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6
556화. 오자동심마(五子同心魔)
노란 바람이 부채에서 쏟아져 나와 단숨에 땅의 먼지와 돌조각들은 날려버렸다. 이제 동굴 전체가 어두컴컴해져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한립과 백요이는 자유주의 힘과 보호막을 지니고 있어 그런 먼지바람에는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그들은 그제야 바닥의 진법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 뒤에서 어두운 빛이 번뜩이더니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소리 없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한립과 백요이는 고개도 돌아보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이에 검은 그림자는 붉은 빛을 번뜩이더니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백요이를 향해 무언가를 뿜어냈다.
한립과 백요이를 동시에 노린 것이다.
그 순간 한립이 돌연 손바닥을 뒤집었고 허공에 푸른빛의 손이 나타나 검은 그림자의 허리춤을 낚아챘다.
궁장 여인의 우아한 손짓에 우산이 번뜩였고 부지불식간에 그녀의 뒤로 우산이 옮겨갔다.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무언가와 우산이 닿자 하얀빛이 터지며 검은빛이 튕겨나가 벽에 박혔다.
그제야 백요이가 미소 띤 얼굴로 몸을 돌려 한립에게 잡힌 괴물을 확인했다. 괴물은 원숭이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었는데 팔까지 자라나 있어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새까만 비늘을 지닌 괴물은 서너 장 길이로 양 손에 뼈를 깎아 만든 짧은 창을 쥐고 있었다. 괴물은 빛의 손에 잡혀서 흉악하게 몸부림치며 둘을 노려보았다.
“얼원(孼猿)? 세상에 이런 귀물도 있었군요?”
“이런 귀물은 사람의 원한이 강력한 음기 속에서 응결되어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성정이 흉포해 산 채로 사람의 뇌를 뜯어먹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소리를 따라할 수 있다고 했는데 아까 들은 연시의 포효 소리는 얼원의 짓인 듯하군요. 저도 경전에서만 보았을 뿐 실제로 이런 귀물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감히 원영기 수사를 기습하려 하다니 죽을 자리를 스스로 찾아 왔군요.”
한립이 귀물을 자세히 살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런 악귀를 남겨 두어 뭐하겠습니까. 당장 없애는 것이 좋겠지요.”
백요이가 얼원의 흉악한 눈길에 소름이 돋는지 즉시 손을 뻗어 서늘한 기운을 쏘아 보냈다. 서늘한 빛이 얼원을 한 바퀴 돌아 얼음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한립이 푸른빛의 손에 힘을 주자 얼음덩이가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이제 동굴 안의 먼지바람도 잠잠해졌고 진법도 제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훑어보는 동안 백요이는 별 관심이 없는지 동굴의 다른 곳을 살폈다.
“연혼진의 일종입니다. 아주 오래된 종류인데 심지어…….”
“심지어 뭐요?”
“심지어 진법은 저 간시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아마 상고 시대부터 이미 이곳에 있었겠지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가요?”
“그간의 경험에 비춰 내린 추측일 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백요이는 한립이 별로 이유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뭐 진법과 간시가 아무리 이상해도 저희와는 상관없는 일이죠. 별 다른 게 없어 보이니 돌아갈까요?”
백요이는 손을 뻗어 비검을 회수해 저물대로 집어넣었다.
“그러시죠.”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배가 벌어진 간시를 쳐다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백요이는 한립이 걸음을 멈추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한립이 돌연 한 손을 뻗어 금빛 뇌전으로 돌기둥의 간시를 공격했다.
얼마나 오래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시체는 금빛에 산산조각이 나 재가 되어 흩날렸다.
“가시죠.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슬쩍 미간을 찌푸렸던 한립이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한립과 백요이가 무사히 동굴을 빠져 나왔을 때 동굴의 돌기둥 밑에서 사람 형태의 검은 그림자가 불쑥 솟아올랐다. 전신이 새까맣고 얼굴이 모호해서 정말 그림자 같았는데 두 눈 만이 번뜩이는 것이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산산조각이 된 얼원과 돌기둥의 재를 보고는 바닥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자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검은 그림자가 바닥을 뒹구는 동안 간시의 회색 재들이 날아든 것이다.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검은 그림자 안에서 이전과 똑같은 간시가 걸어 나왔다.
간시가 입을 벌리자 얼원의 잔해가 검은 기운에 휩싸이면서 그것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뱃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다가 다시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은 이전과 똑같은 모습의 얼원이었다.
얼원은 고개를 들고 땅을 기며 간시의 다리를 친근하게 감싸고 올라갔다.
* * *
한립의 일행들이 따로 탐사를 시작할 무렵, 남강(南疆)의 어느 산봉우리 위에서는 폭음과 함성이 이어졌다.
백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법보와 법기 등으로 노란 보호막을 공격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열댓 명의 노란 장포를 입은 수사들이 죽어라 진법 깃발을 흔들어 항전 중이었다.
그런데 노란 장포를 입은 수사들의 수가 적어 보호막이 당장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보호막 안에 있던 노란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떠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멀리 다섯 개의 회백색 그림자가 연기처럼 떠 있었던 것이다.
“종 형, 우리 하 씨 가문에 살길을 열어 줄 수는 없겠습니까? 귀 종의 종주와 제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이번만 봐주시면 일족을 이끌고 수도계를 떠나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남강입니다.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중년 수사는 막막했는지 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정했다.
“당신네 하 씨 가문이 음라종에 귀속하기로 해놓고 배신한 것은 생각지 않소? 우리 음라종을 무엇으로 보고 감히! 남강에 위치해 있다고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면 큰 오산이오. 스스로 목숨을 내놓겠소 아니면 내가 나서야겠소. 오자동심마(五子同心魔)가 나서면 뼈도 추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이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허공에서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 그 말에 중년인 수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쿠쿠쿵!
그런데 갑자기 아래쪽에서 큰 진동이 울려 퍼지며 장원과 열댓 명의 제자들을 지켜주던 보호막이 산산조각 나 사라지고 있었다.
일순 중년인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음라종 수사들은 환호하며 각종 영기의 빛을 번뜩이며 몰아쳤다.
“네 놈들이 감히!”
중년인이 참지 못하고 영수대 중 하나를 던지자 노란빛이 빠져나와 몇 장 길이의 노란 구렁이로 변했다.
“어찌 후배들과 손속을 겨루시려 그러시오? 안 그래도 수사의 혼천전(渾天塼)의 위력이 궁금했으니 나와 겨뤄 봅시다.”
허공의 하얀 그림자 중 하나가 움직이며 노란 구렁이가 아래로 뻗어 나가는 것을 막아섰다. 이에 노란 구렁이가 흉흉한 시선으로 입을 벌리자 하얀 그림자가 몸을 떨더니 거대한 해골로 변했다.
노란 구렁이는 그제야 공격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끼륵.
해골은 기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입속에서 새하얀 실을 무더기로 방출해 구렁이의 머리를 꽁꽁 싸맸다. 놀란 구렁이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강철 같은 꼬리로 해골을 내리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해골은 즉시 하얀 실을 통해 입에서 분출한 회색 기운을 노란 구렁이에게 흘려보냈다. 그러자 구렁이의 머리를 시작으로 회색 기운이 닿는 곳마다 매끄럽던 구렁이의 피부가 빠른 속도로 빛을 잃고 말라비틀어져 가죽과 뼈만 남았다.
그러나 해골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하얀 실을 끌어 남은 시체를 입에 넣고 씹어 댔다.
빠각! 와드득!
자신과 오랜 세월 함께 하던 영수의 최후에 노란 장포의 수사는 분노가 일었다. 그는 주위의 하얀 기운들을 훑어보더니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쳐 입에서 노란 벽돌을 분출했다.
중년인이 수결을 맺으며 벽돌을 가리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열댓 장 크기로 커지며 노란 영기의 빛을 기세등등하게 뿜어댔다.
“이게 혼천전이오? 실망스럽게도 소문만 못합니다 그려. 내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수사는 그냥 오자동심마(五子同心魔)들의 손에 죽어야겠소.”
허공의 수사가 탄식하며 실망감을 드러내자 하얀 그림자들의 신형이 흔들리며 중년인을 향해 날아갔다.
중년인은 상대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큰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머리 위의 벽돌은 그 소리에 맞춰 회전하기 시작했고 돌풍이 일어나 중년인을 그 사이에 두고 보호했다.
그러나 하얀 그림자들은 돌풍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노란 돌풍 속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 벽돌이 떠돌고 있었다.
콰콰쾅!
연달아 충돌음이 들리고 하얀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노란 빛줄기가 그 속을 뚫고 하늘 위로 솟구쳐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무 장 밖에서 나타났다.
“어딜!”
파파파팟!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네 개의 하얀 그림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풍을 빠져 나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노란 빛줄기 전방에 갑자기 영기의 파동이 느껴지더니 네 개의 하얀 그림자가 나타나 달려들었다.
노란 장포 수사가 기겁해 둔술을 멈추고 손을 휘둘렀다. 몇 장 크기의 거대한 벽돌이 막아섰으나 하얀 그림자들은 놀랍게도 그것을 그대로 관통해 노란 장포 수사의 면전까지 들이닥쳤다.
이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는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고보에 영력을 불어 넣었다. 이에 남색 영패가 빛을 발하더니 남색 기운이 분출되어 하얀 그림자들을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그러나 하얀 그림자들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히죽거리다 남색 기운 속에서 스스로 붕괴했다.
불길한 느낌에 중년인이 서둘러 달아나려는데 돌연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하얀 그림자들이 덮쳐왔다. 그것들은 중년인의 보호막이 없다는 듯 그대로 꿰뚫어 그의 몸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전신이 뜨거워지더니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만일 다른 수사가 곁에 있었다면 노란 장포 수사의 몸이 급속하게 말라 비틀어져 간시로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간시 속의 원영 또한 체내로 들어온 하얀 그림자들에게 잡아먹힌 지 오래였다. 다시 몸 밖으로 나온 하얀 그림자들은 해골로 변해 중년인의 시체마저 잔혹하게 뜯어먹었다.
그때 나머지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 돌아오더니 다섯 개의 하얀 그림자가 나란히 떠올랐다. 아래쪽의 폭음도 점점 잦아들었고 흑의인 중 검은 노인이 격앙된 얼굴로 날아왔다.
“대장로님을 뵙습니다. 하 씨 가문의 수사 72명을 멸살했고 아직 남은 직계 혈족이 300명 정도 되는데 어떻게 할까요?”
흑의 노인은 하얀 그림자들을 향해 공손히 몸을 굽혔다.
“전부 죽여라.”
“예!”
흑의 노인은 대답을 하고 곧바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
“잠깐. 갈 장로가 전해 오기를 본 문의 장로를 죽이고 음라번을 가져간 수사가 현재 남강에 있을지 모르다고 한다. 이 일을 마치는 대로 모두를 이끌고 수색하라. 본 종의 보물이 다른 수사의 손에 머물게 두고 볼 수는 없지.”
“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흑의 노인이 긴장한 기색으로 답하고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음라번을 지닌 넷째를 죽이고 천란 성전의 추살을 피해 이곳까지 왔을 정도면 하 씨 가문보다는 강하겠지. 흥미로운 상대가 될 수도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