또한 하늘을 찌를 정도로 짙어 멀리 떨어져 있던 한립도 도끼의 흉포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때 규령이 두 손으로 법결을 맺어 키가 일곱 장에 달하는 거인으로 변했다.
‘거대술(巨大術)! 원형을 드러내지 않고도 저런 신통을 부리다니, 이미 원영 후기의 최고봉에 이르렀구나!’
한립은 기이한 현상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북극원광 쪽을 보며 깃털 부채를 꺼내 들었다.
규령은 커다란 손바닥을 펼쳐 양손으로 은색 도끼를 쥐더니 건 노마를 향해 천천히 휘둘렀다. 그러자 도끼에서 은색 초승달 모양의 빛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나타났는데 마치 공간을 가르듯 하얀 궤적을 남기며 날아갔다.
보호막 속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건 노마도 대번에 표정이 달라졌다.
오자동심마에 대해 자신 있었지만 이런 엄청난 공격에 맞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새하얀 단도를 손에 쥐어 집게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냈다.
이에 손가락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건 노마가 피를 뿜어 그것을 감쌌고, 핏빛이 크게 터져 나오며 그의 손가락과 융합되어 핏빛의 도(刀)로 변했다. 좁고 가는 도의 날은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 손에 기괴한 칼날을 들고 있는 건 노마를 향해 거대한 은빛 초승달이 날아들었다. 그러자 그의 수중에 있던 핏빛 도가 사라지며 도끼에서 뿜어낸 빛을 막아섰다.
한립의 예상과 달리 핏빛과 은빛이 치열하게 교전하면서 애달픈 울음소리만이 들려왔을 뿐 다른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 오자동심마들이 중간으로 모여 들더니 다섯 개의 백골들이 하나로 합쳐져 큰 거대 백골로 변해 건 노마 앞을 막아섰다.
채챙!
그 순간 핏빛 칼날이 부서져 나갔고 은색 도끼의 빛이 기세를 몰아 건 노마 쪽으로 쇄도했다. 그러나 오자동심마들이 합쳐진 거대 백골은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입에서 회색 기운을 분출했다.
회색 기운이 초승달 모양의 빛을 머금으니 놀랍게도 도끼에서 방출된 빛이 물에 빠진 듯 허우적댔다.
은색 도끼 빛이 짧게 울부짖고는 순식간에 회백색 기운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회백색 빛은 그대로 허공을 선회해 다시 거대 백골의 입속으로 돌아갔다.
“예음마기(穢陰魔氣)! 오자동심마가 이런 신통을 부릴 수 있다니 저들도 생전에 원영기 수사였겠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위력을 낼 수 없을 테니까요.”
규령이 변한 거인이 회백색 기운을 보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노부가 무엇으로 오자동심마들을 제련했는지는 네가 알 바 아니다. 기왕 예음마기의 위력을 알아보았다니 합체한 마귀들의 다른 위력도 구경이나 하거라.”
건 노마가 냉소하며 손을 뻗어 법결을 거대 백골에게 날렸다.
거대 백골이 낮게 울부짖으며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그대로 박차 올라 규령이 변한 거인에게 달려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쿵쿵대며 울려댔다.
한립이 그것을 지켜보다 삼염선 대신 양환을 던졌다.
찰나의 순간 북극원광이 형성한 은색 물결이 일어나 빽빽하게 거대 백골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백골은 스산한 비명을 질러대며 전신에 회색 보호막을 둘렀고 조밀하게 밀려들었던 북극원광들은 분분히 흩어지며 보호막을 어쩌지 못했다.
한립이 얼굴을 굳히며 양환에 더욱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은색 광선들이 도중에서 한데 얽혀 수십 개의 은색 사슬로 변해 사라진 것이다.
푸푸푸푸푹!
거대 백골의 몸에 열댓 개의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렸고 심지어 머리 앞쪽을 관통해 뒤쪽으로 빠져나오는 사슬도 있었다.
이번에는 예음마기로 만들어진 보호막이 은색 사슬을 막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순간 희색을 보이던 한립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거대 백골은 부상을 입고 몸을 떨었지만 다시 회백색 기운이 흐르자 구멍이 스스로 막혀 복구되었다. 평범한 수사라면 벌써 목숨을 잃었을 치명적인 공격이 백골에게는 소용없었다.
한립은 건 노마를 죽이지 않고는 오자동심마를 처리할 수 없겠다고 확신했다.
거대 백골의 속도가 그리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풀쩍 풀쩍 뛰어 금세 규령의 코앞에 당도했다.
백골이 체내의 늑골 두 개를 빼내 하얀 칼날을 만들어 휘두르자 청록색 화염이 나타났다. 이에 규령이 변한 거인은 냉소하며 앞으로 나아가 수중의 거대 도끼를 휘둘렀다.
콰쾅!
그러나 거대 백골의 뼈로 만들어진 칼날이 교차하며 거대한 도끼를 막아냈다.
규령은 별 다른 표정 변화가 없다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호서(虎噬)!”
그러자 거대 도끼의 표면에서 커다란 요수의 머리가 나타났다. 머리에 뿔이 난 백호의 머리였다.
요수가 커다란 입을 벌려 전광석화처럼 백골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그것은 으적으적 백골 머리를 씹어 삼키고는 순식간에 도끼 속으로 사라졌다.
은색 도끼는 그 자체로 흉흉한 무기일 뿐 아니라 기령(器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핏빛 그림자로 변한 건 노마는 물론이고 한립도 깜짝 놀랐다.
규령이 이에 그치지 않고 수중의 도끼를 방망이처럼 휘둘러 머리 없는 백골을 공격했다. 날카로운 도끼날에 실린 엄청난 완력에 거대한 백골이 조각나 떨어져 내렸다.
도끼를 멈춘 규령이 입을 벌려 노란색 화염을 바닥의 뼛조각을 향해 뿜어냈다. 이참에 아예 오자동심마를 끝장낼 작정인 듯했다.
그러나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건 노마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잠시 후 건 노마가 수결을 맺으며 마공을 펼쳤다.
노란 화염 속에서 활활 타오르던 뼛조각에서 서늘한 돌풍이 일더니 다섯 개의 검은 실이 투명하게 떠올라 빠져나와 열장 밖에서 폭발했다. 회백색 기운들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뭉쳐 백골 다섯 개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화마무형(化魔無形)! 마귀의 화신에게 이런 신통까지 익히게 하다니 거꾸로 반격을 당해 잡아먹힐 것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반서(反噬)가 두려워 몸을 사릴 필요가 있느냐? 노부가 조심만 하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텐데!”
건 노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으면서 마공을 통제했다.
별안간 다섯 구의 해골들이 뛰어 올라 다시 거대한 해골로 합쳐졌다. 그리고 다시 두 개의 늑골을 뽑아 다시 규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규령도 도끼의 기령을 불러내지 않고 거대한 도끼날로 상대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거대한 거인들 사이에서 거센 진동과 빛이 튀어나오며 곤오전 전체가 흔들렸다.
한립은 그들의 대결을 유심히 주시했다.
규령이 법력을 회복해 몸을 키웠으니 북극원광에 별 다른 피해는 입지 않겠지만 그래도 거대 백골보다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 전투는 속전속결로 하는 것이 좋았다.
한립은 멀리 떨어진 핏빛 그림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나워졌다. 그의 의식을 감지한 양환이 머리 위에서 몸을 떨며 은색 사슬을 만들어 조용히 움직였다.
이때 건 노마도 한립과 규령을 어찌 상대해야할지 고심 중이었다.
그가 고민하던 사이 은색 사슬이 아주 가까이 다가갔지만 곤오산 전체에 펼쳐진 금제의 영향으로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야 기운을 감지했다.
그가 서둘러 피하려고 했지만 은빛이 번뜩이며 핏빛 그림자를 관통했다. 화들짝 놀란 건 노마가 자신의 몸을 관통한 은색 사슬을 내려다보고는 냉소했다.
이 정도 상처를 회복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은색 사슬은 몸을 관통한 채 사라지지 않고 빛을 방출했다.
“……!”
건 노마의 안색이 달라졌다.
“이미 늦었습니다.”
한립의 목소리가 들리고 은색 사슬이 독사처럼 핏빛 그림자를 휘감아 엄청난 힘으로 그의 몸을 조각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