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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76화 (333/2,000)
  • # 576

    576화. 부채질

    이번에는 겨우 열댓 장 거리 만에 눈앞이 환해졌는데 사방이 돌로 막힌 방과 검은색과 흰색의 소형 전송진 두 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화천기가 전송진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다른 수사들도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송진으로 다가가 하나씩 둘러보았다.

    “묘 사제가 진법에 정통하니 살펴보시게. 둘 다 단거리 전송진이 맞는가?”

    화천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썹이 짙은 노인을 향해 물었다.

    “예, 살펴보겠습니다.”

    노인이 나서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고 나머지 수사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확실히 단거리 전송진입니다. 게다가 그 거리가 무척 짧아 아마 백 리 안의 어떤 곳으로 전송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게 8층으로 향하는 전송진이겠구만! 8층부터는 전송진을 통해야 한다니 신기한 일이기는 한데 양방향 전송진이 맞겠지?”

    “예, 전부 오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송진이 두 개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다녀와 보면 알게 되겠지. 그럼 일단 이것을 사용해 보세. 저쪽은 느낌이 좋지 않으니 말이야.”

    화천기가 하얀 전송진을 가리키며 걸어갔다.

    다른 세 수사도 새까만 전송진을 보면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에 군소리 없이 하얀 전송진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곧바로 전송진을 이용해 마치 신선이 살 것 같은 곳으로 이동되었다. 쪽빛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 있었고 기이한 영초와 꽃들이 만발해 영기가 풍성한 곳이었다.

    그러나 독성문 수사들이 놀란 것은 정면에 세워진 휘황찬란한 소형 궁전 때문이었다.

    궁전은 거대한 진법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제단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위에 각각 금색 칼날을 든 거대한 돌 거인이 묵묵히 궁전 방향을 보고 서 있었다.

    괴이한 광경에 화천기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같은 시각, 한립은 백옥으로 만들어진 광장으로 돌아왔다가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수사 무리와 마주칠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가 계단을 내려와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광장 양측의 수풀에서 수사들이 튀어나와 그를 포위했다.

    그들은 정상적인 길을 놔두고 몰래 움직이고 있었던 터라 금제의 영향으로 의식에 제한이 생긴 한립이 그들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한 수사, 이곳에서 다시 만나 뵐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정말 한참을 찾아 다녔는데요.”

    고운 자태의 천란 성녀가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한립을 쏘아보았다. 그 외에 낯익은 백의 청년과 갈천호 그리고 검은 의복을 입은 노인 둘까지 반원형을 그리며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한립은 작게 탄식했다. 경매회가 끝나고 임은병에게서 얻어낸 옥패를 이용해 감응주를 만들었건만 이미 몇 년이 지나 효력이 다한 것이다.

    “저도 이곳에서 성녀를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은 돌올족의 대선사시겠군요!”

    한립이 임은병을 향해 포권을 하고는 백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가장 경계해야할 이는 원영 후기의 대선사였다.

    “맞습니다, 제가 돌올족 대선사 중 한 명이지요. 일전에는 멀리서 날아가는 모습만 뵈어 기회가 되지 않았는데 이번엔 실력을 겨뤄볼 수 있겠습니다.”

    “때와 장소가 달랐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요?”

    한립은 갈천호 등을 훑어보며 웃을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오, 다른 곳에서라면 자신이 있으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원영 중기의 최고봉에 이른 음라종 장로를 격살 하셨다더니 사실인가 봅니다.”

    하얀 의복의 서 씨 청년이 담담히 물었다. 그 말에 갈천호 등 음라종 세 수사의 안색이 달라졌다.

    “여기까지 와서 그 일을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천남에서 음라종 장로 한 명을 죽이기는 했지요. 그래서 수사께서 음라종을 대신해 나서시려는 것입니까?”

    한립이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한 형의 실력과 지략이라면 우리 천란도 원수로 삼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이전에 사용하셨던 이상한 솥과 우리 천랑성전의 성정과 성수의 분신만 내어 주신다면 그간의 앙금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음라종의 귀라번까지 돌려주신다면 제가 음라종과의 오해를 푸는데도 힘을 써 보지요. 어떠십니까?”

    서 씨 청년이 포위당한 한립을 보며 의외의 말을 쏟아냈다.

    “서 형, 왜 이런 제안을…….”

    “성녀께서는 나서지 마십시오. 저도 생각이 있어 그러합니다.”

    임은병이 서둘러 말리려다가 백의 청년이 팔을 저으며 말하자 입을 다물었다. 곁의 갈천호 등 세 명도 말은 안 했지만 불쾌한 기색이었다.

    “제 보물인 솥을 내어 달라고요?  그건 어렵겠습니다. 그냥 여러분 모두와 손속을 겨루어 봐야지요.”

    얼토당토않게 허천정을 내달라는 요구에 한립은 고민한 것도 없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한 수사께서 먼저 제 호의를 거절하셨으니 그럼 저도 더는 사정을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서 씨 청년은 한립이 강경하게 나오자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소매를 펄럭여 청록색 옥여의를 불러냈다.

    이에 한립도 아무 말 없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꽈광!

    천둥소리가 울리며 등 뒤에서 은색 날개가 나타났고 한 손에는 고색창연한 깃털 부채가 들려있었다.

    서 씨 청년은 삼염선을 보자마자 비범한 물건임을 알아보았다. 삼색으로 빛나는 부채가 내뿜는 놀라운 영기의 압력에 원영 후기 수사인 그마저 눈썹을 끌어올렸다.

    “서 수사, 저 자와 음라종은 원한이 깊습니다. 대결이고 뭐고 그냥 한 번에 공격하시죠. 그래야 수월하게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갈천호가 삼염선의 위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는 고개를 돌려 서 씨 청년을 보았다.

    그는 서 씨 청년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나머지 두 노인들과 함께 법보를 분출했다. 특이한 양식의 비검 두 개와 도깨비불이 번뜩이는 뼈로 만들어진 도였다.

    임은병도 조용히 소매를 펄럭여 은색 누에가 곱게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서 씨 청년은 미간을 좁혔으나 딱히 무어라 하지 않고는 옥여의에 더욱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녹색 빛이 눈을 찌를 듯 짙어졌다.

    다섯 수사들이 순식간에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한립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천둥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사라졌다가 열댓 장 밖의 계단 위로 올라섰다.

    다른 수사들은 그가 도망가려는 줄 알고 동시에 남색 빛 두 줄기와 녹색 뱀을 분출했다. 이어 하늘을 뒤덮을 듯 은색 실도 뒤따랐다.

    그러나 서 씨 청년은 당황하지 않고 열댓 장 너머로 한립을 뒤쫓았다. 한립의 풍뢰시에 전혀 뒤지지 않는 속도였다. 그의 옥여의에서 녹색 빛이 나더니 이름 모를 괴수의 머리가 나타났다.

    교룡 같기도 하고 말 같기도 한 괴수의 머리가 사납게 한립을 노려보았다. 한립은 괴물의 등장에 적수들을 향해 수중의 부채를 펄럭였다.

    그러자 봉황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세 가지 색깔의 불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치며 나타났다.

    쾅!

    굉음이 퍼지고 허공에 알 수 없는 삼색의 주술이 신비롭게 떠올라 빛을 방출했다. 숨 막히는 영기의 압력에 다른 수사들은 식겁했다.

    바로 빛 아래에 있던 서 씨 청년은 불길한 예감에 재빨리 수중의 녹색 옥여의를 휘둘러 녹색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남색의 비검 두 자루와 뼈로 만들어진 도는 피하지 못하고 빛에 휩싸였고 임은병의 은색 누에가 뽑아낸 은색 실들도 빛에 닿자마자 녹아내렸다.

    그러고도 빛은 맹렬히 팽창해 백옥 광장의 절반 가까이를 산산이 부수고 녹여 버렸다. 정말 경천동지할 위력이었다.

    한립은 즉시 은색 날개를 펄럭여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올라가는 도중 만년영액을 한 방울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삼염선의 위력이 엄청나다고 해도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원영기 수사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한립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계단은 곤오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건 노마 등의 수사들이 향한 것은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천둥소리를 연달아 울리며 계단 끝으로 사라졌고 광장 밖까지 거대한 삼색의 빛이 분출되었다가 몇 초 뒤 없어졌다.

    빛이 사라진 황폐한 광장에 남은 갈천호 등은 전부 낭패를 당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중에도 가장 우스운 꼴을 보인 것은 갈천호였다. 그가 사용한 뼈로 만든 도는 본명 법보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 연화를 시키며 의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빛이 녹아내리는 순간 의식도 타격을 받아 법력으로 형성한 보호막이 흔들린 것이다.

    그렇게 빛을 쬐인 그의 보호막은 산산조각 났고 팔 한쪽이 타들어가 중상을 입고 말았다. 다행히 다른 검은 의복의 노인들은 비검이 사라지기 전에 기민하게 의식과의 연결을 끊어 무사할 수 있었다.

    임은병은 폭발 위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법보가 조금 손상 된 것 말고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몸 앞에 새까만 방패를 세워 빛을 막은 것이다.

    서 씨 청년은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녹색 옥여의로 순식간에 보호막을 형성해 멀리 몸을 날린 탓에 상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천란 대선사는 난감한 얼굴로 손에 든 물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이 간 옥여의가 흔들거리더니 결국 와장창 깨져 그의 손에서 흘러내린 것이다. 삼색 빛의 위력을 막기 위해 제대로 발동 못한 고보를 들이 밀었다가 망가지고 말았다.

    “대체 그 부채는 뭐였습니까! 설마 통천령보일까요?”

    갈천호는 팔이 상당히 아팠지만 통증을 참으며 저물대에서 약을 꺼내 바르기 시작했다. 다른 두 노인도 창백한 얼굴로 천만다행이라는 얼굴이었다.

    “진짜 통천령보였다면 갈 수사께서는 지금 숨도 쉬지 못하실 겁니다. 아마 통천령보의 모조품 중 하나겠지요. 그래도 그런 보물을 지니고 있다니. 어쩐지 우리가 포위해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서 씨 수사가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조품의 위력이 이렇다고요?”

    “아마 모조품으로 발휘할 수 있는 신통은 저것뿐일 겁니다. 위력이 대단하기는 하나 그뿐이지요.”

    “그럼 어찌 해야 할까요?  안 그래도 신통이 뛰어난데 저런 보물까지 지니고 있으면 추격하기 어려울 텐데요.”

    “걱정 마세요. 저렇게 엄청난 공격을 하려면 막대한 법력을 써야할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망을 갔겠습니까?  법력을 회복하기 전에 따라 잡으면 오히려 저 자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청년이 말을 하며 허리춤을 스쳤다. 오색의 기운이 퍼져 나오더니 그 안에서 맑은 울음소리를 내는 오색 공작이 나타났다.

    “올라갑시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저 자는 지금 처리해야합니다.”

    숨을 고른 백의 청년이 서늘하게 소리쳤다. 그가 먼저 앞서 나가고 오색 공작이 날개를 펼치고 그 뒤를 쫓았다.

    임은병도 주저 없이 서 씨 청년을 따라갔다. 천란 성녀인 그녀는 한립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더라도 반드시 성수의 분신을 회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갈천호 등 세 명의 음라종 수사들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마도란 본래 대의나 의리 같은 것을 쫓는 집단이 아니었다. 아까는 원영 후기 수사가 있어서 한립을 손쉽게 잡겠다 싶어 같이 나선 것이지만 상대의 강력한 보물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나니 천란 대선사의 말에 바로 따르기가 어려웠다.

    대선사가 하는 말이 정설이기는 하나 만약 상대가 폭주해서 법력을 증폭시키는 비술을 사용하면 삼염선을 몇 번 더 사용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게다가 아까 그들이 나눈 대화를 생각해보니 또 다른 보물이 그에게 있으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도 귀라번을 되찾아 공을 세우고 싶기는 했지만 목숨을 걸고 모험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천란 수사를 나 몰라라 하고 물러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 수사는 일순 머뭇거렸다.

    “우리도 저들을 뒤따른다. 한립이란 놈과 마주치면 곁에서 보조만 하고 부채를 꺼내들면 재빨리 물러난다.”

    갈천호가 결심이 섰는지 나머지 둘에게 조용히 일렀다. 두 흑의 노인들도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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