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0
560화. 사월환경(邪月幻鏡)
쿵!
진법 외곽에서 검은빛과 은빛이 동시에 나타나 충돌했다. 동시에 튕겨나간 빛이 가시자 한립과 은시야차가 나타났다.
그동안 도처의 돌기둥에 묶여 있던 간시들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빠져 나와 주위의 새까만 빛의 장막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제 퇴로가 막히고 전부다 검은 빛의 장막 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
미 부인도 진법의 변화를 느끼고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지만 스무 장을 가지 못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립은 검은 빛 속의 은시야차를 마주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상대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목에 다섯 개의 핏빛 고리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당신도 이곳을 빠져 나가지 못하는 것이로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 안에만 있었을 리 없었겠지. 영석 없이도 진법을 발동할 줄은 몰랐지만.”
한립이 냉랭히 소리쳤다. 진법의 빛이 점점 가라앉았지만 곳곳의 돌기둥에 감도는 검은 기운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이 곤마진(困魔陣)은 나를 가두기 위한 것이 맞다. 허나 오랜 세월이 흘러 일부를 내가 이용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은시야차가 날개를 펄럭이며 광소했다.
한립이 눈을 빛내는 순간 아래쪽의 제혼이 콧김을 흥! 불어내며 노란 기운을 분출했다. 엄청난 속도에 당장이라도 허공의 은시야차를 뒤덮을 것 같았다.
웃음소리가 뚝 끊기고 살점 덩어리 날개가 펄럭이더니 노란 기운이 닿기 직전 은시야차가 사라졌다.
순간 괴물이 대나무 위에 나타났지만 제혼의 노란 기운도 꿋꿋이 그 뒤를 쫓았다.
사납게 그것을 노려보던 은시야차가 날개를 펄럭이니 무수히 많은 은색 빛이 뿜어져 나와 제혼의 노란 기운과 정면충돌했다. 괴물의 공법도 만만치 않은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한립은 은시야차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처음 보는 광경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반대로 괴물은 노란 기운에 대한 공포심이 줄어들었는데 교활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검은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다시 나타났을 때는 제혼의 머리 위로 입에서 검은 빛의 무언가를 뿜어내려했다.
그때 괴물의 머리 위에서 돌연 웽웽 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금빛 영충들을 향해 검은 빛기둥을 뿜어냈다.
검은 빛기둥은 은시야차의 수만 년 된 시기를 제련한 것으로 음한한 기운이 강한데다 지독한 시독을 품고 있었다. 서금충들은 단단한 몸에 독이 통하지 않았음에도 검은 빛기둥과 충돌하고 삼분의 일이 떨어져 내렸다.
웽!
나머지 서금충들이 놀라 곧바로 흩어졌다가 다시 멀리서 결집했다.
영충이 시간을 끄는 틈에 제혼도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콧바람을 세게 불어 노란 기운을 날린 것이다. 은시야차는 다시 날개를 펄럭여 열댓 장 밖에서 나타났다.
노란 기운이 허공을 덮쳤고 은시야차가 있던 곳에 은빛이 번뜩이며 한립이 나타났다.
그는 소매를 펄럭여 대량의 금빛을 분출했다. 그리고 동시에 허공에 떠있던 보라색 거울이 반짝이며 보라색 빛기둥을 뿜어냈고 그의 소매 속에서는 소리 없이 붉은 침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제야 무표정하게 바닥을 내려다보자 떨어져 내렸던 서금충들이 다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확연히 약해진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살아 있었다.
한립은 한숨을 돌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미 부인이 기회를 보아 백옥으로 만들어진 두 나비를 향해 손짓했다.
옥나비가 빛을 내뿜으며 팽창했고 거의 웬만한 사람만 해진 나비들이 펄럭이자 하얀 돌풍이 생겨났다. 미 부인의 주술 읊는 소리에 돌풍이 하얀 교룡으로 변해 거세게 은시야차를 향해 쇄도했다.
수많은 공격에도 괴물은 큰 입을 벌려 웃고는 한 손으로는 사월환경을 다른 한 손으로는 주먹 크기의 빛덩이를 들어올렸다.
빛덩이는 회색의 음산한 빛을 뿜어냈다.
가장 먼저 날아드는 금빛 검들을 본 괴물은 즉시 빛덩이를 거울 속으로 던져 넣었다. 거울에서 어두운 빛이 번지며 똑같은 빛덩이들이 수없이 빠져나와 융합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장에 이르는 거대한 빛덩이가 나타나 은시야차를 감싼 것이다. 그 순간 검의 빛이 빛덩이를 갈랐다.
펑!
가벼운 울림이 들리고 거대 빛덩이가 거품처럼 터지며 작은 빛덩이들로 변했다.
검빛들이 은시야차의 몸을 난도질하며 수십 조각을 내고 빛덩이 속을 빠져나왔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불안해했다.
역시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작은 빛덩이들이 중간으로 뭉치며 은시야차가 완전무결한 모습으로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이다.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그때 뒤따르던 보라색 빛기둥과 미 부인의 두 마리 바람의 교룡이 들이닥쳤다.
거대 빛덩이는 터져 나갔지만 작은 빛덩이들이 다시 결집하면 은시야차는 멀쩡한 모습으로 되살아나 마치 불사신 같았다.
은시야차는 냉소할 뿐 별 다른 공격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손에 든 거울 속에서 계속 빛덩이가 빠져나와 거의 열댓 장 가까이의 거대한 빛덩이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립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정확히는 몰랐지만 빛덩이 속에서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리 없었다.
미 부인도 놀랐으나 수결을 맺어 바람의 교룡을 이용한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바람의 교룡이 빙글 돌아 다시 빛덩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교룡들이 입에서 대량의 바람의 칼날을 뿌려댔기에 작은 빛덩이들이 모이기도 전에 산산 조각을 냈다.
한립은 비검들로 공격을 돕기보다는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 모습을 관찰했다.
“당장 멈추세요!”
한립이 돌연 미 부인을 향해 일갈했다. 사실 그녀도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즉시 수결을 맺어 바람의 교룡을 회수했다.
빛덩이를 빠져나온 바람의 교룡은 들어가기 전보다 크기가 절반 이상 줄어 있었다.
다시 뭉친 거대 빛덩이는 이제 서른 장 가까이 커져 결계의 빛의 장막을 3분의 1이나 차지했다. 그 안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은시야차가 사월환경을 들고 나타났다.
한립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전에 난성해에서 육도의 후계자와 싸울 때가 생각 난 것이다.
온천인은 특수한 보물을 발동해 보라색 구름 속에 몸을 감추었는데 결국 음마참이라는 패도적인 수법을 이용해 간신히 상대의 팔을 잘랐었다.
아마 은시야차가 지금 사용하는 비술도 비슷해 보였는데 훨씬 상위의 비술일 것이다. 음마참은 한동안 바빠 제련할 시간이 없었으나 비슷한 방법으로 상대의 비술을 깰 수 있을지 몰랐다.
청죽봉운검으로 대경검진만 형성할 수 있었다면 은시야차를 가둬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며 저물대에서 새빨간 부적을 꺼내 들었다. 희미하게 붉은 화염 같은 주술이 넘실거리고 아주 작은 붉은 교룡이 그려진 강령부였다.
삼염선을 제련하며 팔급 적화교의 혼백을 제련해 만든 부적이었다. 이미 한번 제련해 보았기에 이번에는 훨씬 품질이 좋았다.
그가 주저 없이 부적을 몸에 붙이자 붉은 기운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교룡의 그림자가 등 뒤로 떠올랐다가 한립의 몸에 깃든 것이다.
곧 그의 눈이 붉게 물들고 머리에 뿔이 솟았으며 전신이 붉은 비늘로 뒤덮여 반인반여의 모습이 되었다. 법력은 단번에 원영 중기의 최고봉 수준으로 격상했다.
“한 수사?”
“헛.”
미 부인은 물론이고 은시야차도 한립의 변화에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강령부라는 것을 본 적이 없음이 분명했다.
은시야차는 한립의 수행이 늘어난 것을 감지하고 웃음기를 거두었다.
한립이 양 손으로 수결을 맺자 주위를 떠돌던 수십 개의 비검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검 하나가 여섯 개로 불어난 것이다.
거의 이백여 개에 달하는 금빛 검들이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강렬한 금빛이 형성되었고 열댓 장에 이르는 거검이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거검이 형성되자마자 한립은 가슴 앞의 설정주(雪晶珠)를 가리켰다.
쉭!
보라색 빛으로 변한 구슬이 거검을 향해 날아갔고 한립은 거검을 향해 법결을 날렸다.
쾅!
거검 표면에 굵은 금빛 뇌전이 무수히 튀어 올라 천둥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보라색 빛이 번뜩이고 구슬이 사라지자 요사스러운 보라색 화염이 검의 표면을 타고 흘렀다. 거검은 금빛 뇌전과 보라색 화염이 뒤덮여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은시야차가 그것을 보며 난색을 표했다.
상대의 거대한 빛덩이가 빛의 장막 절반을 차지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던 미 부인이 거검을 보고 기뻐했다.
“가라.”
한립이 냉랭히 외치자 거검이 엄청난 폭음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거검 본체가 닿기도 전에 몇 장을 뿜어져 나온 금빛에 이미 회색 빛덩이가 흔들렸다.
금빛이 번뜩이고 거검이 빛덩이를 갈라냈다. 빛이 사라지고 빛덩이 속의 은시야차가 다른 쪽에서 나타났다.
괴물은 한립의 이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 파악하고 날개를 펄럭여 피한 것이다. 수중의 사월환경이 빛덩이 분출을 멈추자 거대한 빛덩이도 원형을 회복하지 못했다.
괴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거검을 살피는데 돌연 뒤쪽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붉은 실 같은 것이 불숙 튀어나와 그의 가슴을 꿰뚫으려 한 것이다.
은시야차도 원영 후기에 필적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강력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재빨리 붉은 실의 기습을 감지한 괴물이 날개를 이용해 등을 막았다.
쿵!
예상 밖으로 붉은 실은 은색 날개와 만나 거대한 불덩이로 폭발했다. 그는 불덩이가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하자 순간 안심했는데 붉은 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흠칫 놀란 은시차야가 의식을 이용해 주변을 수색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앞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오며 거검이 날아들었다.
흑의 여인이 멀리서 법결을 날려 두 마리의 바람의 교룡을 북돋았고 은시야차의 머리 위로 날아든 바람의 교룡들이 무수히 많은 바람의 칼날들을 뿜어냈다.
이제 은시야차도 사월환경을 앞에 띄워 두고 두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동시에 허공에 살혼사로 만들어진 거대손이 나타나 주먹을 내뿜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거검의 위력은 막아내야 했다. 동시에 은색 날개도 몇 배로 커지며 그의 주위에 은색 보호막을 쳤다.
타타탕!
바람의 칼날들은 은색 보호막에 부딪쳐 가볍게 튕겨 나갔다.
그리고 거대 손들과 거검 쪽에서는 쾅! 쿵!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거검의 강력한 위력에 첫 번째 손이 잘려나갔지만 거검의 빛도 크게 약해졌다.
두 번째 손과 거검이 부딪치자 서로 튕겨나가며 고하를 가릴 수 없었다. 그 순간 사라졌던 붉은 실이 갑자기 나타나 은시야차의 앞가슴을 노렸다.
“헛!”
놀란 은시야차가 서둘러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푹.
붉은 실이 사월환경을 꿰뚫고 녹색털이 수북한 손에 잡힌 것이다.
쩡!
검은 거울이 갈라져 산산조각이 났다.
“감히 내 보물을!”
은시야차는 사월환경이 망가진 것을 보고 분기탱천했다. 아무래도 거울이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물건인 것 같았다.
한립은 순간 놀랐다. 상대의 환술이 보통이 아니라 거울을 깨트리는 것은 필수였지만 저렇게 분노하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가 즉시 수결을 맺자 금빛이 크게 줄어든 거검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거의 이백 개는 될 법한 검들이 그물처럼 쏟아져 내려갔다.
만일 상대가 날개로 막으려 한다면 경정이 섞인 비검들로 산산 조각을 내줄 참이었다. 설정주는 허공을 돌며 주먹 크기의 불새들을 내뿜었다.
그러나 은시야차는 분노한 와중에도 한립의 공격에 무턱대고 응수하지 않았다. 그가 은색 날개를 펄럭여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는 흉악한 눈빛으로 한립을 노려보았다.
은색 눈알이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괜히 원기를 낭비하지 않으려고 했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내 직접 네 놈을 잡아 혼백을 뽑아 씹어 먹어 주마!”
은시야차는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한립을 쏘아 보며 늑대와 함께 바닥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토둔술!”
한립은 인상을 쓰며 비검을 비롯한 나머지 보물들을 전부 돌아오게 했다. 바닥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와 은시야차의 고통스러운 절규가 들려왔다.
검은 의복의 미 부인이 불안한 얼굴로 한립과 땅을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회색 고치 쪽으로 날아갔다. 가는 도중에 가위 모양의 보물을 내던졌는데 광채가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