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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67화 (324/2,000)
  • # 567

    567화. 환묘천상(幻妙天象)

    “……불가능합니다. 누구라도 통천령보의 힘을 빌려 펼쳐 놓은 구진복마대진(九眞伏魔大陣)을 빠져 나올 수는 없지요! 게다가 이미 봉인 결계에 틈이 벌어졌으니 선배님께서 결계를 빠져 나오셨다면 벌써 곤오산을 벗어나셨을 겁니다. 기껏해야 의식 한 줄기를 이용해 저를 겁줘 쫓아 보내려는 것이겠지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던 향지례는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네가 어찌 구진복마대진과 통천령보의 존재를 알더냐! 설마 곤오삼자의 후손인 게야?”

    여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았지만 어투가 서늘해졌다.

    “저는 곤오삼자의 후손은 아닙니다. 우연히도 인계에서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일 따름이지요.”

    향지례는 대답을 하면서도 사방을 주시하며 경계했다.

    “흥! 그리 두리번거릴 것 없다. 본 비는 네 말대로 아직 결계에서 벗어나지 못 했으니까. 그래도 이곳에서 벗어날 기회를 네가 망치게 둘 수는 없지. 이곳에서 얌전히 몇 개월만 머물거라.”

    여인의 말소리가 사라지자 정자 위의 허공이 비틀거리며 하얀 소용돌이가 나타났고 그 안에서 오색의 기운이 나와 노인을 덮쳤다.

    “환묘천상(幻妙天象)!”

    향지례가 안색이 급변해 당장 빛줄기로 변해 달아나려했다. 하지만 오색찬란한 기운이 빙글 돌며 엄청난 힘으로 노인을 빨아들였다.

    빛이 가시자 향지례는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보아하니 한숨 더 자고 일어나야겠구나. 어리석은 것들. 더 많이 몰려와 보거라! 내가 다시 잠에서 깨어나면 이곳을 벗어나게 될 것이니. 곤오삼자, 본 비를 이곳에 봉인한 대가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게 해 주겠다.”

    여인의 목소리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레 후, 엽 가 수사들이 만수문을 부수고 나아가다 또 다른 환영진에 갇혔을 때 한립 역시 기이한 금제를 만나 어떻게 벗어날지 고심 중이었다.

    그리고 봉인 금제 위의 작은 호수는 날이 날수록 더욱 많은 수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호수를 중심으로 수십 리 내에 천 명이 넘는 수사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는 원영기 수사들도 열댓 명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나란히 호숫가에 떠있는 독성문 장로 네 명이었는데 나머지 원영기 수사들은 소식을 듣고 급히 오느라 전부 홀로 움직였다.

    독성문 장로들 앞에서 문하의 제자 하나가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대장로님, 지하 곳곳의 봉인을 조사해 본 결과 이곳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누군가 무언가를 감추려 환영진을 펼쳐 놓았습니다. 이에 진법에 정통한 제자들을 시켜 해결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다만 수준 높은 환영진이라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합니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른 제자가 공손하게 말했다.

    “실마리를 찾았다니 다행이구나! 다른 수사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주의하고 환영진을 깨는 대로 보고하거라.”

    주름이 가득한 중년 수사가 분부했다.

    “예!”

    제자가 몸을 굽혀 인사하고는 품에서 토둔술 부적을 꺼내 땅 속으로 사라졌다. 또 다른 독성문 장로가 입을 열었다.

    “화 사형, 너무 걱정하시는 것 아닙니까. 남강에는 어차피 원영 후기 수사도 없고 다른 종문의 원영기 수사가 도착하더라도 우리 넷의 협공을 이겨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시간이 지체 될수록 고계 수사들이 몰려들 것 아니더냐. 남강에 우리 독성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봉인 결계로 진입하기 전에 다른 원영기 수사들이 몰려온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게다가 시일이 더 지나면 정마십종의 수사들도 끼어 들 것이야.”

    화 씨 중년인이 신중히 답하자 다른 독성문 장로들도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때 화 수사가 고개를 들고 어딘가를 주시했다.

    이에 다른 이들도 흠칫 놀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회색 안개가 출현해 이곳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네 명의 원영기 수사들은 그 안에서 풍겨 나오는 엄청난 영기의 압력에 안색이 달라졌다.

    푹!

    안개는 순식간에 호수 위에 도착해 스스로 폭발해 사라졌다. 그 대신 다섯 개의 희미한 하얀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전부 형상이 모호해서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오자동심마(五子同心魔)!”

    화 씨 수사가 얼굴을 굳혔다.

    “오자동심마라면, 음라종 건 노마의 화신(化身)들이 아닙니까!”

    또 다른 독성문 장로가 그 소리를 듣고 안색이 파리해졌다.

    “건 노마가 아니면 세상 천지에 이런 마공을 익힐 자가 또 있더냐?  건 노마는 다섯 개의 화신 중 어느 것에라도 깃들 수 있는데 다섯 마귀를 동시에 멸살하지 않는 한 거의 불사의 존재나 다름없지.”

    화 씨 성의 중년인은 냉랭히 콧방귀를 뀌며 말했으나 상대를 꺼리는 기색이 다분했다.

    “제 화신들에 대해 잘 알고 계셔서 누군가 했더니 독성문 화 수사셨군요. 이곳에 귀 문 장로들과 모여 있는 것을 보니 봉인에 대해서도 아실 듯합니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저 독성문이 가까워 무슨 일인지 살피러 온 것이지요. 음라종 대장로이신 건 형이야 말로 여기까지 웬일입니까?”

    화 수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 그런가요?  기억대로 라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종문은 화선종(化仙宗) 일 텐데 독성문 장로들께서 빨리도 오셨습니다. 저는 남강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우연히 들르게 된 것입니다.”

    “건 형의 신분에 이곳까지 오시다니 남강에 친히 나설만한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뭐 급한 일은 아니고, 이곳으로 달아난 본 문의 배신자가 있어 조용히 처리할 생각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그렇군요. 거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화 수사와 건 노마는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지만 서로의 말은 한 마디도 믿지 않았다. 쌍방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찾아냈습니다. 봉인의 북쪽에 균열이 있는데 독성문 수사들이 그곳으로 금제를 뚫고 들어가려 합니다.”

    호수 어딘가에서 누군가 솟아오르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인근의 수사들이 전부 놀라 웅성거렸다.

    소리를 친 수사를 남색 장포를 입고 붉은 두건을 두른 독성문 제자 몇이 추적하려 했으나 특수한 둔술을 익힌 탓인지 순식간에 하늘 저 너머로 달아나 버렸다.

    화 수사 등 독성문 장로들의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허허……. 저도 진법이라면 일가견이 있는데 귀 문 제자들을 도와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럼 먼저 갑니다.”

    건 노마가 그 소리를 듣고 웃더니 호수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어서 가자! 건 노마의 성정으로 보아 본 문 제자들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화 수사는 노한 기색으로 한 손을 뒤집어 미리 준비한 노란 깃발을 들었다. 그가 깃발을 흔들자 노란 기운이 독성문 장로들을 휘감아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건 노마와 독성문 장로들 외에도 나머지 수사들도 분분히 지하로 잠입해 인근의 수사들 중 절반가량이 사라졌다.

    호수 북쪽으로 이십 리 쯤 떨어진 지하에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그 아래로 하얀빛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는데 엄청난 두께에 그 위로 엄청난 기세의 뇌전이 흘러 누군가 다가가기만 해도 뇌전이 튀어 올라 공격했다.

    운이 좋으면 피할 수도 있지만 둔술이 부족한 이들은 그대로 뇌전에 맞아 보호막이 요동을 쳤다.

    그런 빛의 장막에 뇌전이 흐르지 않은 곳이 있었는데 푸른 장포에 붉은 두건을 두른 독성문 제자 여럿이 다른 수사들과 대치 중이었다.

    독성문은 남강에서 꽤 큰 세력이었고 이곳에 모여 있는 수사들 대부분이 현지 수사들이라 쉽게 그들과 척을 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붉은 빛줄기가 나타나 서늘하게 일갈했다.

    “노부가 들어가야겠으니 모두 비키거라!”

    “선배님, 이곳은 본 문이 먼저 발견하였습니다. 저희 사숙님들이 인근에 계시니 장로님들께 연락을…….”

    “독성문의 화천기 본인이 막아선다고 해도 노부는 들어가고야 말 것이다.”

    붉은 빛줄기 속의 인영이 냉소하며 한 손을 뻗었고 눈을 찌를 듯한 빛이 그의 손바닥에 응결되었다.

    “그렇습니까?  저희 제자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정 형께서 친히 훈계를 하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오며 다양한 빛의 빛줄기들이 독성문 제자들 앞을 막아섰다. 말을 한 이는 붉은 빛줄기 속의 화 수사였고 다른 독성문 장로들과 함께였다.

    “이런, 정말 화 형께서 와계신 줄도 모르고 제가 실례를 하였습니다. 방금 한 말은 농담이었으니 너무 개의치 말아주십시오.”

    이곳에 모인 다른 수사들의 예상을 깨고 붉은 빛줄기 속의 노인이 허허 웃으며 꼬리를 내렸다. 방금 전까지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던 자와 같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명성이 자자한 사산 진인, 정위 수사가 아니십니까! 실제로 뵈니 명불허전입니다 그려.”

    누군가 그 모습에 웃어 댔고 붉은 빛의 노인과 독성문 장로들 사이에 하얀 그림자 다섯 개가 나타났다.

    “오자동심마! 음라종의 건 형께서도 계셨군요!”

    붉은 빛 속의 수사는 크게 놀란 것 같았다. 건 노마가 예의상 한 말이 아니라 사산 진인이라는 자는 대진 수도계에서 정말 명성이 자자한 자였다.

    물론 신통이 대단해서 이름을 날린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비열한 성품을 지닌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계 수사들 사이에서는 사산 진인을 만나는 것을 거의 재난으로 여겼고 고계 수사들도 앞에서는 굽신거리다가 기회가 생기면 뒤통수를 때리는 인물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니 많은 수사들과 심지어 몇몇 원영기 수사들조차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는 원영 초기의 산수로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고 일찍이 사방비천화(四方飛天靴)라는 상고 시대의 기이한 보물을 얻어 둔술을 펼치면 원영 후기 수사와도 맞먹었다.

    사산 진인은 음라종 대장로가 나타나자 바로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수사들 틈으로 물러났다. 마치 고양이 앞의 생쥐 같은 모습이었다.

    상대가 물러서는 것을 보고 건 노마도 더는 그를 상대할 생각이 없는지 화천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 형, 제가 들어가는 것도 막으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말씀을요! 독성문이 어찌 감히 건 수사의 행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곳에 환영진이 펼쳐져 있어 금제를 해결하고 모두에게 알릴 생각이었습니다. 무턱대고 금제 속으로 들어가 화를 당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오, 귀 문의 호의를 못 알아차리고 다들 실례할 뻔했습니다. 허나 겨우 환영진에 제가 당할까요. 먼저 들어가서 살펴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속이 뻔히 보이는 변명에 건 노마가 냉소하며 물었다.

    “그러시지요. 건 형이 들어가시겠다면 절대 막지 않겠습니다.”

    화천기는 이미 포기했는지 주저 없이 답하고 손을 저었다. 다른 세 명의 독성문 장로들은 불만스런 기색이 가득했지만 대장로의 결정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건 노마가 광소하더니 다섯 개의 하얀 그림자가 빛의 장막으로 쏘아져 나갔고 별안간 표면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사라졌다.

    “다른 수사들도 들어가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화천기는 빛의 장막이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을 지켜보다가 주름진 얼굴로 주위 수사들을 둘러보았다.

    그 말이 끝나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수사들이 오히려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사산 진인 역시 다른 수사들 사이에 섞여 침묵했다.

    독성문 수사들이 막아설 때만 해도 그들이 입구를 독점하려는 줄 알고 당장이라도 봉인 결계 속으로 뛰어 들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선선히 물러서고 원영 후기 수사가 먼저 들어간 것을 보자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일단 결계의 틈에 펼쳐져 있다는 환영진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고 미리 들어간 음라종 대장로가 거슬린다고 공격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런 모습에 화천기가 조소하더니 그들을 내버려 두고 문하의 제자들에게 분부했다.

    “더 이상 지키고 있을 것 없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그만 올라가거라.”

    “예, 대장로님!”

    일곱 명의 독성문 제자들이 허리를 굽히고는 그대로 땅위로 솟구쳐 사라졌다. 이어 화천기를 비롯한 네 명의 독성문 장로들이 환영진 속으로 뛰어 들어 사라졌다.

    그러나 남은 수사들은 대부분 홀로 오거나 기껏해야 두 세 명이 한 무리를 이뤘는데 이런 상황에 그런 전력으로 화연진으로 뛰어들기가 꺼려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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