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0
580화. 융혼(融魂)
금제 속의 검은 늑대의 눈에서 번뜩이던 보랏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곧 늑대의 입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혈염, 너로구나! 벌써 성계로 돌아간 줄 알았더니 아직까지 인계에 남아 있었던 것이냐.”
여인의 음성은 향지례가 곤오산에 들어왔다 마주친 여인과 비슷했지만 조금 더 냉랭했다.
“성조 대인을 뵙습니다. 돌아갈 때를 놓쳐 인간들에게 죽음을 당할 뻔 했지요. 그들이 제가 성계로 통하는 통로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 추혼술로 고문하려 들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마가 공손히 답했다.
“운이 좋았구나! 영묘원으로 통하는 공간 균열은 우리가 인계로 진입한 이후 벌써 부숴버렸는데 어찌 통로가 남아있을까.”
검은 늑대 머리가 인마대전(人魔大戰)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상고 시대 때 상고 수사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는 고마인가? ’
대두 괴인은 옆에 서서 고마가 거대 늑대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여인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고 마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기이했다.
“이곳까지 왔으니 계획이 있을 테지? 미리 말해 주건데 이곳에서 나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나를 구속하고 있는 대주천성진련(大周天星辰鏈)만 해도 네 수행으로는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영계에서 성족을 겨냥해 만든 보물이거든.”
검은 늑대 머리가 몸에 둘러져 있는 검은 쇠사슬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성조님 안심하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기 엽 수사의 도움으로 이미 마기(魔器)들을 여러 개 모아왔으니 사슬을 깨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마는 미리 계획한 바를 이야기 했다.
“마기가 있다면 대주천성진련을 깨트리는 것이 불가능 하지는 않겠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장은 무리일 것이다.”
“어째서 입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 사슬이 나를 구속하는 것들 중 가장 강력한 금제가 아니기 때문이지. 너희가 서 있는 곳을 보거라.”
“저희가 서 있는 곳이요?”
고마와 대두 괴인은 자신의 발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올 때 사용한 전송진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 낼 수 없었다.
“이곳이 정말 독립된 공간이라고 생각하느냐? 통천령보의 힘을 빌려 8층의 어딘가에 격리된 것에 불과하다. 너희가 나를 구하려 한다면 보물이 즉시 이곳에서 너희를 내보내겠지. 그렇게 되면 다시 이곳에 들어오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곳에 이리 오래 갇혀 있었던 것은 이 은월랑족의 육체 때문이다.”
검은 늑대 머리가 아직 잠들어 있는 다른 머리를 바라보았다. 대두 괴인과 고마는 그것만으로도 대충 무슨 일이 있는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은월랑 요수의 원신은 성조님께 잡아먹힌 것 아닙니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고마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당시 내가 잡힌 이유도 다 이것 때문이었다. 은월랑 요수가 주(主) 원신을 두 개나 가지고 있었더구나. 그 중 하나가 내게 중상을 입고 육체를 떠나자 안심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원신이 비술을 펼쳐 몸의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게지. 내가 곤오삼노들과 싸우는 틈에 발작해 결국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드디어 검은 늑대 머리도 분노를 표했다.
“주원신이 두 개였다니, 한 육체에 영혼이 두 개인 꼴 아닙니까?”
대두 괴인이 그 말에 놀라 물었다.
“인간 수사가 아는 것이 꽤 많구나. 이 늑대 요수는 확실히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혼백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머리도 하나뿐이었는데 두 번째 혼백이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 즉시 두 번째 머리가 솟아났지. 괴이한 공법을 수련해서 나도 한동안은 두 번째 혼백의 몸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지.”
검은 늑대 머리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 두 번째 혼백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당연히 아직 살아있다. 인간 수사들이 나를 포획하고 이 은월랑 요수가 뜻밖에도 영계 칠대요왕(七大妖王) 중 하나인 천규신랑(天奎神狼)의 왕비인 것을 알았지! 당시 몇 안 되는 진짜 육체를 가지고 강림한 요수 중 하나였어. 내가 이 몸을 쉽게 빼앗을 수 있었던 것도 인계에 강림한지 얼마 안 돼 원기가 크게 상한 덕분이었지.
두 번째 혼백에 대해 몰라 이런 꼴을 당했지만 이 몸을 차지하고 시간이 흘러 거의 절반의 육체를 마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인간 수사들은 나를 육체와 같이 죽이지도 못하고 나를 몸 밖으로 빼내지도 못해 결국 이 진마탑 속에 봉인할 수밖에 없었지.”
“결국 그 늑대의 두 번째 혼백이 아직 체내에 있다는 것이로군요.”
고마가 쓴웃음을 지으며 네 개의 눈으로 은백색 늑대의 머리를 응시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돌아올 것이야. 하필 이때 나를 깨운 너희도 운이 좋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대 수사들은 흑풍기로 만들어낸 영기가 차단된 공간에 나를 봉인하는 동시에 늑대 요수의 두 번째 혼백은 영기가 충만한 궁전에 따로 모셔두었지. 요수 왕비가 나와 육체의 통제권을 두고 싸우다가 그곳으로 돌아가 원기를 보충할 수 있게 말이야. 그러니 본래 지니고 있던 마기로는 상대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융령대법(融靈大法)을 사용해 저항할 수밖에 없었지!”
고마의 물음에 검은 늑대 머리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설명했다.
“융령대법이요? 그렇다면 이미…….”
“그래, 이미 그녀와 하나가 되어 새로운 혼백이 되었다. 게다가 그녀가 주의식이고 나는 보조 의식일 뿐이고 말이야. 그래서 고대 수사들이 그것을 보고 나를 쫓아내지도 특수한 신분이었던 요수의 몸을 죽이지도 못해 곤오산 전체를 봉인해 가두어 버린 것이다.
만여 년이 흐르고 융합이 안정되었고 이제는 거의 완벽한 경지에 이렀었지.
하지만 며칠 전 몰래 이곳에 잠입한 화신기 수사 한 명을 환묘천상 속에 끌어들이느라 그 새로운 혼백이 의식에 큰 타격을 받았고 나와 늑대 요수의 혼백이 다시 한 번 갈라져 나올 수 있었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이겠지. 늑대 요수의 두 번째 혼백이 원기가 충만한 상태로 깨어나면 다시 하나로 융합될 것이다.”
검은 늑대 머리는 시종일관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무덤덤했다. 그저 듣고 있는 고마와 대두 괴인만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조 대인, 융합되어 새롭게 탄생하는 영혼은 요수입니까 아니면 우리 성족의 일원입니까?”
고마가 한참을 생각하다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예상치 못하게 검은 늑대머리가 반문하자 고마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기왕 우리에게 이리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으니 막을 방도도 있으시겠지요? 그게 무엇이든 말씀을 해주십시오.”
“오, 그러고 보니 아직 네게 묻지 않았구나. 인간 수사가 혈염을 도와 이곳에 오다니 무슨 일이지? 육체의 생기가 얼마 남지 않은 듯한데 본 성조가 마기를 주입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더냐?”
검은 늑대 머리가 보라색 눈을 빛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미 알고 계시니 속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영원히 마도를 걷게 되더라도 세상을 뜨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죽을 거라면 천 년에 가까운 고된 수련과 목숨을 무릅쓴 모험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이대로는 먼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대두 괴인이 숨김없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아주 솔직하구나! 결심이 섰다면 본 성조가 이곳에서 벗어나는 대로 마기를 주입해 주마. 미리 말해 주건데 마기를 주입해도 수행이 늘어날 가능성은 절반뿐이다. 물론 성족의 수명이 인간 수사들을 훨씬 초월하니 남은 시간 동안 스스로 수행해 화신기에 이를 수 있겠지.”
검은 늑대 머리가 대두 괴인을 훑어보았다.
“절반이 아니라 십분의 일의 확률이라고 해도 시도해볼 것입니다. 제가 어찌 하면 빠져나오실 수 있게 도울 수 있을지 알려주십시오.”
“좋다. 융령대법 때문에 늑대의 혼백이 몸으로 돌아오면 별 다른 술법을 시행할 것도 없이 나와 융합될 것이다.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늑대의 혼백을 먼저 죽이는 것인데, 그 은월랑족의 혼백이 잠들어 있는 곳은 곤오삼노가 친히 만들어 놓은 81개의 마도(魔刀)로 이루어진 진법 안에 있지.
마기(魔氣)를 지닌 자가 접근하면 거대한 칼날들이 동시에 공격을 가해 죽을 수밖에 없다. 혈염은 그 진법을 깨트릴 방법이 없지만 너는 다르지. 정도 공법은 아니더라도 사도 공법이나 마공을 익히지는 않았으니 문제가 없을 것이야. 네가 이 일을 해결해 준다면 본 성조가 책임지고 마기를 주입해 주마.”
검은 늑대 머리의 목소리는 이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대두 괴인에게는 무엇보다 유혹적으로 들려왔다.
“늑대의 혼백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고민하던 엽 가 괴인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뜻밖에도 이것을 빌미로 다른 거래를 하려는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현명한 선택이다. 이곳에 들어오며 보았던 두 개의 전송진 중 나머지가 늑대의 혼백이 있는 궁전으로 통하지.”
“그곳이라면 독성문 녀석들이 먼저 들어가 있지만 몰래 손을 쓴다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가서 늑대의 혼백을 죽이겠습니다.”
대두 괴인이 전송진에 서서 수결을 맺으니 빛이 일어 그가 전송되어 나갔다. 이제 전송진 근처에는 고마만 남아 있었다.
“인간 수사가 있어 물어 보지 못했구나. 네가 수집한 마기가 몇 개더냐?”
괴인이 사라진 후 검은 늑대 머리가 음산한 기운을 드러냈다. 온 몸의 사슬들이 순간적으로 웅웅 울어대며 무수히 많은 날카로운 빛을 발산해 늑대의 체내에 찔러 넣었다.
하지만 검은 늑대는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성조님께 아룁니다. 당시 성족이 인계에 남겨 두었던 마기를 이미 다섯 개나 찾아 두었습니다.”
“다섯 개라면 간신히 될 것도 같구나. 즉시 시작하거라! 지금은 법력의 절반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 이곳에서 나가면 흑풍기의 금제를 깨는 것도 가능할 것이야. 제 아무리 통천령보라 해도 주인이 없는 물건은 그저 죽은 물건일 뿐이지.”
검은 늑대 머리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예!”
고마가 대답을 하고는 주저 없이 네 개의 팔을 허공에 휘둘렀다. 동시에 검은 빛이 반짝이더니 허공에 거무튀튀한 마기들이 나타났다.
검은 거울, 핏빛 화살, 옥으로 만든 연꽃과 회백색 고리였다. 그리고 두 머리 중 하나가 입을 벌리자 그 안에서 새까만 작은 병이 분출되었다.
다섯 개의 마기가 나타나 고마의 머리 위를 선회하더니 고마의 머리 중 하나가 길게 울부짖으며 전신의 마기를 증폭시켰다.
그리고 다섯 개의 마기를 지니고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에 금제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즉시 빛이 거세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립은 거대한 상고 고마가 진마탑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도 모르고 곤오전 입구에 도착했다. 안의 상황을 본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북극원광? 어찌 이게 여기에…….”
빽빽하게 뻗어나가는 은색 빛의 실이 추마골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이번에는 암석에서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백 개가 넘는 돌기둥에서 분출이 되고 있었지만.
은색 광선들이 어찌나 빼곡한지 그 뒤쪽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때 한립의 뒤에서 건 노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사! 지금이라도 스스로 북극원광에 뛰어들 것인지, 아니면 내가 법보를 받을지 선택해야 합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곤오전 입구 너머로 양쪽에 심어져 있던 금자영목이 이제 열댓 그루 밖에 남지 않았다. 건 노마와 은시야차 등이 거의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멀리서 이곳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북극원광의 존재를 알았던 요물들도, 견문이 풍부한 다른 이들도 곤오전 내부의 북극원광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대다수가 걱정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북극원광이 막아 한립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들도 북극원광을 지나기 어려웠다.
건 노마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한립을 비웃어댄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