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4
554화. 곤오산(昆吾山)
남강의 접경지대를 한 노인이 경신술을 펼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몇 명의 연기기 수사들을 향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떠들어 댔는데 다들 처음으로 사문을 떠나 유람하는 것인지 그의 말에 한껏 귀를 기울였다.
만일 한립이 그 광경을 보았으면 약삭빠르게 생긴 노인의 얼굴을 보고 기겁을 했을 것이다. 그는 화신기로 추정되는 향지례였다.
사실 한립이 천부문을 떠나고 고위층이 나서기 전, 향지례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천부문 수사들은 크게 놀랐으나 분명 한립이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해 깊게 파고들지 않았고 말이다.
몇 년이 지나고 노인은 또 다른 곳에서 저계 수사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대진 수도계의 거대 세력들은 최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심지어 몇몇은 황족인 엽 가를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증거가 없었기에 은밀히 조사만 하고 있었다.
대진 전체가 폭풍 전야와 같았다.
몇 달 후, 남강 은사산 화산 구역.
듣기 좋은 울림이 길게 퍼져 하늘 멀리까지 날아갔고 즉시 눈부신 푸른 빛줄기가 화산 지대 틈에서 튀어나와 사라졌다.
그 엄청난 속도에 빛줄기를 발견한 수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레 후, 동일한 푸른 빛줄기가 남강 최대의 원시림을 지나 서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수천 장 두께의 누런 독무로 휩싸인 커다란 분지지역을 발견했다.
“한 수사, 조금 늦으셨습니다. 백 수사와 원 수사께서 며칠을 기다리셨어요.”
푸른빛이 가시고 한립이 땅에 내려서자마자 가부좌를 하고 있던 수사들 중 노인이 일어났다. 그곳에는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넨 부 노인과 반 년 전에 보았던 백요이, 거한, 흑의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법보 제련이 며칠 전에 끝나 급히 왔는데도 늦었습니다. 너그럽게 양해해 주십시오.”
한립이 포권을 하며 수사들에게 미안한 내색을 했다.
“괜찮습니다. 음풍이 줄어드는 기간은 세 달간 지속되니 며칠 늦어져도 큰일은 아니지요! 제련을 마치고 바로 오셨다니 잠시 쉬면서 법력을 회복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백요이가 한립을 보며 세심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백 수사의 말씀대로 음양굴에 들어가기 전에 법력을 최대한 보충하시지요.”
부 노인도 동의하는 바였고 거한과 상 씨 성의 여인도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예, 그럼 실례지만 이틀 후에 음양굴에 들어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백 여 장 밖의 누런 독무를 응시했다.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나무 속성의 중계 영석을 하나씩 들고 가부좌를 틀었다.
다른 수사들은 이미 법력이 충만한 상태였지만 다들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이틀은 순식간에 지났고 한립이 눈을 뜨자 부 노인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출발하십시다.”
수사들은 다들 분분히 몸을 일으켜 각양각색의 보호막으로 전신을 감쌌다.
“독을 물리치는 여의를 지니고 있으니 만독곡은 문제없습니다. 다만 독무 속의 미세한 독충들은 보호막을 잘 뚫으니 주의하세요. 만독곡에 상고시대부터 남아 있는 금제만 아니면 비행을 해 음양굴 입구까지 날아갔을 텐데 아깝습니다.”
그가 앞장서서 걸어가고 나머지가 뒤따랐는데 누런 독 기운이 나타나자 그가 옥 여의를 허공에 던지고 주술을 외웠다. 동시에 은색 파동이 한 겹 또 한 겹 퍼져나가 독무가 대부분 흩어졌다.
거한은 저계 수사들처럼 경신술을 펼쳐 만독곡을 질주하기 시작했고 다른 수사들도 몸에 술법을 걸고 그 뒤를 따랐다.
* * *
반나절 후 만독곡 깊은 곳에 은빛이 번뜩이며 열댓 개의 불덩이가 휘몰아쳤다.
푸욱.
불덩이들은 터지지 않고 도중에 열댓 마리의 불뱀으로 변해 땅을 스치며 기어갔다. 뱀들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화염이 치솟아 순식간에 독충들을 재로 만들었다.
“한 수사의 법술이 섬세하기 그지없습니다. 주 공법이 불 속성이라고 하셔도 믿겠어요.”
“아닙니다. ‘화탄술(火彈術)’이라고 수행이 낮을 때 익힌 잔재주인데 오래 사용하다보니 익숙해졌을 뿐입니다.”
여인의 웃음소리에 한립이 담담히 설명했다. 그들은 곧 안개 속에서 나와 점점 사그라지는 불바다 속을 걸어 나왔다.
한립이 먼 곳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선두에서 걸어가던 거한이 머리 위의 옥여의(玉如意)를 가리켰다.
그러자 옥여의에서 은빛이 방출되며 앞을 비추자 진한 독무로 흐릿하던 앞이 한결 밝아졌다. 그리고 수십 장 앞에 거대한 땅굴이 나타났다.
동굴 입구에는 검은 음풍이 분출되어 얼마나 깊은지 가늠할 수도 없었고 인근의 독무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이곳이 음양굴 입구인가 보군요. 모두 갑시다.”
한립과 백요이를 제외하면 나머지 일행들은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주저 없이 다가갔다. 동굴에서 불어 나오는 음풍은 강렬했지만 다들 평온해 보였다.
한립이 동굴의 아래쪽 벽면을 살피자 수정처럼 반짝이는 게 마치 얼음이 얼어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새까만 바람이 불어대며 이상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귀곡성이나 야수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진정한 양백음풍(凉魄陰風)은 아닙니다. 아래쪽으로 수백 장 들어가야 양백음풍이 불기 시작하지요. 아무 대비 없이 들어갔다가는 원영기 수사라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자유주(紫幽珠)를 지니고 있으니 그 위력이 크게 감소될 겁니다. 다만 동굴 속은 음풍의 세기가 일정하지 않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다들 경험이 풍부한 분들이니 제가 긴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요.”
부 노인이 동굴을 살피고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후 그가 손을 들자 보라색 구슬이 등장했다.
자유주(紫幽珠)가 나타나자 한립은 자연스레 그것을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보라색이 번뜩이며 정신이 아득해지고 의식이 통제되지 않았다.
그가 흠칫 놀라자 체내의 대연결이 저절로 운행하며 머리가 맑아지고 의식이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한립은 무표정했지만 내심 크게 놀랐다.
거대 마교 종파의 보물은 과연 남달랐다. 그가 힐끗 거한과 백요이를 살펴보았는데 그들 역시 자유주를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각자 어떤 비술을 이용했는지 혼백을 홀리는 구슬의 효과에 완전히 잠식당하지는 않은 듯 했다.
부 노인은 그들의 변화를 모른 척 하며 구슬을 들고 낮게 주술을 읊었다. 그러자 빛이 번뜩이며 보일 듯 말 듯한 기운이 구슬에서 빠져 나와 주위를 둥글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음풍(陰風)의 차가운 기운이 크게 줄어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자유주는 명불허전입니다.”
원(元) 씨 거한이 자신의 옥여의를 회수하며 칭찬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진정한 위력은 저 아래 들어가야 보실 수 있을 텐데요. 자, 가시지요.”
노인은 한 손에는 보라색 구슬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붉은 색 기운을 뿜어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부 노인이 먼저 붉은 기운에 휩싸여 지하 굴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다른 수사들도 보라색 기운에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며 보호막을 발동시켜 그 뒤를 따랐다.
거한은 청록색 옥패를 방출해 머리 위로 던졌고 백요이는 얼음덩이 같은 비도가 나타나 그 주위를 맴돌았다. 검은 의복을 입은 미 부인 상 수사는 새까만 방패를 몸 앞에 띄웠다.
한립은 그저 입에서 금색 비검 몇 개를 방출해 주위를 선회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도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 *
한립 일행이 음양굴로 들어가자 남강(南疆)의 이름 모를 작은 호수 위에 일고여덟 명의 수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흑의(黑衣) 수사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들은 몇 달 전, 황궁에서 모였던 엽 가(葉家)의 수사들이었다. 그 중에는 큰 머리의 괴인도 있었고, 각진 얼굴의 수사도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한립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고마가 있었다.
그는 눈앞의 수사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든 신경 쓰지 않았다.
“4백 년 전, 저희 엽 가는 상고 수사의 무덤의 비석에서 곤오의 대략적인 행방을 발견했습니다. 곤오산은 수도를 위한 성지로 알려져 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상고 수사들이 지하에 봉인했죠.
수많은 상고 수사들의 거처가 있는 산이었기에 그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고 수사들이 이 산을 봉인하며 두 개의 통천령보를 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저희 엽 가에서 이것들을 차지한다면 정마 양도를 압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거사를 위해 백여 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이 대진 전역을 뒤져 드디어 비석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즉시 가문의 진법대사들을 파견해 금제를 풀기 시작했고, 사안이 중대하기에 전대 대장로와 몇몇 장로만이 이 일에 대해 알고 계셨죠.”
흑의 수사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런데 상고 금제가 워낙 고명한데다 거의 백 리에 달하는 지역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 열댓 명의 진법대사들이 백 년 넘게 매달려 겨우 금제(禁制)를 풀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반드시 하늘과 땅의 힘을 빌려 진법을 파해야 봉인 금제를 열 수 있었는데 진법의 수가 많아 워낙 대량의 재료가 필요하고 재료들이 희귀해 비밀리에 모의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른 세력의 주의를 끌어 이 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테니까요.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야 가문의 진법대사들이 호수 아래 펼쳐진 마지막 진법을 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름 후가 되면 저희는 최상위의 은닉 결계를 펼쳐 결계가 깨지면 일어날 이상 현상을 숨길 것입니다. 그때 장로님들께서는 곤오산으로 들어가셔서 보물들을 취하시면 됩니다.”
설명을 마치고 나서 흑의인 수사는 옆으로 물러났다.
“곤오산? 이번 거사의 목적이 곤오산이었다니!”
“사실 저는 지금까지 상고 시대의 거처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짐작했었습니다.”
“허허, 곤오산과 통천령보라니!”
일순 대두 괴인과 각진 얼굴의 수사, 고마 셋을 제외한 수사들이 놀라 웅성거렸는데 다들 흥분한 기색이 다분했다.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 결계를 깨는 것은 통천령보를 취하기 위한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간단했으면 셋째 아우가 모두를 이곳에 모으고 숙부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셋째 아우는 다른 세력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한 달 후에나 도착할 것입니다. 그때 모두 다함께 곤오산으로 들어갈 것이니 알아두십시오.”
각진 얼굴의 수사가 얼굴을 굳히며 하는 말에 웅성거림이 멈추었다.
“형님 말씀은 곤오산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도사 차림의 엽 가 장로가 물었다.
“현재로선 큰 문제는 없지만 살아서 나오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럴 리가요. 이번에는 일곱째 숙부님과 셋째 아우가 동행할 텐데. 금제가 아무리 대단해도 목숨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습니까?”
유생 차림의 수사가 놀라 중얼거렸다.
“성지로 이름난 곤오산을 어째서 땅 속 깊숙이 봉인했는지 생각했겠느냐. 거기에 통천령보를 두 개나 남겨 놓았다는 것은 엄청난 비밀이 있다는 것을 게다. 그런데도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각진 얼굴의 수사의 말에 다른 수사들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됐다. 어차피 전부 추측이 아니더냐. 상고 수사들이 무슨 이유로 봉인을 했는지는 몰라도 너희는 크게 걱정할 것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노부가 나설 것이니.”
대두 괴인이 웃으며 수사들을 안심시켰고 그들은 그제야 평정을 되찾았다. 그때 각진 얼굴의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고마를 바라보았다.
“한 장로, 상고 경전에 정통하시니 이번 곤오산 원행에 도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마기(魔器) 두 개나 더 찾아 놓았으니 이번 일만 해결되면 바로 내어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