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4
564화. 보랏빛 안개
바닥에 앉아 있던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추적용 원반을 꺼냈다. 그러자 원반의 빛이 번뜩이더니 하얀색과 검은색 점이 나타났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살폈다.
잠시 후 그가 눈썹을 끌어 올리더니 손바닥을 뒤집어 원반을 감추었다. 그러자 곧 동굴 입구에서 빛이 반짝이며 부 노인과 백요이가 들어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이곳이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을 듯 말 듯 물었다. 그가 아무리 대진수사가 아니라 해도 이렇게 거대한 산을 모를 리 없었다.
“민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산은 저도 평생 처음 봅니다. 우리가 아직 대진에 있는 지도 잘 모르겠군요.”
“맞아요. 이런 엄청난 크기의 산이 대진에 있었다면 제가 모를 리 없어요.”
백요이도 눈썹을 찌푸리며 부 노인의 말에 동의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전송진은 분명 상고 수사가 설치해 둔 것이 분명합니다. 전투 중에 금제를 건드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할 일입니다. 우선 배영단을 제련한 후에 이곳을 살펴보시지요.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영기가 충만한 곳이니 조금 더 머문다고 큰일이야 나겠습니까? 게다가 산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한 형이 계시니 걱정할 필요 없지요. 그리고 혹시 수련에 도움이 될 만한 기연이라도 만날지도 모르고요.”
부 노인이 잠시 침묵하다가 얼굴을 펴고 답했다. 백요이도 배영단을 간절히 원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 형, 과찬이십니다. 두 분도 아시겠지만 금제의 영향으로 의식을 멀리 퍼트릴 수 없습니다. 몇 리 정도 살피는 것이 한계지요. 거대한 산이니 저희 셋이 힘을 합쳐야 그나마 제대로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네, 저도 방금 이곳을 둘러보며 느꼈습니다. 어찌 거대한 산이 생기(生氣)라고는 하나도 없는지 정말 괴이하더군요.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닐 듯합니다.”
“그래도 영기가 충만해 영단을 제련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배영단을 제련해 내고 생각하십시다.”
부 노인이의 말에 이번엔 한립과 백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동굴 속에 영기를 모으는 진법과 몇 개의 방어 금제를 설치했고 부 노인은 곧바로 배영단 제련에 들어갔다. 그동안 한립과 백요이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줄곧 호법을 서며 부 노인을 지켰다.
그들이 배영단을 기다리는 동안 거대한 산의 중턱, 돌로 만들어진 정자 위에 엽 가 수사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이 정자 주변에서 가부좌를 하고 법력을 회복하고 있었고, 엽 가 대장로인 백의 장포의 유생만이 무표정하게 정자 위에 떠서 산을 따라 만들어진 돌계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계단은 티끌하나 없는 하얀 암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끝을 알 수 없이 길어 멀리서 보기에도 굉장한 규모라 너비만 해도 족히 대여섯 장은 되어 보였다.
또 그 끝은 하얀 구름 속에 파묻혀 있어 얼마나 더 이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 끝에서 빛이 반짝이며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노란 빛줄기는 순식간에 유생 앞까지 도착했고, 빛이 가시자 기괴한 얼굴의 대두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엽 가의 일곱째 숙부였다.
“셋째야, 살펴보니 계단을 따라 수십 리를 올라가니 문이 하나 있더구나. 그 문이 명성이 자자한 만수문(万修門)이 아닐까 싶다. 헌데 문이 봉인되어 있어 금제를 깨기 전에는 나아갈 수 없을 것이야.”
“만수문! 그럼 맞습니다. 당시 곤오산에 기거하던 수사들이 만 명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그 문만 넘으면 그들이 남겨둔 거처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금제가 보통이 아니니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괴인이 정자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수사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법력을 크게 소모해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이곳도 그리 안전하지 않으니 이들을 놔두고 저희만 움직일 수도 없고요.”
“그렇기는 하지. 봉인 금제의 틈을 통과하는 것조차 이리 어려울 줄 누가 알았더냐. 이번 원정에 원영기 수사들만 대동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나머지는 거의 죽었을 거야.”
괴인도 봉인 금제를 통과하던 것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유생이 그저 미소 지으며 별 말을 하지 않다가 돌연 안색이 변해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
“소리?”
유생의 진지한 표정에 노인도 법력을 움직였고 귓가에 희미하게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 같기도 했고 용울음 소리 같기도 한 것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뭔가 다가온다.”
눈빛이 서늘해진 괴인이 손바닥을 뒤집어 은빛 찬란한 무언가를 꺼냈다. 유생은 먼 곳을 바라보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멀리서 보라색 구름이 나타나더니 그 안에서 요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정자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유생과 괴인이 이미 구름 속에 있는 검은 무언가를 발견했는데 주먹만 한 새빨간 두 눈이 피에 굶주려 있는 짐승 같았다.
상대가 적의를 품은 요수임을 안 괴인이 얼굴을 굳히며 한 손을 뻗었다. 은색 빛이 그의 손을 벗어나 종적을 감추었다.
챙!
보라색 안개 속에서 번개처럼 발톱이 날아들어 은색 빛을 막았다. 거대한 발톱이 꽉 쥐자 은색 빛의 원형이 들어났는데 작고 정교하게 생긴 베틀 북이었다.
그러나 곧 거대한 발톱에서 진한 녹색 피가 흘러내렸고 보라색 구름 속에서는 괴물의 고통스러운 포효가 들려왔다. 보라색 구름은 순식간에 옅어지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괴인과 유생은 그것을 보고 동시에 안색이 달라졌다. 상대는 은닉술과 둔술에 정통한 괴물이었다. 금제의 영향으로 의식에 제한을 받는 그들로서는 가장 꺼려지는 요수였다.
시선을 마주친 두 수사가 거의 동시에 술법을 펼쳤다.
괴인은 입을 벌려 노란 비검을 분출해 거대한 검을 만들어 냈고 허공에서 춤을 추며 무수히 많은 검기를 방출해 방원 수십 장을 뒤덮었다.
그리고 유생은 소매를 털어 녹색의 깃발을 손에 쥐었다. 그가 깃발을 던지자 녹색 기운이 용솟음치며 거대한 구름으로 변해 정자 주변의 수사들을 보호했다.
정자와 서른 장 떨어진 곳에서 검기가 번뜩이더니 보라색 구름이 다시 나타났다.
구름 속 괴물은 완전히 매우 격노한 상태였다. 괴성을 지르며 나타난 요수는 안개를 헤치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요수는 사자 머리에 매의 몸을 했고 날개가 네 개나 달려 있었다.
날개를 펼치자 길이가 대여섯 장은 되었고 전신은 보라색 빛으로 번들거려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사금수(獅禽獸)!”
대두 괴인이 놀라 소리를 높이자 유생도 안색이 변해 소매를 털어 검붉은 비도를 날렸다. 그런데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던 요수가 비도를 보자마자 두려워하며 새빨간 입을 벌려 보라색 빛의 고리를 방출했다.
쿠콰콰쾅!
폭음이 이어지고 검은빛과 보랏빛 속에서 비도가 파죽지세로 열댓 개의 빛의 고기를 갈랐다. 그러나 고리를 가를 때마다 빛이 어두워지더니 요수를 몇 장 앞두고 거의 빛을 잃어 빛의 고리에 막히고 말았다.
이에 사금수가 크게 기뻐하며 다른 신통을 부려 비도를 끝장내려 했다.
멀리 있던 유생이 입을 벌려 정혈을 뱉어 내고는 양 손으로 수결을 맺어 핏덩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핏방울들이 신속히 핏빛 부적으로 변해 종적을 감추었다.
비도는 핏빛으로 흩날리더니 다시 남은 보라색 빛의 고리를 가르고 요수를 내리쳤다.
식겁한 요수가 날개를 펄럭여 뒤로 물러나며 황급히 거대한 발을 들어 발톱으로 비도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녹색 피만이 흩날렸고 비도를 쳐내려던 요수의 발톱은 절반이나 잘려나갔다.
크와앙!
“……!”
“읏!”
사금수는 고개를 쳐들고 경천동지할 괴성을 질러댔다. 이에 유생과 괴인도 귀가 멍해져 신형이 흔들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엄청난 괴성을 내지르던 사자 입에서 반투명한 금색 파동이 빠져나와 비도를 공격한 것이다.
쩡!
검은 비검은 파동에 닿자마자 거대한 힘에 밀려 튕겨나갔다. 그리고 일곱째 숙부가 퍼트려 놓은 노란 검기들은 요수가 방출한 금빛 파동에 닿자마자 산산이 부서지며 사라지고 말았다.
사금수가 악랄하게 유생을 노려보더니 날개를 펄럭였다.
꽈광!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고 신형이 모호해진 요수는 결국 서른 장 밖에서 나타났다. 놀랍게도 요수는 뇌둔술 마저 정통했다.
그러나 요수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는지 보라색 빛줄기로 변해 솟구쳤고 순식간에 하늘 저편으로 달아나버렸다.
괴인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창백해진 얼굴의 유생을 돌아보았다.
“괜찮은 것이냐? 흑혈도(黑血刀)를 부리려면 법력 소모가 극심한데 정혈을 이용해 위력을 끌어 올리다니.”
“원기를 약간 상했을 뿐 괜찮습니다. 사금수는 상고 시대의 유명한 괴수로 원영 후기 수사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지요! 서둘러 쫓아 내지 않았다면 상대하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쓴 맛을 보았으니 한동안은 저희를 귀찮게 하지 않겠지요.”
유생이 길게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구나. 상고 흉수는 일반적으로 온 몸이 강철 같아서 엽 가의 보물인 흑혈도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다른 법보로는 상처 입히기 어려웠을 거야.”
괴인은 유생이 괜찮아 보이자 크게 안심했다.
유생이 미소 지으며 아래쪽의 녹색 안개를 살피니, 그제야 사금수의 등장에 놀란 엽 가 수사들도 평정을 회복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괴인과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정자로 내려가 휴식을 취했다. 다른 장로들이 쉬는 동안 그도 흑혈도를 사용하며 소모한 법력을 회복할 생각이었다.
엽 가 수사들과 한립 일행이 거대한 산에 있을 때, 만독곡(万毒谷) 인근의 산 속에서 다섯 개의 하얀 그림자가 골짜기 입구에 나타났다. 그의 앞에서 두 명의 흑의인들이 누군가에게 공손히 무언가를 보고했다.
“그런 엄청난 일이?”
“예, 대장로님! 보운부(普云府)에 위치한 작은 호수 근처에서 일곱 줄기의 빛기둥이 솟아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그런 거지? 무언가 알아낸 것이 있더냐.”
“나흘 전의 일입니다. 본 문의 제자들이 소식을 듣자마자 전해오기를 빛기둥 아래에서 거대한 봉인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봉인의 규모가 워낙 거대해 틈이 생긴 구체적인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또한 이미 남강의 적잖은 종문들과 원영기급 수사들이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일곱 줄기의 빛기둥이라면 봉인 금제가 깨져 영력이 새어나오는 것 같은데……. 이렇게 엄청난 규모라면 내가 직접 가봐야겠구나. 그런데 며칠 전에 구유종 늙은이가 만독곡 주변에 나타났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뒤로는 아무 소식이 없는데 어찌된 것이냐. 그 늙은이도 찾지 못하면서 한 가 놈은 어찌 잡겠다는 건지!”
허공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용서해 주십시오! 분명 그곳에서 그 자를 발견했다고 했는데 그 뒤로는 감쪽같이 사라져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확실히 만독곡에 고계 수사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내가 음양굴을 제외하고 전부 뒤져 보았건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지. 설마 그 늙은이가 음양굴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 안에서 늙어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나오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흑의인들이 그 말을 듣고 입을 벙긋 거렸지만 차마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됐다. 너희에게 다시 기회를 줄 테니 제자들을 풀어 이곳을 감시 하거라. 나는 보운부에 다녀와야겠으니 오 장로와 소 장로에게도 연락해서 그곳에서 합류하도록 하거라.”
“예, 대장로님!”
흑의인들이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는 깊이 몸을 숙였다. 잠시 후 다섯 개의 하얀 그림자들이 흐릿해지더니 하늘 높이 날아올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