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575화 (332/2,000)

# 575

575화. 음백응형(陰魄應形)

본래 안정을 되찾았던 거대 솥이 몸을 떨며 전신에서 붉은 빛을 번뜩이더니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솥은 순식간에 반 척 길이로 변해 맑은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이에 멀리 떨어져 나갔던 솥뚜껑도 날아와 크기가 줄어 들었고 더욱 맑은 소리를 내었다. 영성이 넘치는 솥의 모습에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며 소매를 휘둘렀고 푸른 기운을 뿜어 솥을 수중으로 끌어왔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푸른빛을 솥을 향해 때려 넣었다.

작은 솥에서 붉은 빛이 사방팔방으로 퍼지더니 솥뚜껑이 들썩이며 무수히 많은 주먹만 한 불새들이 날아올랐다. 죄다 흉측한 생김새에 새빨간 몸뚱이를 지닌 까마귀 불새들이었다.

까마귀들이 입에서 작은 불씨를 내뿜으며 한립의 의식에 따라 대청 곳곳을 날아다녔다.

솥이 오랜 시간 축적해온 불의 기운의 결정체였는데 각각 영성이 뛰어나 불 속성 영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솥의 신통에 한립은 기뻐하며 솥을 회수했다.

이후 대청을 다시 한 번 살핀 그는 떠나기 전 열댓 개의 적룡 기둥들을 향해 비검을 날렸다.

콰쾅! 와르르.

교룡 모양으로 조각된 거대 기둥들 역시 챙겨갈 생각이었다. 비록 거대 솥처럼 영성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청동으로 제련해 만들어진 법기들이 그간 흡수한 불의 기운을 생각하면 절대 만만히 볼 물건은 아니었다.

재료로나 법기로나 희귀한 물건이 된 것이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전각을 나와 나머지 건물들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쓸 만한 물건들은 찾지 못했고 몇몇 평범한 물건들과 법기 제련에 관한 옥간 몇 개를 발견한 것이 전부였다.

주령당에서 이 정도 수확이면 꽤 운이 좋은 편이었다.

반나절 후 나머지 누각들을 전부 살핀 한립은 다시 주령당 편액 앞으로 돌아와 하얀 빛의 장막을 바라보았다.

아직 시간이 일렀으니 다른 곳을 살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수사들도 이미 수색을 마치고 다른 곳을 돌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부 노인 등을 만나면 상관없겠지만 건 노마나 독성문 수사들, 그리고 그 이전에 들어온 수사들과 마주치면 문제가 커진다.

하지만 이렇게 이곳에 서서 다시 봉인 결계의 틈이 열릴 때까지 기다린다 한들 다른 곳의 수색을 마친 이들이 주령당을 찾으면 끝이 아닌가?  게다가 이미 시간이 꽤 흘렀으니 건 노마 등이 이미 첫 번째 무리와 마주쳐 전투를 벌였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곳을 돌아다니며 어부지리를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주령당에서도 태음진화와 같은 보물을 얻었는데 다른 곳은 더 대단한 보물들이 있을지 모르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 그의 실력에 원영 후기 수사들의 협공을 받지 않는 한 달아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그가 주저 없이 삼염선을 꺼내 부채질 했다.

같은 시각, 곤오산 모처의 남색빛이 감도는 대청 안에는 대두 괴인과 고마 그리고 원영 초기 엽 가 수사가 붉은 머리를 산발한 악귀들과 싸우고 있었다.

발가벗은 악귀들은 전부 흉악한 몰골에 음기를 내뿜어댔고 새까만 손톱을 휘두르며 세 수사를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회색 보호막과 방어 법기들을 겹겹이 두르고 있어 음기나 예리한 손톱에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귀들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비검으로 악귀를 두 동강 내거나 머리를 부숴버려도 다른 악귀가 안개를 분출하면 즉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숙부님, 한 장로! 이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이곳 악귀들은 이미 음백응형(陰魄應形)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평범한 법보로는 안 되고 극한의 양기를 지닌 보물이 있어야 합니다.”

엽 가 노인이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게 간단했다면 내 벌써 그리 했을 것이다. 악귀들은 귀왕(鬼王)의 분신에 불과하다. 이것들을 일격에 격살하지 않은 이유는 진짜 귀왕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이지.”

대두 괴인이 서늘하게 답했다.

“이것들이 전부 분신일 뿐이란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다시 살아나도 연달아 두세 번 죽이면 원기가 크게 상하기 마련인데 저것들은 지치는 기색도 없지 않습니까. 귀왕이 우리의 진을 빼 놓은 뒤 나타나려는 것입니다.”

고마가 검으로 악귀 한 마리를 처치하며 평온하게 말했다.

“그랬군요. 열다섯 째 아우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우의 신통이면 이런 악귀들과 상극이었을 텐데. 1층에서 오영사(烏影蛇)의 암습에 당해 원영으로 달아났으니…….”

노인은 주변의 회색 기운을 보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더냐. 세상에 그림자에 숨어들어 원영기 수사를 속일 수 있는 요물이 있다니. 명례 조카의 그림자가 스스로 폭발하니 도와줄 틈이 없었지. 오영사의 맹독에 명례 조카의 몸이 단숨에 녹아 내렸고 말야.”

대두 괴인도 탄식했다.

“숙부님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진마탑이 괴이해 가면 갈수록 요귀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도 겨우 7층이라니……. 한 장로님 말씀대로라면 9층까지 있다면 마지막 두 층에는 어떤 요마가 튀어나올지 걱정이 됩니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도 될 런지요?”

노인은 무턱대로 내려가는 것이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흥, 겨우 이정도 위험에 움츠려 드는 것이냐! 진마탑에 가두고 있는 요물이 강력할수록 이곳에 통천령보가 있을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상고 수사들이 강력한 요마를 봉인할 때 보물의 힘을 빌렸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 아니더냐. 설마 우리 엽 가의 몇 백 년 대업을 망칠 셈이냐?”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엽 가 노인이 대답을 하면서도 법보를 이용해 악귀를 죽여 나갔다.

“귀왕을 찾았습니다.”

그때 고마가 입을 열었다.

“어디입니까?”

노인이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급히 묻는데 고마가 돌연 표정이 달라졌다.

펑.

대청 입구에서 빛이 반짝이며 녹색의 빛덩이 속에서 네 명의 수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네 수사들은 대청 안에 난무하는 악귀들과 그것들에 둘러싸인 고마 등을 보고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엽월성! 당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지 않았던가요?  설마 봉인에 틈을 만들어 낸 것이 엽 가였던 것입니까!”

한눈에 엽 가의 일곱째 숙부를 알아본 화천기가 복잡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대청 안에 있던 세 수사들도 독성문 수사들을 알아보고는 안색이 좋지 못했다. 하필 악귀들에게 손발이 묶여있을 때 그들과 마주치다니!

“누구신가 했더니 화 수사셨습니다. 독성문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군요. 다만 다른 곳도 많은데 어찌 진마탑으로 걸음을 하셨을까요?”

괴인의 눈에 음산한 빛이 스치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물었다.

“그건 저희가 물을 일이지요.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엽 형께서 죽지도 않으시고 원영 후기가 되어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좌불안석할 분들이 꽤 많겠습니다.”

“화 사형, 저들도 이곳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것일까요?”

화천기의 귓가에 독성문 장로 중 한 명이 전음을 보내왔다.

독성문 수사들은 선대 사조가 남긴 서신에 진마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온 것이었다. 그러니 무슨 보물이던 간에 이곳을 먼저 찾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도 진마탑을 내려오며 다른 수사들이 앞서가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원영 후기 수사와 그 무리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만일 그들이 악귀들에 둘러싸여 있지 않았다면 화천기 등 독성문 수사들은 두말할 것 없이 내뺐을 것이다.

“확실하지 않다만 저들도 우리처럼 어떤 실마리를 지니고 있겠지.”

화천기는 평정을 되찾고 대두 괴인 등을 응시했다.

“보아하니 그냥 돌아갈 마음은 없는 듯합니다.”

대두 괴인은 말을 하면서 동시에 입을 벌려 은색빛을 내뿜었다.

그런데 그 순간 대청 한쪽에서 은빛이 퍼지며 노호성이 들려왔는데 회색의 모호한 그림자가 나타나 입에서 손톱만한 회색 구슬을 뿜어 은색 창을 막으려 했다.

괴성을 내지르며 점점 뒤로 물러나는 귀물의 등장에 독성문 장로들이 움직이기 전에 고마가 먼저 움직였다. 품에서 새까만 거울을 꺼내 그것을 비춘 것이다.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주변의 모든 악귀들을 휘감았고 악귀들은 참혹한 비명을 질려대며 갈가리 찢겨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귀왕이 은색 창에 붙들려 있어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은색 음기로만 뭉쳐질 뿐이었다.

고마가 내뿜는 거울의 기운에 화천기의 표정이 달라졌다.

“가자!”

음기 덩어리 속에 갇힌 대두 괴인 등을 보고는 화천기가 돌연 그 너머의 출구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말했다. 그는 손바닥에서 녹색 깃발을 꺼내 녹음의 기운을 방출하며 날아들었다.

“화천기, 네 이놈!”

대두 괴인이 심장이 철렁해서는 무수히 많은 손가락 굵기의 노란 검기를 전신에서 터트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들을 휘감던 음기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이미 독성문 수사들은 수십 장 밖으로 날아가 출구 속으로 들어간 후였다. 대두 괴인과 고마 등이 힘을 합쳐 음기를 날려버렸을 때는 원래 아무 것도 없던 출구에 하얀빛이 크게 번지며 단단한 수정으로 된 벽이 만들어졌다.

괴인이 재빨리 팔을 뻗어 몇 장 길이의 검기를 날렸다. 그러나 오색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며 검기가 녹아들었다.

“수미오행벽(須彌五行壁)!”

괴인은 흠칫 놀라 수정벽을 살피고는 분노했다.

“이것은 수미종(須彌宗)의 보물이 아닙니까?  수미종 역시 독성문과 마찬가지로 남강의 종파 중 하나이니 빌려왔나 봅니다.”

“수미오행벽의 명성이라면 저도 들어본 바가 있습니다.”

엽 가 노인이 안색이 변하며 말하자 고마가 미간을 좁혔다.

“성가시게 되었구나. 보아하니 정말 탑의 최하층에 통천령보가 있나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 자들이 감히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지!”

괴인이 수정벽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노기를 드러냈다.

“엽 형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통천령보로 가는 길을 대신 뚫어주는 동안 저희는 귀왕을 처리하고 뒤따르면 될 듯합니다.”

고마가 냉소했다. 그 말에 대두 괴인이 순간 멈칫하다가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노부가 보물 생각에 마음이 급했군요.”

괴인이 말을 마치고 서늘한 눈으로 은색 창과 교전 중인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수정벽 너머에는 독성문 장로들이 한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화 사형! 이렇게 하시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수미오행벽이 저들을 평생 막아 줄 것도 아닌데 괜히 상대의 화를 돋운 꼴 아닙니까.”

“우리가 보물을 포기한다고 저들이 우리를 놔둘 성 싶으냐?  엽월성은 여러 종파들의 암습에서 살아남아 숨어 살다가 우리에게 발각되었다. 우리가 어찌하든 살려 보낼 리 없다는 뜻이야. 게다가 본 파의 사조께서 그리 중시하시던 보물은 십중팔구는 전설 속의 통천령보일 것인데 이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화천기가 불안해하는 동문 사제를 향해 얼굴을 굳혔다.

“통천령보요?  그런 역천의 보물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 위험은 무릅써야지요. 하지만 엽월성이 밖에서 지키고 있으니 퇴로가 걱정입니다.”

또 다른 장로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건 다들 걱정 말게. 내 아무렴 그것도 고려도 하지 않고 이런 일을 벌였겠는가! 출발하기 전 본 종의 보물인 독룡주(毒龍珠)를 가져왔으니 기껏해야 십 년 정도 요양할 각오로 복용하면 달아나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야.”

“미리 준비를 하고 계셨군요. 그럼 다행입니다.”

나머지 세 장로들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아무리 보물이 중해도 목숨보다 중한 것은 없었다.

“원 사제가 이곳에 없다는 것이 아쉽구나. 다섯이 함께 협공했다면 아무리 원영후기 수사라도 해볼 만 했을 것을.”

“소식을 남겨 놓았으니 이곳으로 오는 길일지도 모르지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앞으로는 더욱 조심들 하게! 7층의 요물들이 이 정도라면 8, 9층은 어떨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야. 엽 가 수사들이 미리 앞서나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빨리 내려올 수 없었을 것이다.”

화천기가 신중하게 당부하자 다른 수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래쪽으로 향하는 통로를 따라 수십 장을 날아간 뒤 다음 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