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0
570화. 곤오전, 영보각, 진마탑
유생이 한참 고민하다 결국에는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저 비천시의 존재가 마음에 걸립니다. 시간이 된다면 숙부님과 힘을 합쳐 죽이고 나아가는 것이 좋겠지만 지금은 저희도 시간에 쫓기는 형편이 아닙니까. 괜히 상대를 쫓아내려다 화를 부를 수 있으니 기회를 보아 금제로 괴물을 가둬 죽여야겠습니다.”
그 말에 일리가 있어 다들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시야차의 엄청난 둔술과 은닉술로 보건데 그것을 쉽게 떨치기도 죽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엽 가 수사들은 법력을 대충 회복하고는 전각 바깥으로 이어지는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순간 앞이 밝아지며 바깥의 풍경을 살핀 수사들은 다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 앞에 크고 작은 돌계단들이 산 위쪽 혹은 아래쪽을 향해 뻗어 있었는데 다들 그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 해야 할까요? 각자 하나씩을 맡아 탐색해도 다 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일행 중 노인 하나가 유생을 돌아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긴장하지 말거라. 우리가 제대로 찾아 왔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각자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홀로 다녔다가는 보물을 찾기는커녕 목숨을 잃기에 딱 좋겠지. 일단 계단으로 가서 무슨 표지가 없는지 살펴보고 결정을 하자꾸나.”
유생은 엽 가 대장로로서 차분히 결정을 내리고 행동에 옮겼다. 여러 계단들의 시작된 곳은 몇 리 떨어진 거대한 광장이었는데 하얀 옥으로 깎아 만든 것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다들 더 좋은 대책이 없었기에 대장로의 분부대로 둔술을 써서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들이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비행 금지 금제가 걸려 있구나. 어찌 이런 금제가?”
대두 거한이 소리를 높였다.
다들 얼마 되지 않는 거리라 낮게 날아서 망정이지 고공에서 그대로 추락했으면 크게 부상을 당할 뻔 했다. 하지만 확실히 곤오산의 중심부로 다가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한 수사께서 천남 출신이셨다니 놀랐습니다. 천남 출신의 수사들은 대진에서 찾아보기 힘든 데요. 허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음라종 장로를 죽이고 귀라번을 가져 가셨다니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정자 인근에서 화천기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부 노인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듣고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다른 수사들도 동요하며 한립을 살폈는데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천남은 사실 대진에서 너무 멀고 대진 수도계에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천남 출신 수사가 음라종과 대적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저를 지키기 위해 그랬을 뿐입니다. 음라종 장로가 먼저 저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런 일도 없었겠지요.”
“뭐 어찌됐건 상관없습니다. 세 분은 이곳에서 한동안 계셨던 것 같은데 그럼 이곳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원영기 산수 거한의 관심은 오직 이곳이 어딘지 아는 것 뿐이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진에서는 이곳을 곤오산이라 부르는 것 같더군요.”
“곤오산!”
“곤오!”
원영기 거한은 물론이고 다른 수사들도 크게 희색을 보였다. 건 노마조차 그 말에 크게 놀랐지만 독성문 장로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말씀은 누군가 이곳의 정체를 알고 봉인 금제를 뚫었다는 것이군요. 게다가 이런 규모의 금제를 풀 정도면 상당한 세력일 테고요! 건 형, 한 수사 일행과 갈등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전투를 벌일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이곳의 다른 세력을 몰아내고 곤오산의 보물을 나누는 것이 어떠십니까? 사적인 은원은 이곳을 나가서 해결하면 될 것 아닙니까.”
화천기가 턱을 쓰다듬으며 하얀 그림자들을 향해 말했다.
“…….”
건 노마가 그의 제안에 침묵했고 사산 진인과 거한 등 산수들도 입을 달싹이며 서로 상의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부 노인과 백요이는 차라리 안심이었다. 셋이 힘을 합치면 건 노마에게 무조건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싸우지 않는 것이 그들로서는 최선이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한립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보아하니 이곳에서 건 노마와 싸우기는 이미 틀렸고 봉혼주를 해결할 방법도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듯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이 고개를 들어 화천기 등을 향해 물었다.
“화 수사, 환영진이 폭발했다면 봉인 결계의 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곳에서 나갈 수는 있는 것입니까?”
“어떤 상태냐고요? 한 형께서 직접 살펴보시는 것이 빠르겠지만, 며칠 내로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을 겁니다.”
화천기가 탄식하며 솔직히 답해주었다. 한립은 잠시 주저 하다 그대로 빛의 장막으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돌아온 한립은 낯빛이 어두워져 부 노인과 백요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지나갈 방법이 없겠습니다. 그래도 다시 통로가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으니 그동안 산이나 살펴보시지요.”
이후의 상황은 간단히 정리되었다.
건 노마는 이곳이 곤오산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싸울 생각을 접었다. 우연히 이곳에 들어왔지만 싸우느라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다른 다섯 명의 수사들도 상의 끝에 같이 움직이는데 동의했다.
“모두 연합하기로 했으니 상대가 어느 정마십종의 수사들이라 해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보물을 빼앗기기 전에 어서 움직이시죠!”
의견이 좁혀지자 화천기는 바로 크게 외치며 독성문 장로들을 이끌고 먼저 계단 위로 날아갔다.
건 노마의 하얀 그림자들도 하나의 둔광 속에 뭉쳐져 그 뒤를 쫓았고 한립 등 다른 수사들도 분분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시각, 엽 가의 수사들은 벌써 백옥으로 만든 광장에 도착해 있었다.
백 묘에 달하는 거대한 광장은 정말 최상급의 정결한 옥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열댓 개의 백옥 기둥이 솟아 있었다. 각 기둥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진귀한 영수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엽 가 수사들은 백옥 기둥을 그래도 지나쳐 광장의 어딘가에 뭉쳐 서 있었다.
광장에서 시작되는 돌계단 앞에는 각각 옥으로 만든 비석이 있었는데 금석각(金石閣), 상운전(祥雲殿), 기령원(奇靈院)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금석각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재료를 보관하는 곳일 테고, 상운전은 아마 조용히 수련하는 장소가 아닐까 합니다. 기령원은 한 눈에 보기에도…….”
엽 가 수사가 하나씩 옥으로 만든 비석을 살피며 거처의 용도를 유추해갔다. 다른 수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통천령보가 있을 법한 길은 세 가지로 좁힐 수 있겠군요. 중간에 곧게 길이 나있는 곤오전(昆吾殿), 그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영보각(靈寶閣), 주변부로 향하는 진마탑(鎭魔塔).”
엽 가 수사가 최종적으로 세 곳을 골라내자 유생과 대두 괴인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곤오전은 설명할 필요 없이 곤오산에서 가장 중요한 곳일 것입니다. 그리고 영보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상고 수사들이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였을 테죠. 마지막으로 진마탑은 상고 수사들이 요마를 가둬두는 곳일 텐데 곤오산 전체가 봉인된 것으로 보아 통천령보가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상고 시대에는 보물의 위력을 이용해 요마를 봉인하는 수법이 흔했으니까요.”
“맞는 말이네. 나도 통천령보가 세 곳 중 하나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군. 하지만 우리의 능력으로 전부 가볼 수 없는 없네. 기껏해야 두 곳 정도 돌아볼 수 있겠지.”
유생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두 곳? 어느 길을 말하는 것이더냐?”
“저는 영보각과 진마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두 괴인의 물음에 유생은 주저 없이 답했다.
“흠? 내 생각에는 곤오전이 진마탑 보다는 통천령보가 있을 가능성이 높을 듯한데?”
“영보각은 통천령보가 없다 해도 다른 보물이라도 있을 테니 당연히 가보아야 합니다. 다만 곤오산 자체가 봉인된 것과 통천령보를 두 점이나 남겨 놓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강력한 요마를 잡아 놓았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 말도 틀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곤오전이 핵심 건물인 것은 명백하니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고 본다.”
유생과 괴인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저희의 인원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둘로 나누는 것도 위험한데 셋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유생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괴인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자꾸나! 어차피 우리가 아홉 명이니, 너와 내가 각자 세 명씩을 데리고 영보각과 진마탑을 살펴보는 게다. 그리고 둔술에 고명한 장로를 한 명 곤오전으로 보내 그곳을 둘러보게 하는 것이지. 만일 금제가 너무 강력해 어쩔 수 없다면 바로 돌아와 보고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 둘 중에 탐색을 먼저 마친 이가 곤오전을 살펴보면 되지 않겠느냐.”
“흠……. 숙부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홀로 곤오전에 가는 장로는 사금수나 은시야차의 습격에 취약할 수 있으니 미천탁(彌天鐸)을 내주어 지니게 하시지요.”
“미천탁이 있다면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구나.”
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엽 가 일행은 둘로 나뉘었고 고마는 슬쩍 괴인의 뒤로 가서 섰다. 그리고 곤오전을 홀로 둘러볼 수사는 각진 얼굴의 중년인이 자처해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엽 가에서 괴인과 유생을 제외하고 수행이 가장 높았고 나이도 많았다. 유생이 잠시 주저 하다 저물대에서 백골로 제련한 방울을 꺼내 주었다.
“미천탁은 사용할 때마다 정혈을 이용해야 하니 둘째 형님도 주의해서 사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알아서 잘 할 테니 너무 염려 말거라.”
각진 얼굴의 수사가 보물을 받아 들며 답했다.
“듣자니 진마탑은 흉악한 요마나 귀물을 잡아 둔다던데 노부는 그곳에 한 번 가보고 싶구나.”
그때 괴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숙부님과 제 생각이 똑같으십니다. 저도 본래 진마탑을 가보려 했지만 그리 말씀하시니 숙부님께 양보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영보각을 살피지요!”
유생은 의외라는 얼굴이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두 괴인이 사양하지 않고 고마와 다른 세 수사를 이끌고 진마탑이라고 적힌 비석 뒤의 계단을 따라 달려갔다.
각진 얼굴의 수사도 유생을 향해 포권을 하고는 미천탁을 쥐고 신형을 움직여 중간에 있는 돌계단을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
유생은 즉시 출발하지 않고 괴인과 각진 얼굴의 수사가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봉 사질, 진법 깃발들이 몇 벌 남았지?”
“대장로님께 아룁니다. 분부하신대로 이곳으로 향하는 동안 지나온 금제마다 임시로 진법을 설치 해두어 수십만 영석을 주고 매입한 자미칠성대진(紫薇七星大陣)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그것을 이곳에 설치하지. 호두봉(虎頭蜂)무리와 흡혈복(吸血蝠)들도 진법 속에 풀어 놓고 말이야.”
“예!”
대장로의 명에 노인이 즉시 답하고는 허리춤에서 보랏빛의 깃발들과 원반을 꺼내 광장 곳곳으로 날려 보냈다. 유생은 그제야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한 시진 후 유생 등도 드디어 돌계단을 하나 골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한참 아래쪽인 산 중턱에서 한립 등은 만수문이라는 거대한 문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엽 가 수사들이 고명한 환영진을 남겨 놓아 결단기 수사들이었다면 며칠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영기 수사들로 이루어진 무리였기에 크게 시간이 지체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