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569화 (326/2,000)

# 569

569화. 살심(殺心)

회색 장포 수사는 회색 기운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볼 수 없었지만 회백색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보건데 상당히 나이가 많은 노인 같았다.

건 노마가 뜻밖에도 화신을 떠나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한립뿐 아니라 부 노인과 백요이도 경계심을 드러내며 음라종 대장로를 주시했다.

노마는 아무 말 없이 허리춤을 스쳐 작고 새까만 깃발을 꺼내더니 세 수사를 향해 가볍게 흔들었다.

부 노인은 놀라 한 손에 무언가를 움켜쥐었고 백요이도 서늘한 기운을 방출해 보호막을 형성했다.

오히려 한립은 눈썹만 끌어 올릴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지…….”

검은 깃발이 빛을 번뜩이고 아무 반응이 없자 건 노마의 표정이 묘해졌다.

“건 형,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다짜고짜 귀라번을 꺼내다니 우리와 싸우자는 것입니까?  음라종과 구유종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냔 말입니다.”

부 노인은 건 노마의 능력을 두려워했지만 곁에 원영 중기 수사가 둘이나 있는데다 한립의 신통을 보아왔기에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었다.

“구유종과 전쟁이라…… 그럴 생각 없습니다. 다만 한 수사와 따로 해결할 일이 있으니 두 분이 이대로 떠나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건 노마가 세 수사를 훑더니 차분히 말했다.

“건 수사께서 저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오자동심마에 대한 소문은 오래 전부터 들어와서 안 그래도 한번 겨뤄보고 싶었습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뜻밖에도 흔쾌히 상대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 말에 부 노인과 백요이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건 노마도 의외였는지 서늘한 눈빛으로 한립을 살폈다.

“그건……. 건 형! 한 수사와 귀 종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갑자기 이러시는 건 아니지 싶습니다. 일단 이곳을 둘러보실 생각도 없으십니까?”

부 노인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한립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미 곤오산이 위험천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강력한 원군을 잃기 싫어서였고, 당장 한립을 잃고 건 노마가 딴 마음을 품으면 상대할 자신도 없었다.

“이 산은 당연히 살펴보아야지요. 하지만 한 수사는 본 종이 오랫동안 추적하던 인물이라 이렇게 넘어 갈 수는 없습니다. 어찌 부 형께서 이 일에 참견하시려 하십니까?”

“이곳을 나간 뒤에 건 형께서 한 수사와 은원을 해결하려 하신다면 저희도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저희 셋은 힘을 합쳐 이곳을 빠져 나가기로 약조하였으니 지금은 나서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이번에는 백요이가 결연히 나섰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한립을 잃고 이 위험한 곳에 고립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부 노인과 함께 한립의 능력을 지켜봤기에 원영 후기 수사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예상 밖으로 부 노인과 백요이가 강경하게 나오니 회색 장포 수사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마치 당장이라도 셋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할 기세였다.

하지만 부 노인과 백요이도 속으로는 놀랐을망정 겉으로는 전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두 분의 체면을 보아 노부가 이번에는 물러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 종의 보물이 남의 수중에 있는 것을 두고 볼 수야 없지요! 보물을 내놓지 않겠다면 원기를 크게 상하더라도 세 분과 싸울 수밖에요.”

건 노마는 서늘한 기운을 거두고 담담히 말했다.

“보물이라면 귀라번을 뜻하는 것입니까?”

한립이 미소 지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바로 그것입니다. 천남에서 죽인 본 종의 네 번째 장로에게서 귀라번을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보물만 내놓는다면 잠시 목숨을 연명하게 해드리지요.”

“잠시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겠다……. 흠, 아주 자신감이 넘치십니다. 귀라번은 돌려 줄 수 있지만,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본 종의 장로를 죽이고 보물을 갈취한 주제에 감히 노부와 조건을 논하다니! 정말 노부가 당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건 노마는 분노를 드러내며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이후 뒤쪽의 다섯 그림자가 동시에 펄쩍 뛰어 올라 건 노마 앞으로 나섰다.

이에 진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부 노인도 깜짝 놀라 한립을 쳐다보았다.

음라종 네 번째 장로가 갑자기 증발한 것은 구유종에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명성이 높은 음라종 장로가 한립의 손에 죽고 귀라번까지 빼앗겼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건 노마가 이런 곳에서 무턱대고 싸움을 벌일 만 했다.

게다가 한립은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지금까지 해외 수사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던가.

“흥! 귀 종의 장로가 갑자기 천남에 나타나 제 반려를 암습한 것은 모르시나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귀라번을 그냥 내줄 거라고 보십니까?”

한립이 얼굴을 굳히며 음산하게 소리쳤다.

“넷째 장로가 어째서 천남에 가 당신에게 죽었는지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난 그저 본 종의 보물을 기필코 되찾아 오겠다는 생각뿐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음라종의 체면이 땅에 떨어질 것 아닙니까?”

“그렇다는 건 제 조건은 들어볼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당신이 십대종파의 대장로였다면 그 조건을 들어봤겠지만 겨우 천남 수사 주제에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건 노마는 고개를 쳐들고 웃어대더니 농염한 살기를 분출하며 하얀 그림자들 속으로 사라졌다.

다섯 개의 하얀 그림자에서 회색빛이 크게 터져 나오며 생기 없던 열 개의 눈들이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광기를 드러냈다.

“이런,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이건 노마가 수련한 역정단천대법(逆情斷天大法)입니다. 무자비한 공격으로 유명한 공법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한 말에 노마가 단단히 열이 받았나 봅니다.”

마귀들의 달라진 기운을 보고 부 노인은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고 백요이는 미간을 좁히며 입에서 얼음으로 만든 비도를 분출했다.

한립은 조용히 소매 속에 가려져 있는 손에 삼염선을 들었고 다른 손은 저물대에 올려 언제라도 인간형 꼭두각시를 발동할 생각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전투가 시작된 순간, 부 노인과 백요이의 공격에 노마의 신경이 분산되는 틈을 노려 전력을 다해 상대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 자리에서 상대를 죽일 수는 없어도 중상을 입혀 놓으면 다음에 음라종 대장로를 상대하기 훨씬 유리해 질 것이다.

그는 남궁완을 구하기 위해 봉혼주를 풀 방법을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저주를 풀 방법만 알아내기만 한다면 앞으로 밤낮 없이 음라종 수사들의 추격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때 다섯 마귀들도 입에서 중얼중얼 무언가를 읊어대며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마치 연기처럼 흔들거리며 길어졌는데 당장이라도 이곳을 향해 들이닥칠 기세였다.

쿠콰쾅!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얀 그림자들이 뛰쳐나왔던 허공에서 경천동지할 폭발이 일어났고 눈부신 은색빛이 분출되었다.

팟! 팟! 파파팟!

한립 일행이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 안에서 열 개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빛줄기들이 튀어 나와 허공을 선회했다.

“무슨 일이기에 다들 표정이 그러십니까?”

건 노마가 새로 나타난 수사들을 향해 물으며 당장이라도 공격하려던 하얀 그림자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빛의 장막 사이로 날아든 수사들은 안색이 엉망이었지만 전부 원영기 수사들이라 건 노마라 해도 가볍게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들려온 폭음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 건 형께서는 저희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하셨군요. 허, 구유종 부 수사 아니십니까?  다른 분들은…….”

그들은 독성문의 네 장로들과 다섯 명의 산수들이었다. 사산 진인은 슬쩍 다른 이들 틈에 섞여 있었지만 화천기가 한립 일행을 보더니 바로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며 물었다.

“화 형을 이곳에서 다 뵙습니다. 그런데 방금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나던데 어찌된 일입니까?”

부 노인도 폭음이 마음에 걸려 서둘러 물었다.

“그건 우리가 묻고 싶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하신 것을 보니 바깥의 환영진도 그쪽 소행이 아닙니까?  방금 환영진이 스스로 터져나가며 통로를 봉쇄한 것도 미리 철저히 준비해 놓은 것이겠지요.”

산수들 중 거한이 코웃음 쳤다. 그 말에 다른 이들도 안색이 변해 한립 일행을 쳐다보았는데 분명한 적의가 느껴졌다.

“그건 큰 오해십니다. 저희가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다른 수사 무리가 있었고 환영진도 저희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렇게 무턱대고 없는 소리를 지어내 아무 상관없는 저희에게 화풀이라도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부 노인이 안색을 굳히며 쏘아붙였다. 이런 생황에서 얕보였다가는 분위기에 휩쓸려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수사들이 더 있다고요?”

그 말에 독성문 네 장로들과 건 노마마저 화들짝 놀랐다.

“우리는 우연히 상고 전송진에 의해 이곳으로 전송되어 왔을 뿐입니다. 며칠 동안 다른 금제에 갇혀 고생하다 산 위쪽에서 금제를 깨는 소리를 듣고 겨우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수사들이 말씀하시는 환영진은 그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부 노마도 언변이 만만치 않아 몇 마디 말로 대부분의 상황을 정리해 냈다.

“그렇단 말입니까?”

거한은 머뭇거렸고 다른 수사들도 반신반의하기 시작했다.

“구유종 집법 장로이신 부 형께서 금세 들통 날 일로 저희를 속이실 리가 없지요! 게다가 만일 구유종이 봉인 금제를 깬 것이라면 구유종 고 수사가 이곳에 없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닙니까.”

화천기가 안색이 풀어지며 부 노인의 말을 믿는 듯 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들어올 때 보니 세 분과 건 형의 분위기가 묘하던데요. 혹시 건 형과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화천기가 돌연 화제를 돌렸다. 부 노인이 순간 주저하며 무어라 답해야 할지 생각에 빠졌다.

* * *

같은 시각, 곤오산 위에 위치한 거대한 전각.

대두 괴인이 금색 종을 흔들자 은백색 뇌전이 튀어나와 돌로 만들어진 호랑이 꼭두각시를 박살냈다.

그 뒤에 있던 엽 가 수사들도 법보를 이용해 돌 꼭두각시들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꼭두각시들은 전부 짐승이나 새의 모습을 했지만 몸이 굉장히 단단하고 간단한 술법을 부릴 수 있어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전각 도처에서 꼭두각시들이 쉼 없이 뛰쳐나왔다.

그러나 엽 가 수사들은 하나같이 침착한 얼굴로 법보나 법술을 이용해 꼭두각시들을 죽였다. 잠시 후 멀리서 굉음이 들려오며 한쪽 통로가 막혀 꼭두각시들이 더는 들이닥치지 못했다.

이에 엽 가 수사들이 희색을 드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의 통로들도 연달아 쿵하는 소리가 나며 무너져 내렸다. 새로운 꼭두각시들의 유입이 없자 나머지를 해치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일반적인 꼭두각시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엽 가 수사들은 한시름을 놓고 분분히 영석을 꺼내 가부좌를 하고 주저앉았다. 위험천만한 순간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법보를 움직여 꼭두각시들을 상대한 탓에 법력 소모가 컸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너져 내린 통로 속에서 잔해를 뚫고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하얀 장포의 유생이었다.

“한 장로가 말한 대로에요! 각 통로의 끝에 편전이 있었고 그곳에서 꼭두각시들이 뛰쳐나오고 있었습니다. 수사의 말대로 금제를 깨고 편전 자체를 허물어 버렸더니 해결이 되는군요.”

유생은 미소 지으며 수사들 중 하나에게 말했다.

“고대 경전에서 비슷한 괴뢰대진(傀儡大陣)을 본 적이 있어 알아낸 것입니다. 만일 계속 꼭두각시들만 죽여 나갔다가는 법력을 전부 소진하고 이곳에서 빠져 나가기 어려웠겠지요.”

“이 일에 한 장로를 모셔 온 것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대장로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유생의 말에 고마는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때 옆에 있던 대두 괴인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대충 시간 계산을 해보니 환영진에 심어 놓은 다음 수단이 발동했겠구나. 운이 좋다면 우리를 위해 시간을 조금 더 벌어주겠지!”

“맞습니다. 지금쯤이면 누군가 환영진에 들어섰을 테니 얼마안가 폭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임시로 막아둔 통로가 5, 6일 정도밖에는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곧 봉인 자체가 약해질 테고요.”

“봉인 결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지만 완전히 붕괴되려면 아직 멀지 않았더냐?  우리가 보물을 차지할 시간은 넉넉할 테니 걱정 말거라. 지금 우리가 어디쯤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심지에 도착할 때가 멀지 않았을 게야.”

“그렇겠지요. 금제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 곤오산의 요충지에 가까워지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걸리는 게 있단 말이야. 은시야차, 그 음흉한 괴물이 어째서 우리 뒤를 쫓는 것일까. 설마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하려고?”

대두 거한은 이 말을 하며 전각의 또 다른 입구 쪽을 힐끗 살폈다. 다른 이들도 그의 말에 시선을 옮겼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머지않은 곳에서 은지야차가 은신술을 펼쳐 그들의 뒤를 밟고 있었다. 정말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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