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7
577화. 청동사자
길고 긴 곤오전 계단을 오르다 보니 한립도 거의 한식경이 지나서야 돌숲에 이를 수 있었다.
돌숲은 몇 장 높이의 기다란 돌기둥들이 빼곡히 차있었는데 표면에 주술, 부호가 새겨진 기둥들이 미약하게나마 영기를 발하며 커다란 진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본래 완전히 막혀있어야 할 돌기둥들이 지금은 태반이 허물어져 있었다. 이미 누군가 완력을 이용해 부수고 지나간 것이다.
냉랭히 그곳을 살피던 한립이 즉시 안으로 들어갔다. 돌숲은 그리 넓지 않아 조금만 가도 끝이 보였는데 경사가 진 암벽이었다. 암벽은 거대한 석회암을 깎아 만들어진 비탈로 양쪽에 다양한 석상들과 무기 같은 것들이 난잡하게 놓여 있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백장 밖에 분지가 보였고 그곳에서 은은하게 영기의 빛과 폭음 등이 전해왔다. 누군가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건 노마가 다른 수사들과 싸우는 걸까?”
한립은 경신술을 이용해 질주하며 기운을 숨기고 신형마저 흐릿하게 만들어 사라졌다. 그렇게 소리 없이 광활한 대지에 도착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한립은 멍해졌다.
하얀 기운이 서린 거대한 빛의 장막 속에서 다섯 줄기의 하얀 그림자와 노란 그림자 그리고 두 개의 푸른 그림자가 맹렬히 싸우는 중이었다.
하얀 그림자 다섯은 노마의 화신인 오자동심마일 텐데 입에서 회색 기운을 내뿜으며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러댔다.
그리고 노란 그림자는 중년 수사로 전신에 하얀 뼈 고리를 감고 그곳에서 노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백골 고리가 회색 기운을 공격하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는 동안 중년 수사는 비검을 들고 필사적으로 오자동심마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푸른 그림자 둘은 한 장 크기의 청동사자들이었다. 그것들은 오자동심마나 중년수사나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들어 물고 할퀴어 댔는데 그 속도가 극히 빨랐다. 가끔 입을 불려 푸른 빛기둥을 쏘아대는 모습이 무척 사나워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청동사자의 원거리 공격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무척 꺼리는 눈치였다. 워낙 몸이 빠르고 두 마리의 꼭두각시 요수가 단합하여 달려드니 가끔은 상대 수사를 놔두고 서로 청동사자를 향해 공격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청동사자들의 푸른 몸뚱이는 창칼이 통하지 않았고 회색 기운에도 몇 걸음 물러날 뿐 상처를 입지 않았다.
게다가 하얀 기운이 어린 빛의 장막도 이상해서 표면에 은색 뇌전이 흐르며 누구든 가까이 다가오면 빗방울처럼 뇌전을 발산했다.
오자동심마나 백골 고리로 몸을 보호한 수사들은 뇌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곳으로 가까기 다가가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니 싸움은 더욱 격렬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이게 뭐야? ’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원영 중기 수사는 방어를 맡아 주는 괴이한 백골 고리가 아니었으면 벌써 오자동심마에게 잡혀 온 몸의 피를 다 빨렸을 것이다.
그리고 청동사자들을 조정하는 주인이 없어 꼭두각시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수사들 사이의 전투가 일단락되면 누구든 청동사자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거대한 분지 지형 옆으로는 빛이 번뜩이는 것이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들이 싸우고 있는 곳이 곤오전으로 가는 유일한 입구일 것이다.
한립이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잠시 후면 서 씨 청년 등이 쫓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는 이미 삼염선이 들려 있었다. 그는 부채의 위력으로 강제로 결계를 열어 사라질 작정이었다. 분명 싸우고 있는 두 수사에게 발각이 되겠지만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한립이 심호흡을 하며 부채에 법력을 불어 넣으려다가 저 멀리 무언가를 보고 경악했다.
‘착각인가? ’
그가 이상한 영기의 파동을 감지하고 명청령안의 신통을 발휘했다. 그 결과 받침돌 뒤쪽으로 붉은 요괴의 눈이 분명히 보였다.
‘은시야차!’
그가 붉은 요괴의 눈을 바로 알아보고 눈에 더욱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붉은 눈 뒤쪽으로 요물들이 싸우고 있는 수사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산 전체의 금제로 인해 의식이 제안되고 한립이 무명구결로 기운을 감추었기 때문에 아직 그의 존재를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은시야차 옆에 모호하게 보이는 것들은 산 아래에서 한 번 본적 있는 사금수와 낯선 얼굴의 인간형 요수였다. 저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곤오전에 저들이 노리는 보물이라도 있는 건가? ’
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탈 아래 돌숲에서 희미하게 영기의 빛이 반짝였다. 서 씨 청년 등이 벌써 돌숲을 지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주저 할 수 없었기에 그가 법력을 불어 넣었다.
파앗, 쿵!
부채에서 나온 삼색의 화염이 마치 도검처럼 빛의 장막을 베어나갔다. 비록 그가 부채의 위력을 조절했지만 삼색 화염과 금제가 접촉하는 순간 폭음이 들리고 요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매복해 있던 은시야차 등 세 마리의 요물과 빛의 장막을 앞에 두고 싸우던 건 노마와 중년 수사들이 화들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행적이 노출된 한립이 즉시 푸른빛으로 변해 결계에 뚫린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비행을 억제하는 금제가 걸려 있었지만 가히 번개 같은 움직임이었다.
“감히!”
건 노마가 소리치자 중년 수사를 공격 하던 하얀 그림자 다섯 중 셋이 신형을 떨며 사라졌다. 괴이하게도 한립 앞에 나타나 음산한 녹색 눈을 번뜩인 것이다.
“비키거라!”
푸른 빛줄기 속의 한립이 일갈하자 굵은 금색 뇌전이 튀어나왔다. 허공에서 한 바퀴 돈 뇌전은 금색 교룡으로 변해 하얀 그림자들을 덮쳐왔다.
“벽사신뢰!”
건 노마가 바로 금색 뇌전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입에서 마기를 방출해 한립의 공격을 막으려던 화신들이 서둘러 신형을 번뜩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행이 금색 교룡이 허공을 지나쳤고 한립도 그 틈을 노려 빛의 장막 앞에 이를 수 있었다.
꽝! 꽈광!
빛의 장막이 한립이 접근하는 것을 감지하고는 천둥소리와 함께 뇌전을 마구 쏘아댔다.
“가라!”
금빛 교룡이 그에게 날아들어 폭발했고 금색 그물이 허공에서 나타나 한립의 전신을 감쌌다. 그제야 은색 뇌전들이 도달했지만 하나마나한 공격이었다.
“한립, 네 이 놈!”
“한 장로? !”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건 노마와 중년 수사가 동시에 무어라 중얼거렸다. 한립은 힐끗 중년 수사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부지런히 손에 든 부채를 움직였다.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삼색의 불덩이가 나타나 빛의 장막에 구멍을 크게 키운 것이다.
비로소 무사히 금제를 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서 씨 청년과 임은병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들은 혼란스런 상황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한립이 그들을 바라보며 냉소했다.
“기왕 모두들 모이셨으니, 여러분이 한가하지 않게 할 일을 드리고 가겠습니다.”
묘한 말을 남기며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금빛 뇌전이 날아갔다. 그리고 뇌전이 눈에 띄지 않던 섬돌 뒤에서 폭발하자 즉시 은시야차와 사금수 그리고 추한 얼굴의 여인이 나타났다.
“사금수!”
서 씨 청년이 세 요물 중 가장 먼저 사금수를 알아보았다. 임은병 등 다른 수사들도 화들짝 놀라 경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장로님!”
시차를 두고 뒤따라오던 갈천호 등이 오자동심마를 알아보고 희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가장 놀란 것은 멀쩡히 숨어 있다가 모두에게 발각당한 요수들이었다.
은시야차는 한립에게 거의 목숨까지 잃을 뻔했기 때문에 이를 갈며 속으로 욕을 해댔다. 자신의 은신술을 번번이 꿰뚫어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 요수들이 인간 수사들의 삼엄한 눈빛에 난감해졌다.
상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인간 수사들이 자신들을 대신해 결계를 뚫고 빨리 나아가기를 바랐는데 정체를 들켰으니 어찌할지 다시 고민해봐야 했던 것이다.
서 씨 청년은 은시야차와 추한 부인을 살피며 마음이 요동쳤다. 화형(化形)까지 한 두 요물의 요기가 굉장했던 것이다.
건 노마와 엽 가 장로 역시 갑작스런 사태에 싸움을 멈추었으나 청동사자는 여전히 그들을 공격했고, 어쩔 수 없이 상대해줘야 했다.
한립은 이런 혼란스런 국면을 뒤로하고 신형을 날렸다. 지금이야말로 먼저 보물을 차지할 기회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벽옥으로 만들어진 산문 앞에 도착했다.
산문은 굉장히 특이해서 양 쪽으로 길게 늘어선 커다란 나무들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들 사이로 새하얀 돌길이 이어져 있는데 천여 장 정도 길을 따라 걷다보면 웅장한 궁전이 나왔다.
“저곳이 곤오전인가!”
한립이 중얼거리며 차분히 주위를 살피다 양측의 나무들로 시선을 돌렸다.
2, 30장 되는 나무들은 이파리도 가지도 전부 말라 비틀어졌는데 도리어 왕성한 생명력이 느껴져서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의식을 이용해 가능한 범위를 전부 살폈지만 금제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즉시 곤오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겨우 열 장 정도 달렸는데 돌연 몸이 부르르 떨리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마치 양 어깨를 누가 누르는 듯 백옥색 돌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온 몸의 떨림이 심해지며 뼈와 살이 압착되는 기분이 들었다.
한립은 식겁했다.
그가 명왕결을 수행했고 천시주를 품고 있어서 망정이지 다른 수사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이 길에 들어섰다면 뼈가 으깨지고 바닥에 엎어져 꼼짝도 못했을 것이다.
‘분명 아무런 금제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한립이 속으로 앓는 소리를 하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압력에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느니 지금은 주술로 법술을 부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별안간 푸른 빛 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뇌전이 번뜩이며 그의 몸에 금빛 뇌전이 옷처럼 둘러졌고 한립은 이를 악물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쯤 몸을 일으켰을 때 압력이 더욱 강해지며 다시 한쪽 무릎을 땅에 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의 안색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 빛의 장막과 산문 너머의 건 노마 등은 한립이 먼저 보물을 차지할까 불안한 마음뿐이었다.
“짐승 같은 놈이 죽고 싶으냐!”
갑자기 건 노마가 소리를 내질렀다.
동시에 하얀 그림자 다섯 개가 하나로 뭉쳐져 거대한 모습이 되더니 엽 가의 각진 얼굴 사내가 아니라 뒤쪽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거대한 팔이 하얀 구렁이처럼 변해 청동사자 한 마리를 삼키고는 몸을 떠나 빛덩이로 변했다. 아무리 청동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날카로워도 속수무책이었다.
잠시 후 중년 수사의 고리들이 또 다른 청동사자의 머리 위에 나타나 사정없이 내리 꽂혔다. 고리들이 수없이 묶인 청동사자가 그대로 몸이 조각나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각진 얼굴의 수사는 전혀 기쁜 기색 없이 청동사자가 아니라 거대한 하얀 그림자를 주시했다.
“미천탁이 명불허전입니다. 상고 시대의 보물인 영월환(暎月環)의 모조품이라고 들었는데 통천령보의 모조품 못지않네요.”
건 노마의 목소리가 하얀 거대 그림자의 입 속에서 냉랭히 들려왔다.
“이 보물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건 형의 손에 죽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저와 싸우다가 그 자에게 보물을 전부 내주실 작정이 십니까!”
각진 얼굴의 수사가 냉소하며 산문 방향을 가리켰다.
“곤오산 금제가 그리 간단했다면 엽 수사도 진작 안에 들어가 보물을 내왔겠지 노부에게 따라 잡혔겠소. 다만 방금 저 자를 무슨 장로라고 부른 것 같은데 엽 가의 수사가 아니오?”
건 노마가 서늘하게 물었다.
“그저 제가 사람을 잘못 보았을 뿐입니다. 노부는 모르는 자입니다.”
각진 얼굴의 수사가 천연덕스럽게 웃어대니 진위를 가리기 어려웠다. 건 노마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자가 엽 가 소속이든 아니면 천남에서 온 외부인이든 갖은 고생을 해서 곤오산 봉인 금제를 열었으면 마땅히 무엇 하나는 챙겨 나가야 하지 않겠소. 그러지 말고 나와 힘을 합쳐 금제를 깨고 곤오산 내에서 누가 보물을 차지할 지 각자의 운에 맡기기로 합시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시지요.”
“…….”
예상 밖에 망설임 없이 답하는 각진 얼굴의 수사를 보며 오히려 건 노마가 머뭇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