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8
568화. 우연한 만남
원영기 수사 몇몇도 각기 흩어져서는 생각에 잠겼다. 막아서는 무리가 사라지자 오히려 마음이 복잡해 진 것이다.
“그러지 말고 저와 같이 손을 잡고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웅성거리는 수사들 틈에서 사산 진인이 체격이 좋은 거한 앞에 나타나 실실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랑 손잡고 저 안에 들어가자고요? 됐습니다. 수사의 위명은 저도 익히 들어와서 말입니다.”
“에이, 그리 펄쩍 뛸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이곳에 저희 말고도 낯선 얼굴의 원영기 수사들이 셋이나 더 있던데. 다섯이 힘을 합치면 건 노마든 독성문 수사들이든 눈치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위 수사가 개의치 않고 붙임성 있게 그를 설득했다.
“흠, 일단 다른 수사들과 이야기가 끝나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다른 수사들을 설득하는 일은 제게 맡기세요.”
정위가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을 하고 보라색 빛에 휩싸인 노인에게 다가갔다.
“저희와 같이 결계에 들어가 볼 생각이 없으십니까? 저쪽의 수사와는 이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나머지 두 분을 설득해서 다섯이 뭉치면 훨씬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을 텐데요?”
정위는 노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껏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노인이 미간을 좁히고 정위를 보고는 멀리 떨어진 거한을 살피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일면식도 없던 다섯 산수들이 무리를 이루어 환영진 안으로 진입했다. 이렇게 지하 공간에는 결단기 수사들만 남게 되었다.
* * *
원영기 수사들이 결계 틈으로 뛰어들었을 때 한립은 남색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상한 공간에 홀로 서 있었는데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이 사방에 다양한 색의 구름만 가득했다.
“아무리 날아도 빠져 나갈 수는 없는 것이 환술 같지도 않고 말이야. 설마 이곳에 계속 갇혀있어야 하는 건가?”
한립은 울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며칠 째였다.
며칠 전, 세 수사는 계단을 오르다 어떤 암석에서 무척 진귀한 영초를 발견했다. 부 노인이 욕심이 났는지 서둘러 영초를 채취하다 그것이 어떤 금제를 촉발시켜 이런 이상한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
백요이와 부 노인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한립은 처음은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에 묘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날아가도 똑같은 풍경이 반복될 뿐이고 명청령안을 이용해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 것도 알아 낼 수 없었다.
또 비검이나 법보로 이곳저곳을 공격해 보았지만 멀리 뻗어 나가 사라질 뿐 실체가 없는 무한한 공간에서는 아무리 날카로운 공격도 소용없었다.
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허공에서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고 시대의 기이한 진법들을 차분히 떠올리며 비슷한 것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돌연 눈을 뜨더니 사방의 구름들을 둘러보았다.
“역시 그랬어. 지금까지 이것을 모르고…….”
한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허공에 손을 흔들자 푸른빛의 손이 허공에서 나타나 붉은 구름을 움켜주었다.
한립이 거대한 손을 바라보며 주술을 외자 기괴한 수결이 맺어졌다. 거대한 손에서 푸른빛이 크게 번지자 찬란한 빛을 뿜어대며 빛덩이로 변한 것이다.
한립은 입을 벌려 푸른 영화 한 줄기를 뱉어냈다. 그러자 영화가 표표히 날아가 빛덩이에 닿아 활활 타오르며 표면을 휘감았다.
그제야 한립은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무표정하게 빛덩이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그가 입 꼬리를 올리더니 돌연 소매를 털어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빛덩이를 감싸고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고 그 안에서 붉은 구슬이 나타났다.
“과연 이 방법이 옳았어! 이렇게 고명한 방식으로 숨겨 놓다니 상고 수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 오래 전 신여음이 남겨준 경전에서 유사한 금제를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빠져나갈지 전혀 실마리를 잡지 못할 뻔 했군. 앞으로 명청령안의 위력을 키우는데 더 공을 들여야겠어. 백여 년만 더 명청령액을 이용해 눈을 씻어 내면 최상급 환영진도 꿰뚫어 볼 수 있을 테지.”
그는 허공에 떠 있는 붉은 구슬을 놔두고 이번에는 남색 구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손을 뻗자 똑같이 생긴 거대한 손이 나타나 남색 구름을 쥐엇고 다시 한 번 영화를 내뿜었다.
그런데 이번엔 구름이 화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달아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개의치 않고 다른 남색 구름을 노려 구슬을 얻어낸 것이다.
이렇게 반나절을 들여 노란색, 푸른색, 금색의 세 개의 구슬을 차례로 더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신중하게 구슬을 향해 손짓했고 허공에 둥둥 떠 있던 구슬들이 어딘가로 날아갔다.
한립이 손가락을 악기 연주하듯 튕겨내자 구슬들이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다섯 빛깔의 고리를 그리며 신비로운 모습을 만들어 냈다.
“가라!”
한립의 말에 다섯 개의 빛의 고리가 흩어졌다가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별안간 허공의 한 지점에 자리를 잡은 구슬들은 쉼 없이 몸을 늘렸다 줄였다 했다.
콰콰쾅!
한립이 두 눈을 가늘게 뜬 순간, 굉음이 곳곳에서 터지며 다섯 개의 구슬이 폭발해 엄청난 빛을 내뿜었다. 허공에 다섯 개의 태양이 뜬 것만 같았다.
다섯 빛깔의 빛이 퍼져나가며 공간 전체를 휘감은 순간 주위가 밝아지며 익숙한 돌계단이 나타났다. 머지않은 곳에 진귀한 영초를 캤던 암석이 보였다.
“한 수사!”
“한 형!”
노인과 여인의 놀란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한립이 고개를 돌리니 백요이와 부 노인이 몇 장 옆에 떨어져 초췌한 낯으로 그를 보며 반가워하고 있었다.
“두 분도 빠져 나오셨군요.”
“한 형께서 이 이상한 금제를 깨트려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노부도 꽤 오래 살아왔지만 이렇게 무서운 진법은 처음입니다.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 죽는 줄 알았어요!”
부 노인이 생각만 해도 무섭다는 듯 이를 갈았다.
“저도 안에서 부 형과 마찬가지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번에 정말 한 형의 덕을 톡톡히 보았어요.”
“저도 이전에 어떤 경전에서 비슷한 금제를 들어본 적이 있어 간신히 금제를 깰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고 시대 금제는 실제로 볼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요.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부 형께서 채취하신 영초는 법기로 만들어낸 환영일 겁니다. 이번에 크게 당하셨습니다.”
“환영이라니, 그럴 리가 있습니까. 분명히……. 엇!”
부 노인이 그 말에 흠칫 놀라 주섬주섬 저물대 속의 옥함을 꺼내보았다. 그런데 안에 있어야할 영초는 온데 간 데 없고 평범한 옥여의가 들어있었다.
노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실 저희 셋은 돌계단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환술에 걸려 있었습니다. 부 형이 영초를 건드려 더욱 위력적인 환상이 나타났을 뿐이지요. 주변을 둘러보시지요.”
한립이 암석 주변을 가리켰다.
부 노인과 백요이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보라색의 과실들과 영초들이 보였다.
“상고 수사들의 수법이 정말 음흉합니다. 함정을 겹겹이 쳐놓고 걸려들기만 기다리는 꼴이 아닙니까!”
노인이 곧바로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낙담했다. 백요이도 입을 벌리고 놀라고 있었다.
“그리 놀라실 것 없습니다. 대단한 금제이기는 하지만 금제를 펼친 수사가 직접 발동해야 최대의 위력을 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저도 임시로 환영을 빠져 나온 것뿐 금제 전체를 없앤 것은 아니니 주의해야합니다.”
“다들 곤오산을 영산이라며 추앙하는데, 이건 뭐 호랑이 굴이 따로 없습니다.”
노인은 고생만 하고 영초도 사라지자 분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하시지요. 이곳은 일반 상고 수사의 유적이 아니니 무슨 기괴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우연히 해결책을 찾아 빠져 나왔지만 다음번에도 그럴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두 분 모두 제 말뜻을 이해하셨지요?”
“물론 이해하고말고요. 앞으로는 저도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부 노인이 민망한 지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사실 이번에 무턱대고 영초를 채취한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큰 실수였다. 백요이도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해하셨다니 그럼 가십시다. 위쪽에서 들려오던 소리도 멎었고 이미 며칠이 흘렀으니 다른 수사들이 정상에 도달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한립이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며 먼저 걸음을 옮기자 다른 두 수사도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몇 시진 후에 그들은 향지례가 감쪽같이 사라진 돌로 만든 정자에 도착했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정자를 향해 걸어가자 노인과 백요이도 서둘러 그곳을 살폈다. 그런데 땅바닥에 희미하게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는 흔적이었다.
“역시 다른 수사들도 이곳을 지나갔군요.”
“그 뿐만 아니라 저쪽을 보시지요!”
백요이의 말에 노인이 정자 옆의 암석에 눈짓했다.
암석에는 아주 가늘고 얕은 상처들이 나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며칠 전 엽 가의 일곱째 숙부가 노란 검기를 날려 생긴 흔적이었다.
“얼마 전에 생긴 듯한데 이곳에서 수사들이 전투를 벌였군요. 설마 은시야차 일까요?”
백요이가 눈을 빛냈다.
“그럴 지도 모르지요. 보아하니 이곳에 머물던 수사들도 계단을 따라 올라간 것 같은데 아주 잘 되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 길을 열어 주고 있을 테니까요.”
한립은 아주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부 노인도 그 말을 듣고 무어라 하려는데 돌연 주변의 허공에서 하얀빛이 번뜩이며 하얀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그림자가 빠져 나온 허공이 세 수사의 정면에 있어 한립과 백요이는 즉시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출구가 이렇게 가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곁의 부 노인은 하얀 그림자를 알아보고는 바로 안색이 달라졌다.
“오자동심마! 건 노마의 화신인 마귀들 중 하나입니다.”
한립이 그 말에 일순 멍해졌다. 오자동심마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는데 건 노마가 누구지 일순간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백요이는 바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팟! 팟! 파팟!
허공의 하얀 빛의 장막에서 똑같은 하얀 그림자들이 연달아 네 개나 더 나타났다. 보일 듯 말 듯 한 희미한 그림자 다섯 개가 일렬로 서더니 열 개의 눈동자가 전부 한립을 쳐다보았다.
‘음라종 대장로!’
다섯 개의 하얀 그림자를 보고서야 한립도 드디어 오자동심마의 주인을 떠올리고는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연찮게 부 수사를 여기서 다 만나 뵙습니다. 제가 사방으로 찾아 다녀도 보이지 않으시더니 이곳에 먼저 들어와 계셨군요. 선자께서는 복색으로 보아 북야소극궁의 수사 같으신데, 귀 궁의 류 부인과는 제가 오래 전부터 안면이 있지요. ……그런데 이쪽은 혹시 천남 출신의 한립 수사 아니십니까? 한 형을 찾아다니느라 정말 본 종과 천란 성전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건 노마의 분신들이 한립에게 눈을 떼지 않았고 허공에서 광소가 이어졌다.
건 노마의 말에 부 노인과 백요이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한립은 멀리서 떠 있는 다섯 개의 하얀 그림자만 주시할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음라종 장로를 죽였고 음라종의 보물인 귀라번을 지니고 있었으니 서로 좋게 해결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봉혼주를 풀 방법을 반드시 알아내야 했고 그건 오직 음라종 대장로만이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일을 마치고 어떻게든 음라종 종주를 찾아낼 생각이었는데 예기치 못하게 이런 곳에서 마주친 것이다. 상대가 음라종의 최고 권력자인 만큼 홀로 있는 그를 마주칠 기회는 두 번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는 원영 후기를 뛰어 넘는 은시야차와도 상대해 보았다. 비록 상대가 오랜 세월 지하에 갇혀 마땅한 법보를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한립도 전력을 다해 싸운 것은 아니었다.
인간형 괴뢰라는 최후의 수단도 남겨 놓았으니 정말 원영 후기의 마도 수사를 마주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오자동심마가 아무리 명성이 자자해도 그는 마공과 상극인 벽사신뢰를 지니고 있지 않던가!
한립이 이곳에서 음라종 대장로와 마주친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 다섯 그림자 중 하나가 수결을 맺으며 전신에 회색 기운을 뻔득였다. 그러자 돌연 회색 장포를 입은 수사가 하얀 그림자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