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6
566화. 수정 비석
“한 형,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영기가 넘쳐나는데 영초는 물론이고 영수 한 그루도 없다니요. 평범한 초목이 전부라니 너무 기이합니다.”
백요이가 머뭇거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의 영기가 농밀하기는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대단해지더군요. 그 점은 다른 영산과 같습니다. 아마 이곳에서 지내던 수사들은 산 위쪽에 영초를 심어 두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여겼을 지도요.”
“여기보다 영기가 더 충만하다고요?”
“한 형, 이곳도 영기가 충만해 수련하기 좋을 듯한데 급히 벗어날 필요가 있을까요?”
부 노인이 슬쩍 이곳에 남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부 형께서는 이곳이 정말 평범한 영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수련하기 좋은 곳이라면 수사들이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 없지요. 게다가 산 전체를 둘러싼 금제로 보건데 이곳의 정체가 수상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말에 노인의 표정이 수차례 변하더니 결국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순간 욕심이 생겨 엉뚱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려.”
“부 형뿐 아니라 저도 그랬는걸요. 이런 곳에서 수련을 한다면 법력을 더 빨리 늘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한립이 웃으며 무어라 말하려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둔술을 멈추었다. 그리고 남색 빛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허공의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인과 백요이가 이상하다는 듯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펴보시죠. 뭔가 유용한 것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눈을 빛낸 한립이 방향을 틀어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노인과 백요이는 의아했으나 상대가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주저 없이 따라갔다.
안개 속으로 들어간 그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거대한 규모의 하얀 돌계단이 산 아래와 위를 이으며 끝없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려선 곳에는 하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한립은 열댓 장은 되어 보이는 비석 앞에 뒷짐을 지고 서서 살펴보고 있었다.
“뭐가 있습니까?”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겠군요. 직접 오셔서 확인해 보시지요.”
노인이 호기심을 보이자 한립이 나지막이 일렀다.
“오, 그렇습니까?”
노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성큼성큼 다가왔고 백요이도 그 뒤를 따랐다. 두 수사도 비석을 확인하고 단번에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비석에는 단 두 글자만이 웅장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곤오! 설마 이곳이 전설 속의 그 곤오산이란 말인가!”
노인이 고대 문자를 읽으며 놀라 소리쳤다. 백요이도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가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곤오산이었군요. 상고 시대에 수도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수련했다던 곳이지요. 거대한 산과 농염한 영기로 보아 곤오산이 맞을 겁니다. 그러나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상고 수사들이 영계로 가지고 올라갔다는 설과 수사들 간의 투쟁 속에 황천으로 가라앉았다는 설이 있었는데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일까요?”
백요이는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은 이곳에 봉인이 되어있었다니! 수많은 상고 수사들이 머물렀던 곳인 만큼 아무 곳이나 들어가도 수많은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부 노인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그럴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봉인 결계를 친 것으로 보아 충분한 준비를 마치고 이곳을 떠났을 겁니다. 거처를 뒤진다고 귀한 물건이 쏟아져 나올지 모르겠군요. 다만 이 비석은 투박하지만 이곳에서 수만 년 넘게 영기를 받아 그런지 이보가 되었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비석으로 다가가 매만졌다.
“이 비석이 보물이란 말씀입니까?”
노인과 백요이가 의외라는 듯 비석을 살폈다. 청석으로 만든 아주 평범한 비석은 영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졸렬한 저계 법기와도 비슷했다.
그들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한립을 보았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맞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져가겠습니다.”
한립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리고 차분히 말했지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다른 두 수사처럼 비석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영수대 속에 있던 토갑룡이 비석을 보고 반응하지 않았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비석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푸른 기운을 뿜어냈다. 그러자 비석이 크게 들썩이며 푸른 기운 속에서 줄어들었고 본래 크기의 절반 정도로 작아지자 손을 뻗어 끌어당겼다.
그런데 비석을 들어 올린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평범해 보이던 비석이 몸을 떨더니 하얀빛을 뿜어낸 것이다. 그 순간 한립은 푸른 기운을 통제할 수 없었다.
쿵!
굉음이 들리며 비석이 원래 자리로 떨어져 내렸는데 천만만근은 되는 듯 엄청났다. 비석은 땅으로 떨어지면서 갈라지고 말았다.
‘이건? ’
한립이 기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헛! 비석의 표면이…….”
한립이 제대로 보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부 노인이 비석 뒷면을 바라보며 놀라 소리쳤다. 이에 한립은 눈썹을 끌어 올렸다. 기억대로라면 비석의 뒷면에는 아무 것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노인이 아무 이유 없이 저럴 리 없었기에 그는 신형을 번뜩이며 비석 뒷면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갈라진 틈으로 수정처럼 반짝이는 푸른빛이 보였다. 한립은 눈을 빛냈지만 비석 속에서 반짝이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영석? ’
그가 돌연 열손가락을 튕겨 열댓 개의 푸른 검기를 방출했고 검기들이 종횡무진하며 비석의 태반을 깎아 버렸다. 비석조각이 흩날리며 순식간에 주변이 뿌옇게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순식간에 남색 물체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이 손을 멈추자 푸른 검기들이 사라졌고 비석 내부에 박혀 있던 짙은 푸른색 수정돌이 나타났다.
아직 전체가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맑고 푸른 수정돌은 네모난 모양 같았다.
“영석도 아닌 것이 물 속성의 영석과 굉장히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물 속성의 영기를 함유한 것도 아닌데요.”
“확실히 영석은 아니군요. 누구도 영석 표면에 무언가를 새기지는 않으니까요.”
백요이의 말에 한립이 수정돌의 일부에 나타난 울퉁불퉁한 문자를 확인하고는 탄식했다.
그는 곧 전신의 법력을 집중해 푸른빛의 손을 불러 수정을 쥐고는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여전히 굉장한 무게였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한립은 엄청난 힘으로 수정을 뽑아냈다.
푸른 수정 비석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표면의 문자들이 그윽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즉시 수결을 맺어 그것을 가리켰다.
이에 수정 비석은 몸을 떨며 작아지더니 쉭 하고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노인과 백요이는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한립이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자 더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후 그들은 계단을 따라 위쪽으로 오르기로 결정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굉음이 산 위쪽에서 들려오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몰랐지만 그 굉음은 엽 가 수사들이 계단의 상층부 어디쯤에서 금제를 깨부수는 소리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고 게다가 그 사이에 금제를 하나 더 지나야 도달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전송되어온 동굴은 엽 가 수사들이 봉인 결계의 틈을 내 들어온 곳보다 훨씬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엽 가 수사들 옆에는 괴인과 대장로가 엽 가 수사들이 진법의 힘을 빌려 거대한 문을 공격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마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 중에 섞여 새까만 비검을 움직여 문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문은 엄청난 빛을 내며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얼마나 더 있어야 만수문을 부술 수 있겠느냐?”
괴인이 각종 영기의 빛이 터져 나오는 문을 내려다보다가 유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밤을 새우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수문이 생각보다 지나기 어렵군요. 이전의 엄청난 명성이 이해가 됩니다.”
“이미 이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우리가 나선다면 시간을 줄일 수 있을 텐데.”
“이곳에 사금수와 같은 상고 흉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만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하루 이틀 지체된다 해도 숙부님과 저는 법력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만 참으시지요. 이곳에 들어온 지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여유는 있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다른 종문의 원영기 수사들이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이곳에 도착해 봉인의 균열까지 찾아내려면 시간이 꽤 필요할 게다. 허나 겨우 만수문에서 이리 고생을 하는데 이후에 다른 난관이 이어질까 걱정이구나.”
“숙부님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이번 일을 계획한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연히 금제를 깰 방법을 모색해 두었지요. 금제를 깨는데 쓰이는 보물들을 몇 개 지니고 있으나 아직 쓸 때가 아니라 꺼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유생이 미소 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다면야 노부도 마음 놓으마.”
대두 괴인이 그 말에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이후 그들은 고요히 상황을 지켜 볼 뿐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괴인이 코를 찡긋하더니 어두워진 얼굴로 허공을 향해 손을 튕겼다.
이에 노란 검기 몇 개가 쏘아져 나가 수십 장 밖의 거대한 나무를 향해 쇄도했다. 검기가 닿자마자 나무 아래에서 가볍게 바람이 일더니 온 몸이 녹색 털로 뒤덮이고 날개가 달린 괴물이 나타났다.
펑!
괴물은 손도 꿈쩍하지 않고 가볍게 날개를 펄럭여 검기들을 튕겨냈다.
이후 원숭이처럼 뾰족한 귀에 마른 뺨을 지닌 괴물이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엽 가 수사들을 보다 다시 유생과 대두 괴인을 보고는 즉시 날개를 펄럭여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느냐? 저렇게 고명한 풍둔술이라니……. 바람 속으로 신형을 감추었어. 그렇다면 저 괴물은 전설 속의 은시야차가 아니더냐! 희미하게 시기를 노출하지 않았다면 숨어 있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시기요? 저는 전혀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숙부님께서 혈차진결(血車眞決)을 익히셔서 이리 민감하게 감지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저 은시야차의 지능이 상당히 높은 것 같습니다.”
유생은 은시야차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난색을 표했다.
“곤오산은 영산으로 이름 높은 곳인데 어찌 사금수와 비천시 같은 흉물들이 넘쳐나는 것인지! 만일 우리 둘 중 한 사람만 이곳에 왔더라면 어찌 할 뻔 했느냐.”
“이전에나 영산이지 곤오산이 봉인당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기이한 점이 많지만 일단은 통천령보를 손에 넣는 일이 시급하니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네 말이 맞다. 아무리 수행이 대단한 요물이라도 지능이 떨어지는 야수에 불과하면 걱정할 것이 없겠지. 하지만 저 은시야차처럼 지능이 높으면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한 순간의 방심이 거사를 망칠 수도 있는 게야.”
“알겠습니다, 숙부님!”
대두 괴인의 당부에 유생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엽 가 수사들이 은시야차를 쫓아 버렸을 무렵 그들이 쉬었던 정자 주변에 빛이 번뜩였다. 백발의 머리가 불쑥 나타나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정탐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로 은빛 찬란한 몸 전체를 담장에서 빼내며 빠져 나왔다. 그가 거대한 원반을 밟고 정자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는 바로 한립도 정체를 알 수 없었던 향지례였다.
“이곳이 그 곤오산이로구나. 쯧쯧, 영기가 남다르긴 한데 어떤 놈이 이곳의 봉인을 뚫었단 말인가! 그것이 빠져 나오면 대진 전체가 끝장날 수도 있거늘, 재수가 옴 붙었지. 하필 이 근처를 나다니고 있어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향지례는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 소리를 들으며 짜증 가득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재수가 옴 붙은 것을 알면서도 이곳에 나타나다니, 너도 담이 꽤 크구나?”
“……!”
향지례가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는데 귓가에 여인의 달콤한 목소리가 울렸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무척 달콤했다.
그러나 향지례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신에 소름이 돌았고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서, 선배님! 빠져…… 빠져나오신 겁니까?”
“이미 수만 년 전에 빠져나왔다. 곤오삼노(昆吾三老)들이 만 명이 넘는 수사들의 힘을 모아 펼쳐 놓은 마지막 금제가 아니었다면 본 비(妃)는 벌써 예전에 이곳을 빠져 나갔겠지!”
여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향지례의 얼굴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