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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74화 (331/2,000)

# 574

574화. 태음진화(太陰眞火)

푸른빛이 가시고 뒤를 돌아보니 그가 지나간 순간부터 다시 빛의 장막의 구멍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돌아 나올 때는 또 다른 방법을 써야 할 듯 했다. 체내의 법력을 확인해보니 삼염선의 위력을 조절했음에도 3분의 1이나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저은 그가 성큼성큼 돌담 뒤의 누각으로 걸어갔다.

누각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이전에 보았던 누각들과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입구 주변을 둘러보니 안쪽에 있던 개인 물품들은 상고 수사들이 철수하며 모두 갖고 떠난 것 같았다.

미리 예상한 일이었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몇 누각들을 연달아 돌아보았지만 아무 수확도 없었고 창고로 보이는 석조 건물들도 텅텅 비어 있었다.

그가 마지막 창고에서 나와 또 다른 전각을 올려다보았다. 보기에 그리 커 보이지 않았는데 건물 전체가 새빨간 색이라 화염이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화령전(化靈殿).

건물 밖에서도 안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로 후끈거렸다. 그가 뒷짐을 지고 차분히 걸음을 옮겼는데 전각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청 안은 열댓 개의 붉은 기둥이 곳곳에 솟아 있었는데, 교룡 모양으로 조각된 입에서 붉은 안개를 분출하고 있었다.

붉은 기운은 흩어지지 않고 대전 중앙의 거대한 솥으로 모여들었다. 고풍스런 모양의 솥은 예닐곱 장 높이로 한립이 이전에 본 어떤 화로보다 방대해 보였다.

그러나 한립을 놀라게 한 것은 솥이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고온의 화염에서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입이 마르고 피부가 따가웠는데 법력으로 만들어낸 푸른 보호막이 아니었다면 크게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붉은 기운이 나오는 기둥과 거대한 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대한 솥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분명 안에서 무언가를 제련하는 중인 것 같았다.

‘보아하니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겠구나!’

한립이 붉은 기운을 피해 솥으로 다가갔다. 여섯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자 솥이 머금고 있는 강력한 불 속성 영기가 느껴졌다.

안에서 무엇을 제련하고 있든 간에 이미 수만 년 이상 지났으니 벌써 남다른 물건이 되었을 것이다. 한립은 솥의 주위를 돌다가 걸음을 멈추고 대청 안을 훑기 시작했다.

솥에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기둥은 어떤 진법으로 유지되고 있을 테니 진법의 눈을 찾아야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그가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길로 대청 구석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한 장 길이의 금색 빛을 내뿜었다.

쿵!

굉음이 울리고 금색 빛이 대청 구석의 바닥을 내려친 순간 열댓 개의 기둥에서 붉은 기운이 멈추었다.

빛이 사라지자 커다란 구덩이가 나타났는데 그 안에 조각난 진법 법기들의 잔해와 수 촌 크기의 작은 금색 검이 떠올랐다.

비검의 일격으로 이곳에 묻혀 있던 진법 원반이 부서지고 진법 전체가 운용을 멈춘 것이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손짓하자 검이 부르르 떨며 그의 소매로 돌아와 사라졌다.

불기둥이 멈추자 솥의 화염도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립은 여전히 남색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다른 곳을 살폈다.

진법이 사라지니 수십 장 아래가 전부 새빨간 빛을 머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놀랍게도 이 누각은 최상급의 화염 연못 위에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기둥이 그 기운을 받아 오랜 세월 붉은 기운을 뿜어냈던 것이다.

한립이 놀란 것도 잠시 솥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살피려 했다. 그러나 붉은 기운이 흩어지던 솥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웅웅 울어대더니 붉은 화염을 스스로 일으켜 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다가 한참 후 희색을 드러냈다.

솥이 오랜 세월 불 속성의 영력을 받아 보통의 법기에서 벗어나 불 속성의 이보로 탈바꿈한 것이다.

오랜 시간 동일한 속성의 영력을 주입해 법기가 스스로 급이 달라지는 일은 수도계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눈앞의 솥은 화령전을 전담하던 수사가 바삐 떠나면서 제련하던 물건을 어쩌지 못하고 진법으로 저절로 제련되도록 해놓은 것이 분명했다.

아마 나중에 다시 돌아올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립은 눈을 굴리며 그간의 정황을 추측해 저물대에서 남색 진법 깃발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대청 곳곳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깃발들을 꽂아 넣었다.

한립이 다시 솥 앞으로 돌아와 주술을 읊기 시작하자 남색의 보호막이 펼쳐져 그와 솥을 둘러쌌다. 이에 뜨겁던 열기가 물 속성 보호막 아래서 한층 누그러졌다.

한립은 이제 영수대 중 하나를 던져 반 척 길이의 새하얀 지네들을 풀어놓았다. 진화를 해서 한 쌍의 날개가 생긴 육익상공들이었다.

지네들은 민첩하게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전부 솥 위로 모여들어 대기했다.

한립이 두 손을 모으니 보라색 화염이 한 손을 둘러쌌고 그가 거침없이 그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거대한 보라색 손이 허공에 나타나 솥의 뚜껑을 쥐려했다.

그러나 솥에서 새빨간 불길이 치솟아 순식간에 새빨간 불새로 변해 거대 손을 향해 날아들었다.

거대 손과 불새는 보라색과 붉은 화염을 번뜩이며 교전했다.

이에 한립은 눈에 이채를 띄며 낮게 중얼거렸고, 솥 위를 날아다니던 육익상공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입을 벌려 하얀 한기를 분출했다.

그리고 한립은 자라극화로 만들어진 거대 손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법결이 날아가자 거대 손은 기세가 강해졌고 육익상공의 한기와 더불어 단숨에 불새를 으깨고 솥을 향해 날아갔다.

댕!

솥뚜껑이 거대 손에 의해 날아갔다.

한립이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솥 안을 살피려고 하는데 까악 하는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대청 천장으로 솟아올랐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놀랍게도 육익상공들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펑.

새빨간 빛이 남색 보호막에 부딪쳐 잠시 주춤했으나 당장이라도 뚫고 나갈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한립은 깜짝 놀랐지만 다시 평정을 되찾고 열손가락을 튕겨 열댓 개의 푸른 검기를 방출했다.

파파파팍!

붉은 빛은 검기의 공격에 날아가거나 잘리지 않았으나 순간 빛이 어두워지고 흔들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향을 바꿔 다시 보호막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붉은빛 곁에서 보라색 빛이 번뜩이더니 거대 손이 허공에서 나타나 전광석화처럼 그것을 낚아챘다.

거대 손이 하강하자 솥은 스스로 내뿜던 화염도 꺼지고 육익상공의 한기에 얼음덩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립은 솥이 아니라 거대 손에 들려 있는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건 태양정화(太陽精火)?”

“태양정화는 아닙니다. 이것은 그와 나란히 거론되는 태음진화(太陰眞火)입니다. 인계의 삼대 진령지화 중에 하나지요.”

한립의 혼잣말에 그의 의식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월, 깨어난 것이냐?”

“예, 주인님께서 이곳에 들어오실 때 막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겨우 의식이 깨어났을 뿐 다른 도움을 드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의식에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니고?”

듣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한립은 그녀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습니다. 다만 이번에 자고 일어나니 기억의 일부가 돌아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기억을 회복했다고?”

“그렇기는 한데 워낙 오래 전 일이라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기억은 아직 떠올리지 못했고요.”

“조금이라도 기억이 났다니 다행이로구나. 아마 시간이 더 지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떠올릴 날도 오겠지!”

침묵하던 한립이 담담히 그녀를 위로했다.

“그럴 지도요.”

“방금 저것이 태음진화라고?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기분이 가라앉은 그녀를 향해 한립이 화제를 돌렸다. 보라색 화염에 휩싸인 새빨간 불꽃은 아주 작은 새로 변해 이리저리 빠져나가려고 난리였다.

“분명 삼대 진령지화 중 하나인 태음진화입니다. 기억에 따르면 가장 낮은 급이라 검기 공격에 영성이 조금 상했습니다. 다행히 태음진화였으니 망정이지 정말 태양정화였다면 아무리 급이 낮아도 자라극화로 가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위력이 대단하단 말이냐. 삼대 진령지화라는 것도 처음 듣는 소리인데…….”

“저도 이것을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말입니다. 아직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서요.”

“그런 기억이 있다니 착각은 아니겠구나. 음한한 성질을 지닌 화염이니 자라극화에 융합해 위력을 높일 수 있겠지?”

“아마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자라극화로 태음진화를 삼키는 것보다는 반대로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태음진화가 이미 약간의 영성을 얻은 듯하니 이대로 사라지게 두면 위력이 약해질 겁니다.”

“그래, 그 말이 맞구나.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대로 그렇게 해야겠어. 영성이 있는 만큼 제련하기는 더 어려울 테니까.”

은월의 조언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께서 만일 태양정화를 구해 이것과 융합하실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음양의 조화에 자라극화의 위력까지 더해져 상상하기도 어려운 힘을 발휘하겠지요. 아마 인계에서는 태우지 못할 것이 없을 겁니다.”

“태양정화?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연 신군께서 인계 수사가 얻을 물건이 아니라고 하시던데. 괜히 헛꿈 꿀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주인님께서 이미 태음진화를 지니셨으니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이것과 태양진화는 서로 상극이니까요.”

“그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 하도록 하자. 태음진화만 해도 언제 제련을 마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은월의 의견에 한립도 구미가 당겼지만 일단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은월이 웃으며 당부했다.

“태음진화는 일단 금제를 걸어 가두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법기로는 가두지 못할 테니까요.”

“그 정도는 나도 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수중의 보라색 화염을 공중으로 쏘아 보냈다.

보라색 화염이 태음진화를 감싸자 그가 열손가락을 튕겨 가느다란 뇌전을 분출했다. 뇌전들이 순식간에 보라색 화염 속의 태음진화를 감쌌고 곧 주먹만 한 금색 구슬로 변했다.

이전에 건람빙염을 구속했던 방법과 똑같았지만 그의 수행이 높아지고 수법이 익숙해진 탓에 훨씬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이후 한립은 새빨간 옥함을 꺼내 금색 구슬을 넣고는 시선을 솥으로 돌렸다.

“극한의 음기를 품은 화염은 음한한 지역에서 나타나야 맞거늘 어째서 이 솥에서 제련된 걸까. 설마 한기를 품고 있던 재료가 열기를 받아 음양의 조화를 이룬 걸까?”

그가 의아해하며 소매를 펄럭이자 굵은 뇌전이 뻗어나가 얼음덩이로 변한 솥의 표면을 휘감았다.

꽈광, 쿠쿵.

빛이 번뜩이며 얼음덩이가 금이 가더니 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은 푸른빛으로 몸을 번뜩여 신형을 띄워 거대 솥을 살폈다.

이곳에도 비행 금지 금제가 걸려 있었지만 그의 수행으로 잠시 낮게 떠오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붉은 빛이 가신 솥이 고스란히 진면목을 드러냈다.

솥을 살피던 그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슉!

반짝이는 무언가가 솥에서 빠져나와 허공을 선회한 후 그의 손에 들어왔다. 뜻밖에도 투명하고 따뜻한 난옥(暖玉) 비슷한 물체였는데 다섯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약간 탄성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원래 어떤 재료가 들어갔든 간에 수만 년이 흘렀으니 이제 무엇으로 변했을지 알 수 없지요. 하지만 태음진화가 탄생한 것이 이 물건과 관련이 있다면 평범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그렇구나. 한가할 때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어.”

이후 그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번뜩이며 정체 모를 물체가 저물대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솥을 주시했지만 확실히 다른 물건이 없자 한립이 수결을 맺어 붉은 법결을 연달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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