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550화 (307/2,000)

# 550

550화. 요수를 굴복시키다

사흘 후, 한립은 또 다른 무인도에 등장했다.

그는 무인도의 바위 위에 서서 대연 신군이 깃든 난쟁이 꼭두각시를 보며 숙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세상을 뜨시려는 것입니까. 지금 상태라면 제가 한두 달 더 혼백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 드릴 수 있습니다.”

“며칠 더 살아 뭐한다고?  괜히 고생할 것 없다. 하루라도 빨리 윤회에 들어가는 것이 내게는 더 나을 게야.”

“그러시다면 저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윤회가 있어 선배님께서 다시 수도의 길을 걷게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녀석아, 윤회가 있다고 해도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지도 모르는데 그리 운이 좋을 수 있겠느냐. 그건 됐고! 당초 칠염선 제련법을 개량해 줄 때 내게 한 가지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다만 줄곧 아무 말씀이 없으시기에 잊고 계시나 했습니다.”

“내 요구 사항은 간단하다. 노부는 가능하다면 네가 서극 지역의 천죽교를 되찾아 왔으면 좋겠구나! 어차피 지금 천죽교를 이끄는 이들은 노부 문하의 제자들이 아니니 문하의 제자를 한 명 골라 내 연구를 전승하게 하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 나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구나.”

“문제없습니다. 때가 되면 자질이 출중한 제자를 받아 들여 선배님께서 전수해 주신 괴뢰술을 전부 가르치고 천죽교의 교주로 삼도록 하지요.”

“허허! 이제 되었다. 노부의 공법과 비술 그리고 평생의 경험과 지식을 전부 ‘대연보경(大衍寶經)’이라는 옥간에 남겨 놓겠다. 옥간을 동복천에 둘 것이니 네가 익힐 만큼 익히고 천죽교를 계승할 제자에게 물려 주거라. 그래야 진정으로 본 신군의 계보를 잇는다고 할 수 있겠지.”

대연 신군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이어 난쟁이가 입을 벌려 녹색의 빛을 하늘 높이 분출하고는 주술을 읊어댔다.

녹색 빛은 빠르게 몸을 불리며 수십 장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 찬란한 빛에 아래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한립은 순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쿵!

주술 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고 녹색 빛이 터져나가 하늘을 물들였다.

한립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천죽교를 개창한 대연 신군이 이렇게 무(無)로 돌아간 것이다.

그가 하늘을 쳐다보며 묵묵히 서 있다가 한참만에야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시선을 내리니 혼백을 잃은 난쟁이 꼭두각시만이 생기를 잃고 허공에 떠 있었다.

한립은 소매를 털어 난쟁이 꼭두각시를 회수하고는 죽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옥간 몇 개가 쏘아져 나왔는데 바로 살펴보니 과연 대연 신군의 그간의 연구와 비술, 수도계의 기문기사(奇聞奇事) 들이 가득했다.

옥간들을 저물대에 넣은 한립이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꼭두각시는 완성했고 이제 삼염선만 제련하면 고마와 싸워볼 만 해질 것이다.

다만 문제는 제련 방법이 조금 복잡해서 천, 지, 인의 세 가지 화염으로 재료를 손질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 중 인화와 지화는 대략 해결될 듯 했으나 유일하게 성가신 것이 바로 천화로 제련해야 하는 재료였다.

옥간에 따르면 천화는 실제로는 천뢰의 화염이었다. 뇌우가 쏟아지는 때가 되어야 자연 상태의 뇌화를 모을 수 있었다.

비록 한립이 천뢰자를 지니고 있지만 이것은 뇌전의 힘을 모은 것이라 뇌화 자체로 제련해야 하는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아마 몇 개월 내로 적당한 날씨가 되면 뇌화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삼염선을 제련해 내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다.

한립은 날짜를 계산해 보다 구유종 부 노인과 남강에서 만나기로 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비록 아무 사정도 모르고 맺은 약조지만 어차피 남강의 은사산에 연중 화산이 분출해 지화로 유명했으니 재료를 제련할 겸 부 노인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상당히 공을 들여 수사들을 모으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다 보니 이곳에 온 목적의 절반 정도는 이루었다. 나머지 절반은 음라종에서 봉혼주를 풀 방법을 알아내는 것과 고마의 수중에서 비검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푸른 빛줄기로 변해 섬의 산맥을 타고 날아가다가 어느 산봉우리 아래에 천기부를 방출하고 여러 금제를 설치한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천부문에서 얻은 화영부를 체내에 넣고 연화(煉化)시킨 후 가부좌를 하고 앉아 영수대 하나를 풀어 허공에 던졌다.

저물대가 풀리며 하얀 기운이 빠져 나와 수척 크기의 노란 요수가 땅에 떨어졌다. 몇 년 전에 잡아둔 토룡갑이었다.

요수는 천산갑이라는 동물과 흡사했는데 여러 색깔의 부적을 붙인 탓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립을 바라보며 가련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몇 년간 잡혀 있었더니 야성이 많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불쌍한 척 그만하거라. 칠급 요수에 지능까지 높으니 인간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겠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이 자리에서 해결을 보자꾸나. 날 따르겠다면 네게 의식을 통제하는 금제를 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원치 않는다면 너를 죽여 비늘과 요단으로 영석이나 바꿔 써야겠구나.”

한립이 음산히 말하자 토룡갑이 몸을 떨더니 두려운 기색이 스치고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다.

“내 영수가 되는 것이 다른 수사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요수의 수명은 본래 인간 수사의 수명을 뛰어넘지. 내 생전에만 부림을 받고 내가 죽거나 상계에 오를 때는 자유롭게 해주마.”

한립의 말에 토룡갑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민에 빠진 듯 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요수를 보고 한립은 돌연 저물대에서 청록색 병을 꺼냈다.

뚜껑이 저절로 열리며 한기가 어린 빛이 한 방울 빠져나왔고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토룡갑은 곧바로 몸이 굳어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립의 손짓에 따라 은색 액체가 동그랗게 구슬로 뭉쳐졌다.

“보아하니 무엇인지 알아본 모양이구나. 내 영수가 되겠다면 나중에 한수를 주어 화형뇌겁에서 살아남게 해주겠다. 내 조건은 이게 다이니 선택하거라.”

토룡갑은 한수가 변한 은색 구슬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잠시 기다리던 한립이 콧방귀를 뀌더니 은색 구슬과 작은 병을 회수했다.

“……?”

그가 손을 펼치자 보라색 화염이 이글거렸고 손가락에서 튀어 나온 비검의 표면에 달라붙었다.

쉭.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비검과 엄청난 영력에 기겁한 토룡갑은 고개를 숙여 간신히 비검을 피하고는 바로 머리를 처박아 항복의 뜻을 알렸다.

* * *

반나절 후 한립은 천기부를 회수해 내륙으로 날아갔다.

그는 보름 만에 육지에 도착했는데 천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강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틈틈이 쉬며 삼염선의 재료 일부를 영화로 제련하기 시작했는데 맑은 날이 계속 돼 뇌화를 모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남강은 열대우림이라 날씨가 습하고 언제든 폭풍우가 몰아쳤다 사라지곤 했다. 그곳에 이르면 뇌화를 모으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넉 달 후, 그는 드디어 여러 주와 군을 지나 남쪽 변경에 이르렀다. 남강은 거대 종문이 아닌 열댓 개의 중등 종문이 나눠 갖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에는 이권 다툼이 잦았으나 일단 외부세력이 남강을 노리고 침입하면 하나로 똘똘 뭉쳐 싸웠다.

정마 십대 종문이라 불리는 세력도 쉽게 건들지 못했는데 이럴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수사들이 익힌 특수한 공법에 때문이었다.

현지 종문들은 보기 드문 특수한 공법을 익혔는데 독에 능한 것은 물론이고 독충을 다루는 데다 저주와 사술에도 뛰어나 동급 수사들도 상대하기 어려웠다.

조운부(潮云府)는 남강 서쪽에 위치했고, 그곳에 위치한 쌍갈산은 인적이 드문 산맥으로 수행이 높거나 독에 상극인 단약을 복용한 수사가 아니고서는 진입하기 어려웠다.

이곳이 남강에서 유명한 것은 장독(瘴毒) 때문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값나가는 독초가 자라기에 좋은 환경이었고 철미전갈과 홍선전갈이라는 두 종류의 독전갈들이 자생해 저계 수사들이 포획에 성공하면 영충으로 삼고 부리기에 좋았다.

한립이 쌍갈산 인근에 이렀을 때는 매 년 한번 있는 독무가 대폭발하는 시기라 수많은 수사들이 모여 있었다. 이 기간이 되어야 독전갈들이 굴에서 나와 활동했기에 그것들을 잡기에 아주 좋은 때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연기기나 축기기 수사들이었고 고계 수사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곳이었다.

한립과 같은 원영 중기 고인의 출현에 수사들이 당황해 소동이 벌어질 것이 당연했기에 그는 즉시 독무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는 푸른 보호막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 분홍색 독무도 독충들도 전혀 접근하지 못했다. 저계 수사들에게는 치명적이었지만 그의 수행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부 노인은 쌍갈산에서 보자고만 하고 정확한 위치는 말하지 않아 일단 산 정상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가끔 저계 수사 몇을 지나치긴 했지만 짙은 독무와 그의 엄청난 속도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 노인이 이곳에 와달라고 청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며 날아가는데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렸다.

“변이 철미갈(鐵眉蝎)입니다. 모두 피합시다.”

목이 잠긴 사내는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다지 머지않은 곳에서 폭음과 기이한 영충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곳을 힐끗 바라보았다.

쉭쉭!

뜻밖에도 파공음이 들리며 몇몇 남녀 수사들이 한립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닥을 딛을 때마다 몇 장씩 솟구치는 것이 경신술을 쓰고 있는 듯했다.

“음?”

한립은 그 중 여인 하나를 보고는 둔술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매를 털어 푸른 기운으로 방원 수십 장의 독무를 몰아내 버렸다.

몇몇 수사들이 이 기이한 현상에 놀라 멈추었는데 그들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한립이 허공을 향해 손을 주었다. 그러자 푸른빛의 손이 나타나 거무튀튀한 무언가를 잡아 한립에게 돌아왔다.

그것은 한 척 길의 새까만 껍질을 지닌 거대한 전갈이었는데 기다랗게 뻗은 꼬리에 보라색 독이 묻어 있었다.

바로 저계 수사들이 추격하던 변이 철미갈이었다. 이 전갈 요수는 이급 요수였는데 빛의 손에 붙잡혀 꼼짝하지 못하고 고통스런 소리만 냈다.

이 모습에 수사들이 놀라 눈을 부릅뜨고는 허공에 있는 한립을 바라보았다.

“진경에서 헤어진 왕 수사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조 소저께서는 안녕하시지요?”

“당신은 한 수사, 아니 한 선배님 아니십니까! 조 사매는 진경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수사들과 영초를 찾으러 온 길이고요.”

노란 장삼을 걸친 여인은 놀란 기색을 지우고 무척 반가워했다. 그녀는 진경 외곽에서 조몽용과 함께 있던 왕 사저였다. 당시 한립은 비검이 우는 소리를 듣고 떠났고 여인은 한립이 고계 수사라는 것을 알았기에 예를 취한 것이다.

다른 수사들은 왕 여인이 허공의 고계 수사와 아는 사이인 것을 보고 안심하고 따라서 인사를 했다.

“백부께서 주남 대장군이신데,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영초를 구하러 오신 겁니까?”

“제 가문은 부유한 편이지만 저는 자질이 부족해 가문에서 그리 중요시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석을 제게 많이 쓸 리 없겠지요.”

“자질이 그리 떨어져 보이지는 않군요. 축기기도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니 이 전갈 요수는 소저에게 내어 드리지요. 저는 갈 길이 바빠 이만 가보겠습니다.”

푸른 손이 빛으로 흩어지면서 거대 전갈이 저계 수사들 앞에 떨어졌는데 마치 죽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이렇게 감사…….”

여인이 희색이 만연히 감사를 표하려는데 한립은 푸른빛으로 변해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왕 여인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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