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1
581화. 기습
“…….”
한립이 냉소하며 허리춤을 스쳤다. 검은 반지가 나타나 그의 주위를 돌며 미친 듯 커지더니 곧 직경이 한 장에 이르는 거대 고리로 변했다.
표면에 반짝이는 주술과 부호들이 비범했는데 바로 양의환 중 하나였다. 한립이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자 거무튀튀한 보호막이 퍼져 나와 그를 완전히 감쌌다.
그 모습에 건 노마의 웃음소리가 그쳤고 다른 수사들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설마 북극원광을 지나갈 방법이 있는 건가!”
그들의 놀란 눈빛을 받으며 한립은 그대로 북극원광 속으로 들어갔다. 은색광선들이 보호막을 만나면 괴이하게 구부러져 그를 비켜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립은 그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어서 속도를 높이시지요! 저 녀석이 보물을 차지하겠습니다.”
은시야차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무리 빨리 베어내도 어차피 북극원광이 막고 있어 들어가지 못하지 않습니까!”
갈천호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흥! 다른 이들은 몰라도 겨우 북극원광으로 노부를 막을 수야 없지.”
건 노마가 서늘하게 중얼거리더니 오자동심마가 변한 거대한 하얀 그림자가 즉시 남은 금자영목 사이를 지나가려 했다.
“대장로님!”
갈천호 등 다른 이들이 놀라 소리쳤다.
거대 그림자도 금자영목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열댓 장을 넘지 못하고 거대한 압력에 못 견뎌 바닥으로 추한 것이다.
“흐압!”
그런데 이상한 굉음이 하얀 그림자의 입에서 울려 퍼지더니 그 안에서 핏빛 그림자가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열 걸음을 나아갔다.
금제의 압력에 한층 느려지기는 했지만 핏빛 인영은 한 걸음 한 걸음 곤오전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에 요물들이나 인간 수사들이나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규 수사의 힘을 빌려야겠습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움직이시죠!”
은시야차가 고민 없이 추한 부인에게 전음을 날렸다. 규 부인이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바닥을 굴러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거대한 거북으로 변했다.
요수의 원형을 드러낸 것이다.
사금수와 은시야차가 재빨리 그 위에 앉자 거대 거북이 금자영목의 영향권 내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금수와 은시야차는 신형이 고꾸라져 꼼짝하지 못했지만 전신이 검은색과 흰색이 섞여 빛나는 거북은 느리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괴이한 금색 주술들이 나타나서는 세 요수들을 파고 들었다. 아무리 보호막을 펼쳐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나마 거대 거북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은시야차와 사금수는 주술이 몸을 파고들 때마다 안색이 초췌해졌다. 그러나 남은 금자영목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거북은 금방 그곳을 지나갈 수 있었다.
거대 거북이 금자영목을 통과하자마자 거북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안색도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금자중광에 적잖이 원기를 상한 듯했다.
세 요물이 지체 없이 곤오전 안으로 몸을 날렸다.
이때 먼저 들어간 건 노마의 핏빛 그림자는 무수히 많은 은색 광선으로 만신창이가 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핏빛 그림자의 몸에서 눈을 찌를 듯한 빛이 분출되어 몸의 구멍을 메꾸었다.
순식간에 북극원광 속으로 건 노마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요물들도 미리 계획한대로 움직였다.
사금수가 앞으로 나서더니 커다란 입을 벌렸고 금색 파동이 사금수의 입안에서 소리 없이 방출되어 닿는 족족 은색 광선을 잘라냈다.
이어 은시야차가 날개를 펄럭여 푸른 돌풍을 만들어냈고 잘려진 은색 광선들을 날려 보냈다. 이렇게 빈 공간이 생겨나자 세 요수도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곤오전 밖에는 천란 성녀 일행과 갈천호 밖에는 남지 않았다. 임은병이 입술을 깨물며 서 씨 청년을 돌아보았다.
“서 형, 그럼 이제 저희는…….”
“그리 조급해 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야 한 가 녀석이 목적이니 저 안에 무슨 보물이 있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리 많은 자들이 들어갔으니 누구 하나 보물을 독식할 수도 없겠지요. 그저 나머지 영목들을 없애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서 씨 청년이 옥으로 만들어진 비검으로 거대한 나무를 공격하며 말했다.
“허허! 맞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보물을 가진 자도 이곳으로 나올 수밖에는 없을 테니까요!”
갈천호가 박장대소하며 그의 말을 반겼다. 임은병이 대전 안의 은색 광선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이들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무를 베어내는 데만 집중했다.
같은 시각, 한립은 곤오전 깊은 곳에서 길게 탄식하며 뒤쪽의 은색 광선들을 보고 있었다.
“상고 수사들이 교활하기 이를 데 없구나. 북극원광 속에 환영진을 설치해 두다니! 명청영안이 아니었다면 빠져 나오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이야.”
그가 앞을 바라보자 그리 넓지 않은 면적에 열댓 개의 나무 의자가 놓여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나무 의자들 끝에는 금색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는 벽옥 탁자가 있었다.
의자들은 그렇다 치고 옥으로 만든 탁자는 전신이 비취색으로 빛나며 농염한 영기를 분출하는 것이 절대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위로 펼쳐진 녹색의 보호막 사이로 몇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곤오전의 보물인가!’
한립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금색 의자 뒤편에 세 사람이 등을 돌리고 밤하늘을 바라보는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승려, 도사, 유생의 옷차림을 한 세 사람은 대나무 숲 어딘가에 서서 보름달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겨우 한 척 길이에 세월이 흘러 노르스름해진 그림에서는 전혀 영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립은 그것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마음이 왠지 불안했던 것이다. 그가 한 손을 뻗어 기다란 금빛을 날리자 그림이 갈가리 찢어졌다.
금빛이 가시고 나니 세 사람이 달을 바라보던 조각들이 바닥으로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한립이 주저했다.
‘괜한 생각을 한 것인가? ’
그렇다고 이대로 놔둘 생각도 없어 불덩이를 만들어 그림의 잔해들을 태워버리려는데 머릿속의 은월의 외침이 들려왔다.
“조심하세요, 주인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즉시 신형을 모호하게 하고 일고여덟 개의 환영을 방출했다. 그러자 그의 뒤쪽 벽에서 폭음이 들리며 그와 똑같은 모습을 한 환영 몇 개가 금은색 빛에 가슴이 뚫렸다.
유일하게 탕! 하는 소리가 울린 쪽에서는 무언가가 은색 빛을 막아 냈다. 빛이 가시고 보인 금은색 빛의 정체는 날카로운 베틀 북 모양의 법보였다.
공격이 실패하자 베틀 북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서 일곱 장 뒤로 돌아갔다. 한립은 놀랍기도 했지만 화가 치밀었다.
순간적으로 원강순(元罡盾)을 불러내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가 곧바로 방패를 들지 않은 다른 손을 털어내자 수십 개의 금색 검들이 비처럼 쏟아져 부서진 벽의 지하를 향해 쇄도했다.
그러자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리며 금색과 은색이 섞인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고 그의 검빛들은 그것 대신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
한립은 놀라 노기를 가라앉히고 의식을 집중했다.
거대한 물체는 수 장 크기의 베틀 북으로 금빛이 찬란했지만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를 기습한 법보와 똑같이 생겼지만 훨씬 규모가 방대했다.
“정말 방비가 철저하십니다. 이렇게 불시의 공격을 가했는데도 전혀 상한 데가 없으시다니요. 어떤 공법을 수련하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방금 한립을 공격했던 작은 금은색 베틀 북이 거대한 베틀 북 속으로 사라지자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자신의 비검들을 회수한 후 돌연 푸른 빛줄기로 변해 탁자로 날아갔다. 이렇게 수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면 일단 보물을 차지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여인의 목소리가 낯설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요물들과 건 노마 말고도 먼저 곤오산에 들어온 수사들이 있는 듯했다.
한립의 기민한 움직임에 당황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이미 스무 장을 이동해 당장이라도 탁자에 이를 것 같았다.
그 순간, 한립의 머리 위에서 푸른 기운이 번뜩이더니 주술이 빼곡하게 적힌 푸른 손수건이 그를 덮쳐왔다.
한립은 서둘러 원광순을 발동해서 하얀 보호막을 둘렀다. 푸른 손수건을 조종하며 나타난 인물은 과선종의 목 부인이었다.
그녀도 한립이 삼염선을 지녔기에 오래 가둬두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습이 성공한 것을 확인한 목 부인이 즉시 하얀 빛줄기로 변해 탁자로 향했다.
그녀는 은색 방패를 들고 녹색 탁자 위에서 은빛을 방출했다. 두꺼워 보이던 보호막이 은빛에 눈 녹듯 녹아내렸고 그 안의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겹겹이 겹쳐져 있는 핏빛의 나무 영패 네 개와 보라색 검, 손바닥만 한 항마장 지팡이, 붉은 빛을 띠는 서책과 청록색 도장이었다.
특히 청록색 도장의 표면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용이 새겨져 있었다. 목 부인이 희색을 드러내며 즉시 인장을 향해 소매를 펄럭였다.
목 부인이 막 보물들을 취하려는데 돌연 땅에서 녹색 뱀들이 치솟아 그녀를 물어뜯으려 했다.
퍽!
그녀가 몸에 지니고 있던 보물이 자동으로 하얀 보호막을 펼쳐 그것들을 튕겨내자 녹색 뱀들의 원형이 드러났다. 그것은 뜻밖에도 녹색의 덩굴들이었다.
이에 목 부인은 깜짝 놀랐다.
기습을 노리고 숨어있는 그녀들을 노린 또 다른 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한립을 가두고 탁자의 보호막을 거둘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습하다니!
거대 베틀 북인 일월사의 뒤를 따르면서 기운을 전혀 드러내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들이 소리 소문 없이 이곳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곤오삼노가 남겨 놓은 은색 영패 때문이었다. 은색 영패를 이용해 대부분의 금제를 잠시 억제 한 후, 일월사를 이용해 다른 수사들을 앞질러 나간 것이다.
이상한 웃음을 흘리며 녹색의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인근에서 나타났다. 감정 없는 냉랭한 눈으로 목 부인을 바라보는 통에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목괴(木魁)가 인계에 남아 있었다니!”
녹색 괴물은 손발과 머리를 갖춰 사람 같아 보였지만 전신이 나무 껍데기로 뒤덮여 있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였다.
목괴가 목 부인의 탄성에 조소하더니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탁자로 날아갔다. 그도 곤오전의 보물을 노리고 온 듯했다.
놀란 목 부인이 무언가 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 순간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탁자 옆에 떨어져 있던 그림 조각들이 돌연 빛나더니 노란색, 하얀색, 붉은색의 세 개의 빛줄기를 분출한 것이다.
그 빛에 닿자마자 나무껍데기로 뒤덮인 목괴가 공처럼 튕겨나갔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목괴가 두려운 눈빛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세 줄기의 빛은 탁자를 선회해 키가 한 장 정도 되는 난쟁이들을 불러냈는데 달을 쳐다보고 있던 승려와 유생 그리고 도사와 똑같은 복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목괴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곤오삼노!”
목괴가 대경실색해서 소리치며 당장 녹색 빛줄기로 변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세 난쟁이들이 조용히 탁자 위의 검과 항마장 그리고 서책을 가리켰다. 그러자 세 개의 보물이 몸을 떨더니 각각 보라색, 노란색, 붉은색의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목괴의 뒤쪽에 나타나 거침없이 목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쿠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