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2
572화. 현청자
같은 시각, 한립 일행은 사금수가 사라지자 전각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엽 가 수사들이 겪었던 비행 금지 금제를 만나 분분히 추락했고 놀라면서도 크게 기뻐했다. 그들이 제대로 곤오산의 요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저게 뭘까요?”
백요이가 돌계단 멀리 무언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서둘러 바라보니 몇 리 떨어진 곳의 돌계단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대나무 숲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전부 두꺼운 보라색 대나무였는데 어찌나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지 원래 있어야할 광장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대나무 숲에 자욱하게 낀 보라색 기운에서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느껴져서 다들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 진법은 빙염량극진(氷焰兩極陣)보다 훨씬 강력해 보이는 군요. 하지만 아마 이게 상대가 펼쳐 놓은 마지막 금제일 겁니다. 이것만 무사히 통과하면 그들을 따라 잡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소리지요.”
화천기가 대나무 숲을 살피고는 신중히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무엇입니까?”
건 노마가 광소하더니 다섯 개의 마귀들이 안개로 변해 대나무 숲 쪽으로 쇄도했다. 화천기 역시 약간 주춤하다가 다른 독성문 장로들과 함께 달려 나갔다.
“저희도 가시죠. ……한 형,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부 노인이 힘차게 말하고 나아가려다가 한립의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저희도 가야지요.”
한립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고 먼저 몸을 날려 몇 장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부 노인은 아직 의구심이 가시지 않은 듯 턱을 쓸며 그 뒤를 따라갔다.
부 노인은 몰랐지만 방금 한립의 체내에서 수십 개의 비검들이 동시에 몸을 떨었다. 고마가 산 중에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그러니 한립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설마 고마가 앞 선 수사 무리에 있다는 것인가?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이지? 산 중에 고마가 원하는 물건이 있거나 무슨 음모가…….’
삼염선과 원영 후기 급의 꼭두각시를 지닌 한립은 더 이상 고마와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대진에서 연달아 고마와 마주치다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천남에서 만 장에 달하는 마기의 심연을 보았던 기억이 자꾸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건 노마의 오자동심마가 이미 대나무 숲 앞에 이르러 회색의 한기를 내뿜으며 뛰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따라오던 독성문 장로 넷과 거한 등의 산수들도 각종 신통을 부려 매섭게 대숲으로 쏘아져나갔다.
마지막으로 한립 일행이 공격에 합류했는데 환영진이 폭발하며 더 많은 불청객들이 몰려들었다.
* * *
작은 호수 북쪽의 지하에서는 여전히 수백 명의 수사들이 빽빽하게 균열의 입구를 둘러싸고 있었다. 환영진이 폭발해 몇 장에 이르는 균열이 그대로 노출되었지만 그 만큼 더욱 불안정해져 은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입구 주변에서 산수나 작은 세력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세 무리의 수사들만이 대치하는 중이었다.
첫 번째 무리는 비취색 의복을 입은 여자 수사들로 전부 어리고 아름다웠으며 차림새가 남강 현지 수사들 같았다. 그리고 그들과 마주 보고 있는 서른 명의 수사들은 절반은 검은 옷을 입고 나머지는 새하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다섯 명의 원영기 수사들 중에는 갈천호와 천란 성녀인 임은병이 포함돼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수려한 외모의 젊은 사내였다.
영기의 파동으로 보아 그는 놀랍게도 원영 후기 수사였다. 그가 바로 천란 초원에서 날아온 서 씨(氏) 성의 대선사였다.
마지막 무리가 수가 가장 적어서 겨우 세 명의 푸른 장포를 입은 도사들로 이뤄져 있었다. 맨 앞에선 하얀 백발에 혈색 좋은 얼굴을 지닌 신선 같은 노인 역시 원영 후기의 대수사였다.
“목 부인, 어찌 이런 혼란한 상황에 끼어들려 하십니까? 빈도가 무례를 범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일로 화선종(化仙宗)의 기강이 흔들릴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정을 보아 간곡하게 권하는 것이니 돌아가시지요.”
백발 노인이 여수사들 앞에 나선 한 여인을 향해 말했다. 말투로 보아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 같았다.
“현청자! 태일문(太一門)이 아무리 정도(正道) 제1문으로 불린다지만, 이건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봉인이 본 종의 세력 범위에 있는데 우리 화선종 수사들의 진입을 막다니요.”
목 부인이 차분히 답했다. 여인들은 봉인 금제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남강의 화선종 수사들이었던 것이다.
화선종은 독성문보다도 대진 수도계에서 더 유명한 곳이었다. 특수한 공법 때문에 제자나 고계 장로들도 대부분 여 수사들이었고 남강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도 저주와 독에 관련한 술법이 무시무시해서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만 리 밖에 떨어진 적을 소리 소문 없이 죽일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이곳 여 수사들과 척을 진 수사가 타지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비명횡사를 하는 경우가 많아 다른 수도자들도 그들을 함부로 건들이지 않았다.
화선종의 목 부인은 심지어 하루에 각기 다른 지역에 있는 동급 수사 셋을 저주로 죽였다고 해 전설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진에서 손에 꼽히는 거대 종파의 장로들도 그녀 앞에서는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
“현청 수사, 다른 종파의 수사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음라종은 반드시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갈천호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천란 수사들과 밤낮없이 남강으로 날아오다가 음라종의 다른 장로 둘을 만나 이곳에 봉인 금제가 있다는 사실을 들은 것이다. 그는 즉시 다른 수사들과 봉인의 틈으로 찾아와 태일문 수사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갈 수사가 꼭 들어가겠다면 빈도도 막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빈도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이 봉인 금제의 틈은 어떤 세력이 절치부심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아래쪽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들어가 봐야 좋은 꼴을 보기는 어렵겠지요! 게다가 지금은 통로가 불안정해서 빈도도 함부로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현청자는 그의 말에 화내는 기색 없이 봉인의 틈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말에 비취색 옷의 부인과 갈천호 등이 침묵했다.
“우리 화선종은 최근에 일월사(日月梭)를 얻었습니다. 천하에 보기 드문 공격과 방어를 겸하는 보물이지요. 저와 사매가 힘을 합친다면 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사숙고하던 목 부인이 얼굴에 드리운 푸른 천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부인께서 놀랍게도 일월사를 다 지니고 계셨습니다.”
“본 종도 얼마 전에 손에 넣어, 앞으로 화선종의 보물로 삼을 생각입니다.”
목 부인이 별로 개의치 않고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그런 보물이 있다면 더는 말리지 않을 터이니 알아서 하십시오. 빈도 역시 이틀 후에는 안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이틀 후에요? 수사께서는 이곳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으신다더니 그건 또 무슨 소리십니까?”
“이틀 후면 천마종 칠묘 진인께서 오십니다. 칠묘 수사의 영귀비차(靈龜飛車)라면 균열을 통과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겠지요.”
“칠묘 진인께서도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요?”
갈천호 등 다른 수사들이 화들짝 놀랐다.
“예. 본래 정마 양측에서 이번 일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저와 칠묘 형이 조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비밀리에 수집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빈도 홀로 들어가서는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니 같이 들어가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천마종의 칠묘 진인까지 오고 있다는 소리에 갈천호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는 천란 성녀와 서 대선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서 씨 청년은 태연했지만 임은병은 그의 전음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갈천호가 전음으로 서둘러 몇 마디를 덧붙이자 서 청년이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임은병은 여전히 내키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말리지 않았다.
그제야 안색이 나아진 갈천호가 현청자를 향해 결연히 선언했다.
“현청 수사의 말을 들으니 이곳 봉인이 심상치 않은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본 종의 대장로가 들어가 있는데 제가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월사나 영귀비차 같은 보물이 없더라도 시도는 해봐야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다 믿는 바가 있으시겠지요. 빈도도 악역을 자처할 생각은 없으니 공간 균열을 넘어갈 방법이 있으시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현청자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천란 성녀와 서 대선사 쪽을 보았다. 그도 천란 수사들의 내력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알겠습니다. 서 수사, 이번에 도움을 좀 주셔야겠습니다.”
갈천호가 웃더니 고개를 돌려 수려한 얼굴의 청년을 향해 말했다.
청년이 한 손으로 영수대 하나를 내려치자 빛이 새어나오며 오색의 공작이 나타났다. 몇 척에 이르는 다채로운 빛깔의 꼬리 깃털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영서공작(靈犀孔雀)…….”
현청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다가 희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맞습니다. 영서공작이 방출하는 오색의 빛은 태생적으로 천지영기를 차단하지요. 영수의 힘을 빌리면 충분히 통로를 지날 수 있을 겁니다. 현청 형, 그럼 저희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갈천호 등은 서 씨 청년의 영수를 보고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공작이 맑은 울음소리를 내고 그대로 은빛 속으로 뛰어 들자 원영기 수사 몇이 호신용 법보를 방출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남은 천란과 음라종의 저계 제자들은 미리 명을 받은 듯 갈천호 등이 무사히 사라지자 즉시 땅 위쪽으로 사라졌다.
이제 봉인 결계의 틈 주변에는 현청자 쪽 수사들과 화선종 여 수사들만 남게 되었다. 목 부인이 침음하더니 고개를 돌려 제자들에게 무어라 분부했다. 그러자 문하의 여 제자들이 흩어져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제자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옆의 아름다운 여인에게 고갯짓을 했다.
“사매, 일월사를 꺼내지.”
“네!”
목 부인의 말에 여인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고 은색 기운이 흐르는 뾰족한 베틀 북이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목 부인이 소매를 털어 그것과 똑같이 생긴 금색 보물을 방출했다.
은색과 금색의 빛이 허공에서 충돌해 섞여 들더니 폭발하거나 튕겨나가지 않고 하나로 합쳐졌다. 금은색의 베틀 북은 크기도 컸지만 영기의 압력이 강대했다.
“가자!”
목 부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리자 고운 여인과 빛줄기로 변해 베틀 북 사이로 사라졌다. 거대한 베틀 북이 금색과 은색빛을 뿜으며 빙글 돌더니 봉인의 틈으로 쇄도했다.
“그리 말렸건만 다들 들어가는 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미리 경고했다는 것을 잊지 마시게.”
현청자가 베틀 북 마저 종적을 감추자 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가 뒤쪽의 결단기 수사들을 향해 손을 저으니 세 수사가 입구 앞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았다.
대수사가 입구를 지키기 시작하자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그저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봉인 속 곤오산 최상층.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괴물이 허공에 떠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괴물의 몸을 무수히 많은 부적들과 빼곡한 쇠사슬들이 엉켜 구속하고 있었다.
부적 하나하나가 남다른 빛을 번쩍이는 최상급이었으나 쇠사슬은 투박하고 새까맣기만 했다. 그러나 쇠사슬 속에 스며있는 핏자국이 묘했다.
전신에 부적과 쇠사슬을 제외하고도 거대한 물체 주변에는 천 개가 넘는 손바닥 크기의 구리거울이 놓여 있었다.
구리거울은 노란색 빛줄기를 하나씩 뿜어내며 기괴한 진법을 형성했는데 거대한 괴물이 그 안에 갇혀 죽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