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3
573화. 거대한 괴물과 궁전
괴물을 중심으로 겹겹이 펼쳐져 있는 금제는 마치 물결처럼 끝이 없었다. 작은 산 같은 모호한 신형은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가끔 미세하게 들썩이지 않았다면 죽은 줄 알았을 것이다.
이곳과 상반되게 그 옆에 나란히 있는 공간은 별천지였다. 녹음이 푸르렀고 기이한 화초와 영초들이 충만한 영기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신선이 살 것 같은 그 풍경 속에 수백 장 크기의 화려한 궁전이 우뚝 솟아 있었다. 궁전은 놀랍게도 거대한 진법의 중심에 만들어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81개의 소형 제단이 열 장 높이로 세워져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각각의 제단 위에 몇 장에 이르는 백옥으로 만든 거인들이 서 있다는 것이다.
거인들은 하나같이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거대한 칼날을 궁전 방향으로 들고 서 있었는데 그 엄숙한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때 곤오산 모처에 설치된 자미칠성진에서는 연달아 무언가 폭발하고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양각색의 빛기둥들이 진법 곳곳에서 보라색 안개를 뚫고 솟아오르고 있었는데 그 표면을 굵직한 뇌전이 타고 흘렀다.
게다가 안개는 이미 눈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어졌고 수사의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소름끼치는 울부짖음도 함께 들려왔다.
한립은 금빛으로 온 몸을 휘감고는 표정 변화 없이 빛기둥 중 하나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짙은 보라색 안개 속에서 거대한 구렁이가 날아들 때마다 금빛이 번뜩이며 처리했지만 그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안개가 끊임없이 보라색 구렁이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돌연 거의 들릴 듯 말 듯 붕붕 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한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뻗어 가느다란 금빛 뇌전 두 줄기를 방출했다.
꽈광!
벼락이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니 주먹만 한 거대한 벌 두 마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벌의 표면에는 화려한 노란 점들이 찍혀 있었는데 독침이 세 촌이나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이런 영충을 한립은 벌써 34마리째 죽이고 있었지만 처음에만 비검을 이용해 갈랐을 뿐 그 뒤로는 벽사신뢰로 격살하고 있었다.
벽사신뢰가 차고 넘쳐서가 아니라 거대한 벌을 비검으로 공격했다가 기겁했기 때문이다. 그의 비검 하나가 부지불식간에 피에 젖고는 즉시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녹아내린 것이다.
거기다 벌들이 불덩이나 얼음송곳 같은 저계 법술에도 저항력이 있어 벽사신뢰가 아니면 소용이 없었다.
주먹만 한 벌떼 외에도 보라색 안개 속에는 전신이 피처럼 붉은 박쥐도 몇 마리 숨어 있었다. 보기에는 진짜 박쥐와 똑같았는데 검기로 박쥐를 자르려고 하자 검기가 주춤하다 박쥐의 몸을 썰어내는 것 아닌가!
청죽봉운검은 경정을 첨가한 이후 예리하고 단단하기가 다른 보물과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 박쥐의 몸이 그만큼 단단했던 것이다.
벌이고 박쥐고 수도계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없는 영충들이었다. 그러니 먼저 간 수사들이 얼마나 이번 원정에 공을 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보라색 빛기둥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때 갑자기 대숲 안으로 들어오고 감쪽같이 사라졌던 보라색 대나무들이 주위를 감쌌다.
진법의 핵심인 빛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펼쳐진 환술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최상급의 상고시대 환영진도 깨고 나온 그에게 이 정도 술수가 통할 리 없었다.
한립은 남색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빛기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소매를 펄럭이자 금색 비검 몇 개가 떠올라 허공에서 거검으로 합쳐졌다.
쿵!
굵은 금색 거검이 번득이며 사라지더니 빛기둥 하부를 내리쳤다. 그러자 한립 주위의 보라색 안개와 대숲이 사라지고 정결한 백옥으로 만들어진 땅이 드러났다.
한립은 고개를 숙여 그것을 확인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미 여섯 개의 빛기둥 중 세 개만 남아 있었다. 하나는 그가 방금 없앴고 나머지 두 개는 다른 이들이 해결했다.
한립이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품에서 영석을 꺼내 들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다른 이들이 열심히 나머지 진법을 파훼하는 동안 고마를 어찌 할 지 대책을 세워볼 참이었다.
현재 곤오산에 원영기 수사들은 물론 요마, 귀물이 허다해서 제아무리 삼염선과 원영 후기급 꼭두각시를 지녔어도 까딱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한립은 법력을 회복하며 심사숙고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허리춤을 스쳐 네모난 남색 물체를 꺼냈다. 처음 곤오산을 오르며 돌 비석 속에서 찾아낸 수정 비석이었다.
어찌나 은밀하게 숨겨 놓았는지 의식이나 영기 파동으로도 감지가 불가능했고 천성적으로 금속이나 석재 등의 보물을 찾는데 능통한 토갑룡의 신호가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들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수정 비석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 굉장히 묵직했는데, 영기를 주입하면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가벼워졌다.
그러나 더욱 그의 시선을 끈 것은 표면의 적힌 고대 문자들이었다. 상고 시대의 글자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한립도 알 수 없는 문자였다.
그렇다면 이 문자들은 소위 상고 시대 이전의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수정 비석은 오래되었고 그 자체로 이보(異寶)였다.
한립은 자세히 그것을 살피다 한숨을 내쉬었다. 곧 손이 번뜩이며 수정 비석을 회수했다.
그때 두 번의 굉음이 연달아 들리더니 빛기둥 두 개가 사라졌고 마지막 남은 빛기둥은 누군가 허물 것도 없이 스스로 종적을 감추었다.
보라색 안개와 대숲이 전부 사라지자 모습이 보이지 않던 수사들이 나타났는데 허공에서 건 노마의 노호성이 들려왔다.
“독성문 것들은 어딜 간 것이야! 몰래 먼저 떠나다니.”
한립도 시선을 돌려보니 과연 독성문 장로 넷이 보이지 않았다.
“흥! 어디 그들뿐이겠습니까. 정위 그 얌생이 같은 놈도 사라졌군요.”
산수 중 성격 급한 거한이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들이 다른 수사들 몰래 사라질 만하네요. 저쪽을 보시지요.”
백요이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백옥 광장 끝에는 열댓 개의 돌계단들이 어딘가로 통해 있는 것이 보였다.
“보아하니 앞선 수사들이나 지금 사라진 이들이나 저 길 중 하나를 골라 갔을 것입니다. 앞선 세력도 무리가 나뉘었으니 그들도 보물을 선점할 기회라 여겼겠지요.”
부 노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다 상관없게 되었군. 노부도 이제 홀로 행동할 것이니 내 앞을 막는다면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겠소!”
건 노마가 빠르게 평정을 회복하더니 다섯 개의 하얀 그림자들이 각각 계단 앞의 비석을 빠르게 확인했다.
그 후 다섯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주저 없이 곤오전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이 광경을 본 거한 등 다른 수사들도 안색이 달라져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립의 귓가에 부 노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연합은 깨진 듯합니다. 이제 한 형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계단이 향하는 곳이 많으니 저도 한 곳을 골라 홀로 살펴볼까 합니다. 중요해 보이는 몇몇 곳이 아니면 큰 위험은 없겠지요.”
“그렇군요. 저는 사금수의 암습이 두려워 혼자는 무리고 백 수사와 함께 한 곳을 골라 올라가 볼까 합니다. 그럼 앞으로는 각자의 운에 맡겨야겠군요.”
부 노인이 잠시 생각하다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립의 결정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사실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 봐야 진귀한 보물이 나타나면 서로 경쟁만 하게 될 뿐이다. 게다가 한립의 능력은 그와 백요이를 월등히 앞서니 여기서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부 형, 한 수사! 저희도 먼저 가보겠습니다.”
상의가 끝났는지 거한이 그들을 향해 인사했고, 산수 무리가 둘로 나뉘어 각각 다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에 가려져 그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부 노인과 백요이도 전음으로 인사를 나누고는 한립을 떠나 아무도 선택 하지 않은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제 한립은 넓은 광장에 홀로 남게 되었다.
텅 빈 공간을 보며 한립은 여러 수사들이 향했을 곤오전이나 진마탑을 배제하고 다른 곳들을 살폈다.
“혜명각(慧明閣), 상운전(祥雲殿), 구옥담(句玉潭)…… 주령당(鑄靈堂). 주령당이면 법기를 제련하는 곳인가?”
한립의 시선이 비석 중 하나에 멈추었다.
물론 곤오전, 영보각 등이 보물을 찾기에 더욱 적합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배영단을 지녔는데 이곳에서 너무 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옳지 않았다.
한립은 주령당으로 마음을 정하고 비석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광장 중앙에 노란 빛이 번뜩이며 은시야차, 추한 얼굴의 규 부인 그리고 사금수가 나타났다.
“토둔술로는 여기까지 밖에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갔다가는 지하의 금제를 건드릴지 모르니까요!”
은시야차가 빛을 거두고 곤오전으로 통하는 계단을 보며 말했다.
“영기의 파동이 강력하게 남아 있군요. 인간 수사들이 진법을 파훼하고 지나간 듯합니다.”
규 부인이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주위를 살피는데 사금수가 낮게 울부짖더니 날개를 펴고 비석들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수사들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갔습니까? 역시 사금 수사의 후각이 쓸 만합니다.”
은시야차가 사금수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미소를 지었다.
“잘됐군요! 인간 수사들이 따로 움직인다면 우리의 본명패를 되찾는 일도 더 수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곤오전으로 향한 수사들의 능력이 어느정도 되어야 그곳의 금제를 뚫고 지나갈 수 있을 텐데…….”
“상관없습니다. 그들 힘만으로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몰래 도움을 주면 됩니다. 우리를 노리고 펼쳐 놓은 금제만 건드리지 않으면 다른 것들은 처리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규 부인의 걱정에 은시야차가 이미 생각해 놓은 바가 있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출발 하시지요! 야차 형의 은닉술이 우리 셋 중에서 가장 고명하니 도움을 받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후 그가 두 날개를 펄럭이자 은색 기운이 몰아치며 그들을 품고 바람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때 곤오산 중턱의 정자에서 오색 빛깔의 공작새가 은색 장막을 뚫고 나가고 있었다.
주령당으로 향한 한립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돌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돌계단 양옆에 자라난 나무들은 전부 제련하기에 좋은 재료들이었지만 한립은 쳐다보기만 할 뿐 절대 건드리지는 않았다.
잠시 후 눈앞이 환해지며 멀리 커다란 누각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립은 희색을 드러내며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계단 끝에 도달했다.
그러나 순간 안색이 달라져 걸음을 멈추었는데 하얀 빛의 장막 뒤로 푸른색의 거대한 담벼락이 솟아 있어 장원 안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예닐곱 장 높이의 담벼락 위로 보이는 높은 누각 입구에 주령당이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한립이 주위를 살피니 빛의 장막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도저히 이것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보아하니 이곳을 봉인한 상고 수사들이 떠나기 전, 임시로 결계를 쳐놓고 나중에 다시 돌아올 계획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소매를 털어 금빛들을 분출했다.
촤앗.
비검이 변한 금빛들이 빛의 장막을 파고 들었지만 잘라내지는 못했고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에 한립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많다면 서금충을 이용해 해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결정을 내린 그가 허리춤의 저물대를 스쳤다.
그러자 빛덩이가 빠져나와 고풍스러운 양식의 깃털 부채로 변하더니 금색, 은색, 붉은색의 빛을 번뜩였다.
깃털 부채는 봉황의 울음소리를 내며 한립의 수중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가 두 손을 붙였다 떼며 빛을 일으키니 깃털 부채가 수 척 크기로 몸을 키웠다.
한립이 한 손으로 그것을 단단히 쥐고 흔들자 부채에서 삼색 화염이 분출되어 그대로 빛의 장막에 충돌했다.
그러자 봄날 눈 녹듯 빛의 장막이 허물어졌고 순식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한립이 즉시 삼염선을 회수하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