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1
571화. 규 부인
만수문을 보자 노마 등은 이제 이곳이 곤오산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립 일행을 제외하면 다들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더욱 속도를 높여 계단을 올랐고 자연히 엽 가 수사들이 남겨 놓은 금제와 마주쳤다.
엽 가 수사들이 설치한 금제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강력해져서 노마 등이 급한 마음에 법력을 이용해 강제로 깨부수면서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갈수록 시간이 지체되었다.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돌 꼭두각시들이 쏟아져 나오던 전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 조심하시지요. 이곳에도 금제가 설치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나 많은 진법 법기들을 준비해 오다니 확실히 거대 세력이군요.”
화천기가 고풍스러운 전각을 보라보았다.
“거쳐 온 금제 중에는 빙염량극진(氷焰兩極陣)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씀씀이가 크다니 정말 어떤 무리인지 궁금해집니다.”
건 노마도 냉랭히 동의했다.
“그래도 우리 대신 곤오산 자체의 금제를 깨느라 고생깨나 했을 겁니다. 그들이 남겨 놓은 금제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기는 하였지만 분명 따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건 노마의 차분한 대답과 함께 열댓 명의 수사들이 전각 내부로 들어갔다. 수많은 꼭두각시들의 잔해에 다들 놀라 주위를 살폈다.
“금제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진법을 설치하기 좋은 장소인데 의외입니다.”
“상대도 이미 남은 진법 법기들을 거의 소모했을 거 아닙니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화천기가 즉시 의식을 이용해 곳곳을 살피고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하자 부 노인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건 다 무엇일까요. 돌멩이로도 꼭두각시를 만들어 낸답니까?”
다섯 산수들 중 거한이 바닥에 널린 돌덩이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꼭두각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석령(石靈)입니다. 요수의 혼백을 특수한 방법으로 석상에 밀어 넣는 비술인데 상고 시대에 한창 유행을 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전되었지요.”
누군가 차분히 몸을 굽혀 돌 조각을 살피더니 담담히 설명했다. 뜻밖에도 출발해서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한립이었다.
“오, 한 수사께서는 이런 상고 비술도 아십니까?”
화천기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한립을 보았다.
“별 것 아닙니다. 제가 괴뢰술에 관심이 있어서요. 완전히 망가지지만 않았다면 가져가 연구를 해보았을 텐데 아깝습니다.”
한립은 들고 있던 돌 조각을 던져 버렸다.
석령의 잔해를 살펴보니 역시 아주 평범한 석재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표면에 새겨진 기괴한 진법과 주술이었는데 도저히 알아 볼 수 없게 산산조각 내놓아 가져가 봐야 쓸모없을 것이다.
“한 수사, 온전한 석령을 원하시면 무너진 통로로 들어가 보시지요. 몇 마리는 멀쩡한 상태로 남아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수사들 중 하나가 무너진 옆쪽의 통로들을 눈짓하며 미소 지었다. 한립이 시선을 돌리니 사산 진인 정위였다.
그가 대진 출신이 아니라 사산 진인의 악명은 몰랐지만 그간의 경험이 있는데 어찌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파악 하겠는가! 한립이 미소 지으며 무어라 답하려는데 건 노마가 소리쳤다.
“죽고 싶더냐!”
하얀 그림자 다섯이 일제히 두 손을 펼쳐 열 줄기의 회색 빛줄기를 분출해 근처의 허공을 강타했다.
쿠콰쾅!
폭음이 들리고 그곳에서 보라색 빛이 반짝이더니 사자의 머리를 하고 매의 몸을 한 날개 넷의 괴조가 나타나 수사들을 노려보았다.
이전에 엽 가 수사들을 습격했던 사금수(獅禽獸)였다. 갑작스레 나타난 괴수가 몰래 건 노마의 오자동심마를 습격하려 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엽 가 대장로에게 잘려나간 절반의 발톱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어 있었다.
그러나 괴수도 수사들에게 크게 당한 바가 있기에 위치가 노출되자 네 개의 날개를 펄럭여 순식간에 보라색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사금수! 이곳에 저런 괴물이!”
화천기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만일 그가 홀로 저런 흉악한 요수를 마주쳤다면 얼마나 위험천만 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부 노인과 백요이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걱정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미 은시야차가 이곳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았는데 사금수라는 위험한 요수가 또 등장한 것이다.
다만 나름의 이유로 한립을 포함한 세 수사는 다른 이들에게 은시야차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다른 수사들도 갑작스런 요수의 등장에 안색이 안 좋아졌다. 저런 상고 흉수는 원영 후기의 수사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사금수의 등장에 한립은 사산 진인의 말대로 무너져 내린 통로를 살펴보려던 마음을 접었다.
은시야차 뿐 아니라 또 다른 괴물이 나타난 상황에서 아무리 그라도 혼자 돌아다니는 상황은 만들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들은 몰랐지만 사금수는 순식간에 전각을 빠져 나와 방향을 틀더니 장장 반 시진을 내려가 기이할 만큼 거대한 청록색의 나무 위에 착지했다. 사금수가 듣기 싫은 괴성을 지르며 울어대자 귀곡성 같았다.
“됐으니 그만 울어 대거라! 구구절절 중얼거려도 결국에는 네 대신 복수를 해달라는 소리 아니더냐. 이 몸이 그런데 흥미가 있을 것 같으냐? 그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그 긴 세월을 갇혀 있다 겨우 벗어났는데 또 사단을 일으킬 마음 없다. 게다가 두 무리의 수사들이 전부 원영기 수사라면 건드려 좋을 것도 없지!”
목소리가 들려오고 거대한 나무가 번뜩이더니 나무 표면에 한 장 크기의 구멍이 나타났다. 그 안에서 새까만 옷을 입은 부인이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허리가 두툼하고 피부는 새까만 못생긴 여인이었다. 여인이 나타나자 사금수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난 듯 붉은 눈을 번뜩였고 처량하게 괴성을 질러댔다.
“꿈 깨라니까 그러는구나! 자기가 방심해서 발톱이 절반이나 잘려나가 놓고 나더러 복수를 해달라니……. 게다가 곤오삼자의 후손들이 우리를 이곳에 구속해 놓은 것도 그들을 대신해 이 산을 지키라는 것 아니겠느냐. 굳이 그들의 뜻대로 움직일 게 무엇이야!”
부인은 팔짱을 끼고 사금수를 향해 쏘아 붙였다.
“하지만 그들이 곤오전으로 들어가게 놔두면 우리를 구속할 영패를 빼앗길 겁니다. 그럼 또 수사들의 부림을 받는 신세로 전락하겠지요.”
또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푸른빛이 번뜩이고 은시야차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흥! 겨우 그들 능력으로 곤오전에 진입이나 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곤오전 금제를 무엇으로 보고! 특히 그 북극원광(北極元光)은 근본적으로 인간 수사가 이겨낼 수가 없어요. 곤오전에 들어가면 바로 죽은 목숨이란 말입니다.”
“규 수사,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북극원광의 위력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이곳에 들어온 이들 중에는 원영 후기의 인간 수사들도 있어요. 그들이 북극원광을 막아낼 만한 법기나 보물을 지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요. 게다가 이번 기회를 틈타 우리도 본명패(本命牌)를 되찾아야 할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곤령진(困靈陣)을 벗어나도 곤오산은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은시야차는 흔들림 없이 주장했다.
“영기가 이렇게 충만한데 왜 급히 곤오산을 떠나야 하죠? 바깥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곳보다 수련하기 더 좋은 땅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못생긴 부인은 은시야차가 본명패를 언급하자 안색이 달라졌지만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규 수사도 봉인이 완전히 풀리면 이곳에서 수련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나름 인연이 있으니 어려움을 같이 헤쳐 나가야지요.”
“인연이기는 합니다. 당신은 인간 수사의 육체를 이용하고, 나와 사금수는 영수에서 지금의 모습이 되긴 했지만 다 같이 곤영진에 갇혀 있었던 세월이 있으니까요.”
규 부인도 부정하지 않고 안색을 풀었다.
“그러니까 우리 셋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곤오전에는 우리를 막는 금제가 있어 평소에는 접근이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인간 수사들이 대신 길을 열어 놓으면 그 뒤를 쫓다가 기습하면 본명패를 챙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야 쉽지만 사금수에게 들으니 인간 수사들의 수가 적지 않고 원영 후기 수사도 섞여 있다던데요? 그리고 당신이 말하던 통천령보와 비슷한 보물을 지녔다는 수사도 있고요! 그들이 본명패를 손에 넣는다면 난 그냥 산맥 깊숙이 숨어 버릴 겁니다. 다시 한 천 년 정도 자고 일어나면 인간 수사들을 마주 칠 일도 없겠지요.”
“규 수사……. 저 역시 토둔술에 능통하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은시야차가 참다못해 얼굴을 굳히고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죠?”
“간단하지 않습니까. 제가 본명패를 빼앗겨 인간 수사의 수중에 떨어지면 당연히 규 수사의 일도 숨길 수 없지요. 십급 현암귀(玄岩龜)의 요단을 쉽게 포기할 수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때가 되어 제가 어쩔 수 없이 수사를 추적하게 되면 후회나 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나랑 같이 숨으면 될 게 아니에요!”
규 부인이 노기를 드러내며 쏘아 붙였다.
“저는 본명패를 되찾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고 이곳에서 평생 갇혀 있을 생각도 없습니다. 곤오산을 벗어나 음월정화(陰月精華)를 받지 못하면 평생 금신월시가 될 수 없단 말입니다.”
“결국 당신을 위해 이 몸을 위협하는 거 아닙니까!”
은시야차의 말에 규 부인이 펄쩍 뛰었다.
“위협인지 아닌지는 규 수사께서 스스로 판단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제게 빚이 있다는 것은 잊지 마십시오. 당시 수사들이 우리 몸에 폭혈주(暴血呪)를 걸어 이지를 상실한 천치로 만들려 했을 때, 제가 청허단(淸虛丹)을 몰래 나눠주었다는 것을요!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피에 미친 야수가 되었지 오늘날의 화형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은시야차가 등 뒤의 날개를 펼치며 냉랭히 말했다.
“그 빚은, 나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말고도 이곳으로 전송된 네 번 째 녀석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가 요수인지 아니면 귀물인지 모르지만 그 자만 포섭할 수 있다면 저도 고려해보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규 부인이 결국에는 한결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이미 사방을 뒤져 보았지만 네 번째 녀석의 곤령진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운이 따르지 않아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르지요. 청허단 없이 정신을 잃고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은 그 자를 찾고 있을 시간도 없습니다.”
은시야차가 고개를 저었다. 규 부인이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날카롭게 일렀다.
“좋습니다. 기왕 청허단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이번 한번만 당신을 돕지요. 본명패만 손에 넣으면 각자 갈 길을 가는 겁니다. 이 몸도 이런 산 구석에 처박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니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져 몸을 숨길 거예요.”
“바로 그 말입니다. 자유의 몸이 되면 우리의 수행에 세상 천하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은시야차는 현암귀가 변한 부인의 능력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기에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움직이기 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짜야 합니다. 인간 수사들이 이미 우리 둘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더욱 조심을 해야겠지요.”
못생긴 부인은 제안을 수락하더니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은시야차가 주저 없이 동의했고 듣고 있던 사금수도 낮게 으르렁거렸다. 세 요괴들은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속삭여 대더니 장장 한식경이 지나서야 돌계단 쪽으로 날아갔다.
거대한 나무 주변은 다시 고요해 져서 바람 부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대한 나무 옆의 수목의 표면이 울룩불룩해지더니 두 개의 청록색 눈이 나타났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냉랭히 은시야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수목은 놀랍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물이었는데, 은시야차 등 뛰어난 능력을 지닌 괴물들도 지척에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요물의 눈이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전신에서 녹색 빛을 반짝이며 순식간에 땅 속으로 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